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현배 선생(사진제공=독립기념관)
 

최현배(1894-1970)의 호는 외솔이고 경남 울산출신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한성고등학교와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였고 연희전문교수, 교육부 편수국장을 역임하였다. 최현배는 주시경의 한글강습원에서 한글을 익혔고 나철을 따라 대종교의 행사에 참여하였으며 대종교 경전을 읽었다.

“이 때(경성고보 2학년 때인 1911년) 선생님은 학교에 열심히 다니시는 외에 다른 학생이 안 하는 두 가지 일을 하셨으니, 하나는 주시경 선생님의 한글강습원에 나가셔서 우리말 공부에 열중하시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나철(羅喆) 대종사를 따라 그가 주관하는 대종교에 다니며, 단군 한배의 가르침과 은덕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최현배)이 이 학교(경성고보) 3학년 때(1912년)의 일입니다. 하루는 담임선생인 다카하시(高橋享)가 선생님을 불러 앞에 세우고, ‘대종교에 다니는 것은 부당하니, 그만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뒤에도 몰래 계속하여 다니시며, 『신단실기(神檀實記)』․『삼일신고(三一神誥)』 등 문헌을 손수 베껴서 읽으셨습니다.”(최근학,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전기」, 󰡔나라사랑󰡕1, 외솔회)
 
최현배는 주시경의 한글강습원 1기 졸업생이다. 그는 이때부터 한글을 연구하여 문법적으로 체계화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여기서 다카하시(1878-1967)와 최현배의 만남이 인상적이다. 다카하시는 누구인가? 다카하시는 당시 도쿄제국대학을 나와서 경성교보 교유(敎諭 : 일제 때, 중등학교의 교원)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경기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는 대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카하시가 남긴 해악은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정신적으로 조선의 유학에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를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로 규정하는 것이다. 사단은 이성적인 사고이고 주리론, 칠정은 감성적인 사고이면서 주기론으로 분류하면서, 사단과 칠정은 모두 이성적인 사고가 될 수도 있고, 감성적인 사고가 될 수도 있는데 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로 규정하는 이론적 문제를 낳는다. 그것이 고질적인 당파싸움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것이 조선 민족이 진보 발전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카하시의 도식은 필자와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쓰고 있지 않지만, 과거에 국사나 국민윤리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에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하나는 사판적인 그의 활동이다. 그는 뒤에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장, 경성제국대학교수, 혜화전문교장, 명륜연성소 소장 등을 역임한다. 지금의 경북고,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이다. 거기에 경기고까지 합치면 한국의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생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들 대학에서 조선의 인재들을 양성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사관을 교육한 것이다. 최현배는 이러한 다카하시의 식민주의 교육에 민족적인 정신을 가진 대종교로 맞서고자 하였다.   
 
최현배의 국학에 대한 관심은 삼국유사의 단군의 홍익인간에 대한 언급에서 잘 나타난다.
 
“이 傳說은 實로 우리 民族的 理想을 말함이다. 弘益人間이라 함은 곳 人文의 發達을 圖하며 人類의 福祉를 增進함을 뜻함이니 이것이 우리 民族의 誕生의 理想이 아니고 무엇이냐 … 그러하면 내가 압혜서(앞에서) 高唱絶叫한 우리의 民族的 理想은 결코 民族的 素質에는 可當치도 아니한 것을 空架虛設한 것이 아니라 天國에서부터 가져온 朝鮮 民族 固有의 理想이 久遠한 歲月로 더부러, 漸次로 民族的 意識에서 거의 살아지게 된 것을 다시 覺醒시김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民族의 자는 意識을 깨워서 高遠한 誕生의 本意 人類救濟 人文發達의 理想으로 돌아가라고 부르짖음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다.”(최현배, 「조선민족갱생의 도(39)」, 동아일보, 1926년 11월 7일)
 
「조선민족갱생의 도」는 최현배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동아일보에 1926년 9월 25일부터 12월 26일까지 65회 연재한 글이다. 아마도 일본 유학 때 구상한 것을 발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을 동광당서점에서 1930년에 발행한다. 그는 삼국유사 전문을 인용하면서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 우리민족의 이상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류를 구제하고 인문을 발달시키려고 하는 이상이라고 한다. 그는 홍익인간 사상을 보편적인 사고로써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최현배는 기독교의 창세기 신화가 천국에서 지상에서 추락한 데 비하여 우리 신화는 홍익인간을 통해 인류를 구제하려고 지상에 강림한 것이라고 한다.
 
“이 世界에 許多한 民族의 神話傳說을 보건대 그 民族의 始祖가 天國에서 地上으로 降臨하였다는 것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人類의 福利를 增進하며 세계의 文化를 發達시킴으로써 理想을 삼고 이 地上으로 降臨한 神話는 실로 우리 朝鮮民族만이 가진 것이로다. 耶蘇敎 創世記에서 人類의 始祖 ‘아담’과 ‘이브’가 天上樂園에서 罪를 짓고서 이 世上으로 墜落한 것이라 함에 대하야 우리 民族은 이 地上의 人類를 救濟할 理想을 가지고 이 地上에 降臨한 것이다. 이렇게도 高遠하며 이렇게도貴重한 理想을 天賦的으로 가지고 나온 우리 民族은 實로 人類界의 光榮이라 아니할 수 없도다”(1926년 11월 11일)
 
그는 태백산이 아시아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이 서양의 암흑세계에 빛을 준다고 한다.
 
