▲ 윤봉길의 한인애국단 입단 배경으로 나온 태극기(사진=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1919년 3월 1일 온 국민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전 세계인이 '손에 손잡고'를 불렀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국민은 감동했다. 이와 같은 역사의 현장에는 공통적으로 '태극기'가 있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3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민족의 얼과 염원 담은 태극기의 변천사 한눈에 본다'로 정하고 관련 기록물을 누리집(www.archives.go.kr)을 통해 제공한다고 16일 밝혔다. 

기록물은 총 45건(사진 21건, 유물 9건, 우표·엽서·포스터 6건, 동영상 5건, 문서 4건)이다. 국가기록원 소장물 외에 독립기념관과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물도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기, 태극기의 역사는 무엇인가?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식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사용됐던 국기 형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882년 9월 미국과 통상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는 고종의 명을 받아 배 위에서 태극기를 그렸다. 그때 그린 '태극·4괘' 도안의 기를 6개월 후 고종이 왕명으로 국기로 제정·공포했다. 
 
하지만 국기 제작에 관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아 태극기는 다양한 형태로 제작됐다. 고종의 외교고문이었던 데니(Owen N. Denny)가 소장했던 태극기(1890년)나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했던 태극기(1907년) 등 광복 이전의 태극기를 보면 태극의 문양과 괘의 위치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되어 있다.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은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 조국의 국권을 곧 회복할 것이다)'이란 글자를 새기며 조국의 국권 회복을 기원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21년 신년 축하식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며 대한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입단 기념촬영에도 태극기는 있었다. 
 
광복 후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지자 정부는 1949년 '국기시정위원회'를 꾸려 오늘날의 '국기제작법(문교부고시 제2호)'을 확정했다. 1972년부터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실시했다. 현재는 2007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에 의해 국기에 관한 사무 전반을 통합 관리하고 있다.
 
▲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붉은악마 응원단이 펼쳐든 대형 태극기(사진=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광복 후 태극기는 정부의 주요 행사에 게양됐다. 경축 시가행진을 할 때면 맨 선두에 대형 태극기를 등장시켜 행사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또 올림픽·월드컵 등 국제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한 선수의 온 몸에 휘감기며 환희의 상징으로 사용됐고, 선수들의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한 응원의 도구로도 한 몫을 담당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가로 60m 세로 40m의 초대형 태극기가 대표적이다. 
 
이상진 국가기록원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태극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나라사랑의 마음을 고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