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벤자민인성영재학교(교장 김나옥, 이하 벤자민학교) 경남학습관 박소미 양(18)은 지난해 12월 28일부터 올해 1월 16일까지 유럽평화기행단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기행단은 유럽 곳곳을 누비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리고 평화를 호소하는 <나비의 꿈> 캠페인을 펼쳤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리고 평화를 호소하는 유럽평화기행단이 스트라스부르그 성당 앞에서 수요집회를 하고 있다(사진=박소미 벤자민인성영재학교)
 
평소 인터넷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여자로서 할머니들의 소녀시절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일본의 진실한 사과만을 바란다”고 하시는 할머니들은 연세도 많으시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현재 46명으로 줄어들었다. 더 많은 분이 억울한 마음을 안고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위안부’ 문제가 해결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어떤 것을 할까 고민을 하던 중 SNS(Social Network Service)에서 ‘희망나비 유럽평화기행’을 보게 되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억울한 역사를 세계에 알리고 할머니께 도움도 되고, 유럽 여행하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니 더욱 뜻 깊은 여행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나의 뜻을 이야기하고 신청하게 됐다.
 
12월 28일 프랑스 파리 사태로 걱정을 안고 도착한 샤를드골공항. 한일 양국 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라는 뉴스를 속보로 접했다. 너무 충격이었다. 
 
30일 파리 보쥬광장. 부단장님은 우리에게 할머니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억울하고 화가 났다. 왜 할머니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부가 알아서 해결했는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파리 에펠탑 앞 트로카데로 인권광장에서 집회하기로 했다. 
 
1월 1일 인권광장에서 첫 번째 캠페인을 했다. 새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캠페인을 하면서 ‘내가 꼭 해야 한다’라고 생각한 일이었기에 추운 것도 잊고 참으면서 할 수 있었다. 부족한 부분도 많았는데 많은 분이 잘한다고 칭찬해주어 뿌듯했다. ‘위안부’를 설명하는 종이를 나누면서 서명을 받으러 다녔는데 한 분씩 서명해줄 때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 좋았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리고 평화를 호소하는 유럽평화기행단이 프라하 올드 타운 광장에서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사진=박소미 벤자민인성영재학교)
 
3일 스위스 루체른. 자유시간이 주어졌지만 내가 온 목적을 되새겨 빈사의 사자상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사자상은 프랑스 혁명 당시 용맹하게 싸운 스위스 용병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많은 외국 관광객이 내가 들고 있는 것을 읽고 최고라고 말해주니 힘이 났다. 알렸다는 그 자체가 좋았고 놀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뜻 깊은 일을 한 나의 선택이 대견스러웠다.
 
6일 오스트리아 빈 슈테판광장에서 평화 캠페인을 개최했다. 서명을 받으러 다녔는데 거절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실망하기보다 더 열심히 알려야겠다는 마음먹었다.  
 
8일 체코 프라하에는 한국관광객들이 절반이었다.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카를교(Charles Bridge)에서 1인 시위를 했다. “대단하다, 추운데 고생한다”면서 응원해 주는 분,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라면서 5유로를 주는 분이 있었다. 타국에서 한국의 정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반면 “이거 끝난 일 아니냐, 끝났는데 왜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위안부’ 문제에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최대한 설명했다. 사람들이 얼른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을 때 뭔가 해냈다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9일 프라하 올드타운광장에서 캠페인을 했다. (이제는) 적응이 되어서 힘들지도 않고 안 하는 날에는 왠지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먼저 다가와 어떤 것인지 물어보고 서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플래시 몹을 보면서 같이 춤을 추는 외국인, 여러 활동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한국 관광객, 사진을 찍고 캠페인을 끝까지 보고 함께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더욱 힘이 났다. 또 캠페인을 할수록 할머니들 생각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13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성당 앞에서 마지막으로 캠페인과 집회를 했다. 플래시 몹을 하다가 종이가 다 날아가 웃기도 했지만 즐겁게 마무리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 프랑스의 오하두흐 마을이다. 왼쪽부터 독일 나치군의 피해로 학살당한 사람들의 사진들과 모든 건물이 불타서 철물 구조만 남은 모습(사진=박소미 벤자민인성영재학교)
 
한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떠나는 여행이라 할머니들에 관련한 일정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제1, 2차 세계대전과 유럽의 역사에 관련된 일정도 많아서 어리둥절했다. 기행을 하면서 모든 일정이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경지식이 없으니 유럽역사 탐방할 때 알아듣기가 어려워 힘들기도 했고 (그동안) 역사를 싫어해서 벼락치기로 공부했던 것이 조금 후회스럽기도 했다.
 
유럽 역사를 돌아본 것 중에서 프랑스의 오하두흐마을이 기억에 남는다. 오하두흐는 평화로운 분위기의 마을이었다. 독일 나치군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나치군은 좁은 교회에 마을 사람들을 집어넣었다. 문을 닫고 불을 지펴서 학살한 후 나중에 확인사살도 했다. 총탄 자국도 그대로 있었다. 
 
마을의 건물은 불타서 철물 구조들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나치가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안타깝고 억울하고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학살된 사람들의 무덤이 있었는데 모두 같은 날짜로 적혀있었다. 희생자 사진들이 한 줄로 정렬 되어있는 것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유가족인 까미유 쓰농(Camille Senon) 할머니는 나치군이 학살한 역사를 알기 위해 (기행단이) 와 준 것에 고마워했다.
 
오하두흐를 보면서 어떻게 이 마을을 그대로 보존해 왔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옛 역사가 부끄러워 감추고 없애려하면서 헌 것을 부수고 새 것을 만들려고 하는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었다. 
 
이번 기행을 통해서 생각하는 폭도 넓어지고 앞으로 외국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서 세계인들과 소통하면서 지내고 싶다. 옛 것은 소중하며 역사를 올바르게 알아야하는 중요성도 깨닫게 되었다. 벤자민학교 1년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하는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값진 한 해를 보낸 것 같다. 이런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준 부모님께 정말 감사했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활동을 해보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위안부’ 문제 말고도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활동을 하면서 나 말고 주변 사람들도 조금씩 움직인다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바로 알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변 사람에게 알리고 주변 사람들은 또 주변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많은 사람이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뜻이 모인다면 일본 정부도 제대로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는 그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꼭 해결될 거라고 믿는다. 아니 해결되어야 한다.
 
▲ 박소미 벤자민학교
 
 
 
 
 
 
 
 
 
 
 
 
 
 
 
 
 
 
글. 박소미 벤자민학교 
감수. 윤한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