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도일대애서 활동하던 항일의병

“이범윤의 부대 이외에 러시아 땅에 다른 의병부대는 없었습니까?”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활동한 해조계몽파海潮啓蒙派가 있었네. 1905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許發浦)를 무대로 러시아 볼셰비키와 함께 항일투쟁을 벌인 한인부대가 있었지. 이범윤의 부대는 1908년 2월부터 소부대 규모로 작전을 개시하여 일본군과 접전을 시도했어. 100명 단위로 행동하되 경계가 허술한 지점을 택하여 두만강을 도강하고, 도강을 끝낸 부대원들이 갑산甲山, 무산茂山 등 예정된 지점에 집결하여 장기적인 항쟁을 벌이자는 것이었네. 나는 1908년 2월에 의병부대와 함께 행동을 개시했네. 당시의 부대장은 김제맹金濟孟이었어. 우리 부대는 회령 부근에 진출했지. 이 전투에서 4명의 일군 포로를 잡았어. 나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어.”

당시에 일본 경찰은 의병부대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의병들이 삼삼오오로 무리지어 도강 침투하여 일본군 토벌대와의 접전을 피해가면서 게릴라전법으로 소수의 군, 경찰이 주둔한 주차駐箚를 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기록에 보면 작전에 크게 실패한 경우도 있던 데요.”
“그것은 나의 실책이었어, 나는 2번째 전투인 7월 전투에 참가하였지. 의병은 여러 부대로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 일군을 교란하면서 작전하였네. 나는 전제덕全濟德이 이끄는 부대에 편성되어 행동했네. 인원은 100명이었어. 나의 의형인 엄인섭이 좌군령장左軍領將을 맡았고, 내가 우군령장을 맡았어. 부대는 움직임이 적에게 감지되지 않도록 엥치우를 출발하여 두만강 근처에 모였네. 우리는 두만강 하류를 건너 8,9일 경에 경흥慶興 남방에 있는 증산甑山으로 침투했어. 이범윤의 다른 부대들도 7월 10일에 신아산新阿山의 일군 수비대를 습격했고, 7월 18일에 김영선金永先의 부대가 두만강을 건넜지. 7월 25일에는 80명의 의병부대가 경성鏡城, 장풍長風으로 쳐들어갔어. 7월 29일에는 100여 명의 의병부대가 회령군會寧郡에 침공했어. 전재덕의 부대는 낮에 숨어 있었고, 밤에 걸었네. 우리는 압록을 도강한 후 에 일군 교통병(정찰병) 4명을 사살했네. 나는 적의 정찰병을 사살한 것은 작전상 과오라고 지적했네. 이러한 일로 해서 장교 간에 의견이 갈라지는 일이 생기게 되었지. 함부로 살상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는데,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므로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
“혹시 감상주의에 빠지신 것이나 아닌지.”
“그보다는 현실을 무시한 인본주의라 할까... 일군 수비대는 의병의 활동이 탐지되자 즉각 출동하여 의병을 찾아다녔네. 의병은 발견 즉시 사살한다는 것이 그들의 방침이었지. 8월 24일 전재덕의 부대는 장풍에서 일군 수비대와 교전하였어. 일본군과 장사치들이 포로로 잡혔네. 
 
“그대들은 모두 일본국의 신민들이다. 그런데 왜 천왕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고, 또 일로전쟁을 시작할 때 선서에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굳건히 한다고 해 놓고, 오늘에 와서 이렇게 다투고 침략하니 평화 독립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역적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냐.”
 
나는 포로들 앞에 나서서 말했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전혀 이토오의 허물입니다.”
 
적군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자가 있었네. 
 
“이등에게 잘못이 있지. 그대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내가 그대들을 살
려 돌려보내겠다. 그대들은 속히 돌아가되, 사로잡혔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
 
나는 그 말을 듣자 안중근 의사의 치기에 대하여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가 총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면 군율에 처벌을 받게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한 적군이 애원했네. 나는 그들에게 총을 주어 돌려보냈네. 나의 조치에 장교들이 불만을 토로하였어. 
 
“어째서 잡은 포로를 살려 보낸단 말입니까?”
 
