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스리스크. 두 곳은 무장한 항일투쟁부대의 주둔지였다.

“눈을 뜨셔요. 이제부터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갈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은 거기까지 태워다 드리는 일입니다.”

안창남 비행사가 말하였다. 아니마는 내 집단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간 곳은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야외의 풍경이 100년 이전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자동차를 단 한 대도 볼 수 없었다. 자동차 대신에 말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100년 전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러한 광경을 편안해 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대한국을 떠나 간 곳은 간도였네. 간도는 고종 6년 되는 해에 벌써 유민 10만 명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네. 이곳은 다른 고장과 달리 배일사상排日思想이 유달리 높은 고장이었지. 이 고장이 토지가 비옥하다는 것, 망명인으로 간주되는 이주자들이 모여든다는 것, 야소교가 많이 퍼져있다는 것 등의 이유로 굶주린 유민들이 모여들었네.” 
 
- 이들의 이주는 1905년 을사5조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한일 간에 체결되는 그해에 급격히 증가를 보였다. 당시에 만주 야소교 전문학교의 쿡 목사가  실상을 기록하여 남겼다. 그래서 이주민의 참상을 알 수 있었다.
 
- (쿡 목사의 기록) 겨울 날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흰 옷을 입은 말없는 군중은 혹 10여명, 혹 50명이 떼를 지어 산비탈을 기어 넘어 온다... 다수의 사람이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었다. 남루한 의복을 입은 여자들이 신체의 대부분을 노출한 채 유아를 업고 간다... 피차에 조금이라도 체온을 돕고자 함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다리는 남루한 옷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점점 얼어붙어 나중에는 조그만 발가락이 맞붙어 버린다.
 
“일본이 이 유민을 따라 간도로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네. 간도는 이미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어. 그러니 내가 발붙일 곳이 마땅치 않았어. 나는 간도의 여러 곳을 돌아보고 간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네. 내가 다음에 찾아간 곳이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였네. 블라디보스토크는 독립투쟁을 할 결심으로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네. 
 
- 블라디보스토크는 두만강 하구에서 동북방 쪽으로 150km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 고장은 해군기지이면서 국제항이었고, 외국의 기선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시베리아 종단철도가 끝나는 곳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이 독립투쟁가들을 모여들게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서북지방은 19세기말부터 한국인들이 집단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이 부락을 신한촌新韓村이라 하였다. 신한촌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앞에 두고 있어서 독립투쟁가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곳이 되었다. 신한촌은 러시아 공사를 지낸 이범진과 이종호와 같은 러시아 정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주축으로 러시아 행정당국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일본이 러시아에게 외교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한인들의 독립투쟁을 견제해 오고 있었고, 러시아가 혁명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어서, 정부 당국이 사회주의 혁명을 탄압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무장활동을 금하였다. 1907년경에 간도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해 온 이범윤李範允이 연해주로 망명해 왔다. 그는 망명 전에 한국 조정에서 간도에 파견했던 지방관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지방관리 생활을 하였다. 본국에서 고관대작들이 백성의 재산을 빼앗고 일본에 붙어서 권세 잡기에 여념이 없을 때, 그는 간도에서 고향을 버리고 몰려든 동족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다. 그는 1902년 6월에 북간도에서 동포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여 동포를 관리하였고, 1903년 7월에 정부로부터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범윤은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러시아가 일본에 지자, 그가 싸운 것은 허사가 되었고, 그가 관리하던 북간도는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일제는 북변간도관리사를 폐지하고 통감부임시간도출장소統監府臨時間島出張所를 설치했다. 그도 직제 개편에 따라 자동으로 해직되었다. 그는 일본의 마수를 피하여 연해주에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엥치우(煙秋)에서 그 고장의 부호 최재형이 세운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고 싶었으나, 재력과 그를 밀어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로 하였다.
 
“내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로 결심한 때가 이범윤이 앵치우에 있을 때였지. 나는 내가 세운 삼흥과 돈의 2학교에 사표를 내었네. 훌쩍 떠나고 싶었지만, 홀어머니와 세살배기 자식을 데리고, 또 게다가 임신 중인 처를 모른 채하고 떠날 수 없어서 어머니와 처에게 나의 결심을 밝혔지.
 
“어머니, 저는 연해주로 가렵니다. 장자로서 집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어머니에게 불효막심하나,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이대로 앉아서 망해가는 나라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용서를 빕니다.”
 
어머니는 나의 충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네. 나의 내자도 시어머니의 뜻에 따랐네.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오게 될지 기약이 없소. 아마 나라가 독립을 해야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소.”
 
나는 처의 손을 잡아 주었네. 내가 고향을 떠나려는 것은 의병이 되려는 것이었으므로 내가 고향에 다시 온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어. 나는 정근과 공근 2아우에게도 당부했네.
 
“너희들이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렸으면 한다. 형수에게도 소홀함이 없었으면 한다.”
 
나는 집을 떠났네. 
 
내가 먼저 가게 된 곳이 엥치우였지. 내가 엥치우에 도착하여 보니,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 동포들의 집이 고국에서 보던 그런 집이었고, 동포들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였네. 나는 엥치우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을 찾아가기로 하였네. 그런 사람이라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도 크고 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세. 나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우선 한인학교를 찾아갔네. 내가 한인학교에서 알아낸 것이 이범윤이라는 사람이 망명하여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는 것이었네. 그의 전력을 듣고 보니, 의병을 할 만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나는 즉시 엥치우를 떠나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네.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선임船賃이 1원 50전이었어. 내가 가보니, 불라디보스토크에 5천 명 가까운 수의 한인이 살고 있었네. 학교와 청년회도 있었네. 거기가 바로 신한촌일세.(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