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궁궐,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문을 열다."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궁궐이 아닐까 싶다. 도심 가운데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궁궐은 한국 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찾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고 오늘은 사는 한국인들의 쉼터이자 문화 탐방 장소가 되어 온 지 오래다. 우리 문화에서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 그래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한 조선의 궁궐, 그 궁궐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조선의 궁궐이라면 유학이 국시였던 당대의 조선사회를 생각해 보면 지극히 중국의 건축양식 혹은 유학풍으로 건립되었을 것을 추측할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절반은 맞는 말이지만 절반은 아니다. 왜냐하면 5대궁 중 경복궁을 제외하고는 중국식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경복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적인 미를 많이 갖고 있다.

▲ 민성욱 박사
궁궐은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의 우리에게는 바라보며 구경하는 것 외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궁궐들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와 함께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당대 가장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고 있음은 당연하다.
이러한 궁궐은 얕은 사고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지배적인 사상들이 그 공간 안에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궁궐을 보면 그 당시의 역사, 건축과 함께 옛 선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돌 하나 집 한 칸 어느 하나도 그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고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시대 궁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복궁일 것이다. 조선시대 궁궐 중 법궁(法宮) 혹은 정궁이 경복궁이었다면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은 이궁(離宮)에 해당된다.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은 북악산 응봉의 산자락에 경복궁의 이궁인 창덕궁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조선 궁궐은 양궐 체제를 갖추었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 불리었다. 이렇게 태종이 법궁인 경복궁을 놔두고 또 다른 궁궐을 건립한 것은 경복궁의 형세가 안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잡은 태종이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이 왕이 국정운영에 편리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전각을 배치했다면 창덕궁은 태종, 즉 왕의 의도에 따라 설계해서 왕이 쉴 수 있는 후원을 아주 넓게 만들었다. 왕권이 가장 강했던 세조도 후원을 두 배 넓게 확장했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주로 머물렀다.
 

이렇듯 창덕궁이 세움으로써 조선은 정궁과 이궁의 양궐 체제가 되는데 정궁은 주로 왕이 기거하면서 나랏일을 보는 궁궐이고, 이궁은 정궁에 화재가 나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 사용하였던 별궁(別宮)이었다.
여기서 궁궐의 의미는 무엇인가? 궁(宮)은 주거공간이요, 궐(闕)은 사무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의미로는 궐은 외성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의미하고 궁은 그 안의 전각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였다.
궁궐의 종류는 정궁, 이궁(별궁), 행궁이 있고, 궁궐의 구조는 외전과 내전 그리고 후원이 있으며, 궁궐의 수호신은 잡상과 사방신 등이 있었다. 궁궐의 아름다움은 단청에 있으며, 왕의 상징으로는 일월오봉도가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도성 안의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정궁인 경복궁을 복원해야 하지만, 광해군은 경복궁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궁인 창덕궁을 먼저 복원하였고 이 창덕궁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정궁이 된다. 현재 조선 궁궐 중 가장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의 가치를 가진 창덕궁이 세계유산으로 유일하게 등재되어 있다.
 

경복궁은 중국의 법도에 따라 지어서 평평한 땅에 모든 전각들이 좌우대칭 구조에 일직선으로 배치되었다. 반면에 창덕궁은 자연을 변형하지 않고 산자락을 따라 그 안에 건물을 지어 조형미를 갖춘,  지극히 한국적인 미를 강조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선조는 머물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임시 거처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로써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이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었다가 상왕인 고종황제의 덕과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얻게 된다. 어떻게 보면 덕수궁은 그 궁호가 한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켜 경운궁에 머물게 하면서 그 궁호를 그들 마음대로 바꾼 것이다. 이제 궁궐만 복원할 것이 아니라 궁궐의 이름도 복원해야 진정한 복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대규모 도성 재건을 최대 국정과제로 삼고 추진한다. 그 과정에서 창덕궁, 창경궁 등 주요 궁궐을 중건하게 되나 창덕궁으로 들어가기를 꺼려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을 새로 건립한다. 하지만 모 술사가 지금의 경희궁 터를 가리키며 왕기가 흐른다고 하자 인경궁 건립을 포기하고 정안군의 사가에 궁궐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경희궁이다. 경희궁은 숙종이 태어나고 승하하셨던 곳이기도 하고, 영조가 승하하신 장소이며, 정조, 헌종 등이 즉위한 곳이었다.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처음에는 경덕궁으로 불리다가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즉 원종의 시호가 경덕이라 같은 발음을 피하기 위하여 경희궁으로 개칭한 것이다. 당시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로 법궁이었고, 경희궁은 서궐로 이궁이 되어 양궐 체제를 계속 유지하였다.
 