항의하였어,
 
“현재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지 말라하였다. 그들이 하는 말이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인데 아니 놓아주고 어쩌겠는가?”
“왜적들이 우리를 잡으면 남김없이 참혹하게 죽이는데, 우리가 저들을 죽이러 와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해 가면서 그렇게 애써서 사로잡은 놈들을 몽땅 놓아 
보낸다면 우리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싸우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 적들이 그같이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다 함께 노하는 것인데, 이제 우리들마저 야만의 행동을 하고자 하는가. 충성된 행동과 의로운 거사로서 이등의 포악한 정략을 성토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서 동정을 얻은 다음에야 한을 풀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부디 많은 말을 하지 말라.”
의병들은 내가 하는 말에 승복하지 않았어. 그들은 부글부글 끓다가 내가 속한 부대만 남겨두고 모두 떠나 버렸네.”
 
▲ 한창걸韓昌傑(1892~1938)부대원, 80여 명으로 구성.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교전, 2007년 건국장 애국장을 받음. 안중근의 부대도 이와 유사한 무장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수원대 박환교수 다음 블로그 영영)
 
나도 다른 의병처럼 화가 나서 글쓰기가 진전되지 않았다. 
 
“자네도 다른 의병들처럼 화를 내는군.”
 
안중근 의사가 낙심하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모조리 다 죽였을 것입니다.”
“자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나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것이야?”
“훼손된 역사를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니 할 수 없군.”
“단언하건데, 적병들이 안 의사님의 당부를 들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자들이 토벌대를 이끌고 나타났더군. 병력은 감소하였고, 사기는 떨어진 뒤라 그들의 기습에 당할 수 없었어. 그러나 5시간 가까이 싸웠지. 날은 저물었고, 폭우가 쏟아졌네. 얼마나 다치고 죽었는지 알 수 없었네.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기습당한 지역을 빠져나왔네. 날이 밝아 확인해 보니, 60명이 살아 있었네. 마을로 내려와 보리밥을 얻어먹고 기운을 차렸지. 의병들에게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규율이 서지 않았어. 흩어진 자를 찾으려고 수색하며 가다가 복병에 걸려 싸워보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네. 나는 혼자 남고 말았네.  낙오되어 산 속으로 들어가 바위에 앉아 탄식했지.
 
“어리석다. 안중근이여.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나는 다시 숲을 헤치며 나갔네. 얼마 가지 않아서 4명의 동지를 만나게 되었지. 그들을 만나니 반가웠지. 그들도 반가워하였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내가 물었네. 네 사람의 의견이 모두 달랐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야 한다는 자, 죽고 싶다는 자, 포로가 되고 싶다는 자 등 말하는 것이 한심하였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시 1수를 지어 읊었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게
 男兒有志出洋外
 事不入謨難處身
 望須同胞警流血
 莫作世間無義神
 
 
나는 시를 읊고 그 뜻을 해석해 주고 나서 말했네.
 
“그대들은 모두 뜻대로 하라. 나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일본군과 더불어 한바탕 장쾌하게 싸워 대한제국 2천만인 중의 한 분자가 된 의무를 다한 다음에 죽기로 할 것이다.”
 
나는 말을 마치고 총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네. 그러자 한 대원이 뛰어 내려와 나를 붙들고 말렸네. 
 
“공의 의견은 온당치 못합니다. 공은 다만 한 개인의 의무만을 생각하고 수많은 생명과 뒷날의 큰 사업을 돌아보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오늘의 사세로 보아 지금 죽는다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다시 연추로 돌아갔다가 앞날의 좋은 기회를 기다려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십분 이치에 맞는 일인데 어찌 깊이 헤아리려 하지 않으려 합니까.”
 
나는 그 대원의 말에 성급히 결정한 생각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네.
 
“공의 말이 옳소. 오늘 내가 죽으면 나는 다시없을 것이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마땅히 공의 말을 따르겠소.”
 
나는 그들과 함께 길을 찾아 나섰지. 우리는 5명을 더 만나 인원이 10명이 되었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의논하였지. 밤길을 걷기로 결론을 내리고 밤에 행동하였어. 
 
그러나 장마철이라 계속해서 비가 와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지. 그래서 빗 속에서 길을 잃고 또 다시 흩어지게 되었고, 남은 사람이 3명이 되었어. 우리는 아무도 그곳의 지리를 아는 사람이 없었네. 
 
뿐만 아니라 구름과 안개가 하늘에 차며 땅을 덮었네. 산은 높았고, 골은 깊었지. 인가가 전혀 없었어. 5일을 가도 가도 인가가 없는 산속일 뿐이었네. 하루 한 끼니 밥조차 얻어먹지 못하고 발에 신조차 신지 못해서 춥고 굶주리며 고생이 말이 아니었네. 풀뿌리를 캐어 먹고 담요를 찢어 발을 싸매면서 서로 보호하고 의지하며 가노라니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지.(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