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박사는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에서 강의하던 중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다.

▲ 한국을 조국처럼,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한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공적으로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며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사진=국가보훈처>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기록으로 남기며, 일제의 비인도적 탄압에 맞서 싸웠다. 특히,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를 직접 방문하여 참혹한 방화 학살 현장을 촬영하여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스코필드는 같은 해 5월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유관순 등 투옥된 독립운동가를 면회한 후 조선총독부에 고문과 비인도적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한국의 상황에 대해 각국 언론에 동정과 지지를 호소하였다.

▲ 스코필드의 한국어 선생이자 통역사인 목원홍과 함께스코필드는 한국 이름인 ‘석호필(石虎弼)’을 좋아하고 즐겨 사용했다. 그 발음이 스코필드와 비슷할 뿐 아니라 철석같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돌 석(石)’,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이 무서운 사람임을 나타내는 ‘호랑이 호(虎)’,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도울 필(弼)’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의 한국 이름이 그의 인격과 삶을 대변해 준다. <사진=국가보훈처>

 박사는 그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극동 선교사 8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하라 수상을 면담하여 일제의 동화정책과 민족 차별을 철폐하고 한국인에 대한 강압과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후 일제의 감시는 물론 살해 위협까지 받다가 1920년 4월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캐나다로 돌아간 뒤에도 강연이나 기고를 통해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알리고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였다.

 1958년 8월 국빈 자격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스코필드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1968년 정부는 캐나다인으로 우리 겨레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친 스코필드 박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한국을 조국처럼,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한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공적으로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며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의 산증인인 스코필드 박사를 2016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