“그러하면 어떤 이유로 그 탄강의 처를 태백이란 산으로 택정하엿나? 이는 다름이 아니다. 태백산이 아시아 대륙 동방에 용치하여 동으로 멀리 해양을 공하여 가장 먼저 여명의 서기를 영하면 가장 먼저 욱일의 채광을 수하여 이를 서방 암계에 투여하나니 이것이 정히 인문의 발달 인류의 복지 이상의 기를 서기영롱한 아시아 동방 백두산상에 고게 하고 차지에 내주한 것이다.”(동아일보, 1926년 11월 7일)
 
최현배는 우리말만 있었다고 하는 주시경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말과 글이 단군 때부터 있었고, 그것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고 한다. 
 
“우리 조선민족이 이 조선말을 하기 시작한 것도 결코 유사이후가 아니라 유사이전 즉 단군께서 단목 하에 강림하사 우리 역사의 첫 폐이지를 시작한 이전에 있었음이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외다. 곧 우리민족이 백두산을 가운데에 두고 남북으로 퍼져 살기를 시작한 그 때부터 우리말이 장구한 세월의 흐름을 따라 다소의 변천을 있었겠지요 마는 오늘 우리가 쓰는 이 우리말을 쓱 되었을 것이외다. 그러한 즉 우리 민족이 생긴 이후로 우리의 선조 기만억인이 다 이말 속에서 자라나서 이 말속에서 살다가 이 말을 그 다음대의 자손에게 전하시고 이 말 속에서 돌아갔습니다. 현금의 우리는 곧 이 말을 받아 이어서 이를 말하면서 살며 이를 말하여 뒤에 전하고자 역시 이 말 속에서 사는 사람이외다. 더욱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외다 우리 과거의 조선과 현재의 우리가 다 첫울음 소리를 질러 백두산하의 공기에 기운찬 음파를 일으킨 뒤로부터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이 말의 사랑 속에서 자라 났습니다.… 정음이전에도 우리 민족문화에 글자가 있어 북방에서는 단조에서 부여까지, 부여에서 고구려까지 고구려에서 백제 또는 발해까지 전한 통맥이 역력하며 남방에서는 신라에서 고려까지 전통이 분명함을 넉넉히 상견할 수 있음을 명언하여 둔다”(「우리말과 글에 대하여」, 동아일보, 1922년 8월 29일)
 
그렇지만 최현배는 우리의 상고문자와 한문의 관계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황제가 청구를 지나면서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사문을 받았는데 이 청구는 곧 조선이요, 황제는 지나 제국통일의 조이니 지나의 문자를 창작하였다는 창힐은 곧 황제 때의 신하이라(물론 이전에 복희씨가 서계를 지었다는 말도 있지요 마는) 그러면 금일 한문의 기원이 우리 조선의 상고문자와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사사에 의하건대 단군시대에 신지라는이가 서계를 맡아보는 청석을 동해빈에 캐었다 합니다. 이러한 기록으로서 보건대 단군시절에 이미 우리 민족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동아일보 1922년 8월 30일)
 
그는 우리말이 조선심과 조선혼이 되었고 세계적으로 발돋움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자부한다.
 
“우리말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사물의 총합체이다. 뫼는 높고 물은 맑고 햇빛은 밝은 아름다운 강산에 살아오는 우리 조선민족의 심령에는 조선말이란 영물이 그 갖은 소리와 맑은 가락(조자)으로써 거륵한 탄강의 대 정신을 전하며 아름다운 예술적 정취를 함양하여 왔으며 하고 있으며 또 영원히 하여 갈 것이다. 이 말의 울리는 곳에는 조선심이 울리며 이 말의 펴지는 곳에는 조선혼이 피어난다. 비록 그릇된 사상으로 인하여 일시적 그 권위를 훼상한 일이 있었지마는 그 본질적 미점 장처는 조금도 그 때문에 떨어진 일이 없으며 또 오늘날 조선민족의 시대적 자각으로 말미암아 장래에 그 옴쳤든 날개를 떨치고 세계적으로 웅비하려는 붕정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동아일보 1922년 8월 29일)
 
최현배의 󰡔조선민족갱생의 도󰡕가 일제에 의해 우량도서로 형무소의 조선인 죄수들에게 추천됐으며, 이는 조선인의 국민성에 문제가 있다고 해 민족패배주의를 조장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궁박했던 우리 민족이 궁박 상태에 빠지게 된 원인을 민족 내부에서 찾고, 이를 고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접근 방식으로서 일본제국주의 구조적 착취를 은폐하고, 지배이데올로기를 세뇌하는데 기여하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제에 의해 악용됐다는 것이다. (「일제치하 한글학자 외솔선생 비판논평…"명예훼손 아니다"」, 경향신문, 2014년 1월 6일) 그러나 최현배의 󰡔조선민족의 갱생의 도󰡕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 
 
앞부분에서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같은 사고에 입각하고 있지만, 뒷부분에서는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과 우리말을 가지고 인류의 보편적 이상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였고 그것을 통해 일제의 억압이라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것이 그가 일제시대에 변절하지 않고 살아남았던 이유이다.    
 
 
▲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조남호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법학연구단 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겸 국학연구원장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이황과 이이'(김영사 2014), 역서로는 '강설 황제내경1,2'(청홍 2011), 논문으로는 '주시경과 제자들의 단군에 대한 이해' , '선조의 주역과 참동계연구 그리고 동의보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