그리고 퇴위되어 덕수궁에 머물렀던 고종황제는 1919년에 붕어하셨고, 1926년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붕어하면서 왕의 운명과 함께 창덕궁의 역사는 마감하게 되면서 조선 궁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국력이 약화되어 국권을 빼앗기게 되면 그 궁궐 또한 온전할 수가 없었다. 그 대표적인 궁궐이 경희궁이다. 이러한 경희궁의 비극은 경복궁 중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경복궁 중건 시 부족한 자재를 경희궁에서 가져 왔고 남은 것은 대일항쟁기 때 일제 관료의 자녀가 다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각종 전각들이 헐리고 팔려 나갔다. 정전이었던 숭정전은 일본 사찰에 팔려 나갔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남아있다. 숭유억불이 국시였던 조선시대, 그 조선이 기울어지자 경희궁의 정전이 불당이 되고 말았다. 또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이토히로부미(伊방문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이 되기도 하였고, 광복이후에는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다시 복원되어 있지만 원래 세워진 위치와는 사뭇 다르다. 현재 구세군회관 자리가 원래 흥화문의 위치였고, 구세군회관 맞은편에 금천과 금천교가 복원되어 있는데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자리와 그 일대가 경희궁 터였다. 
 
창경궁은 주로 왕후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왕이 정사를 돌보던 공간은 아니었고 내전 생활공간이었다. 이러한 창경궁도 모진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1909년에 많은 전각들이 헐리면서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섰고, 벚나무도 대거 심어 공원이 버렸다. 한 나라의 궁궐이 그저 눈요기거리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 그 이름도 격하되어 창경원으로 불리다가 1984년이 되어서야 원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4대문과 5대궁이 있었는데, 방위에 따라 문이 존재했었고 그 문은 단순히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리는 출입문만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5대궁의 정문을 보면, 경복궁은 광화문, 창덕궁은 돈화문, 창경궁은 홍화문, 경희궁은 흥화문, 덕수궁은 대한문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인화문이었다가 동문인 대안문으로 대체된 후 대한문으로 개칭하게 된다. 덕수궁(경운궁) 동문 앞에 큰 도로와 환구단도 생김에 따라 자연스레 동문이 정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5대궁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문의 글자 중 가운데 글자에 화(化)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화는 교화의 의미도 있지만 다른 의미도 있었다. 왕을 북극성에 비유하여 항상 움직이지 않고 북쪽하늘을 가리키며 가장 밝게 빛나는 존재를 왕으로 여겼다. 그래서 왕이 기거하는 정궁인 경복궁을 북궐이라고 불렀고, 왕이 바라보는 남쪽에 정문이 있기 마련이었다. 남쪽은 오행 상 불(火)이다. 그래서 광화문(光火門)이 되어야 하지만 조선시대 건물은 모두 목재이기 때문에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어 불화(火)대신에 교화(化)로 대체하여 광화문(光化門)이 된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교화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궁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니고 왕과 대신들이므로 백성들을 교화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의미는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왕부터 교화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왕이 교화대상이었다면 그 신하인 대신들은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백성들을 하찮은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천심은 곧 민심이라는 것을 알고 궁궐의 정문을 드나들면서 항상 스스로 교화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사회는 강력한 유교사회였지만 백성들의 교화를 위하여 기꺼이 그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다른 민족과 차별화되는 우리 궁궐이야기가 담고 있는 문화적 특성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외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의미를 알고자 할 때 역사적 통찰력이 생길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통찰력을 통해 우리 국학의 정신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