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두봉(金枓奉, 1889∼1961?)(사진=대종교)

김두봉(1898-1961?)은 경상남도 기장 출신으로, 한글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주시경의 제자로, 조선어학원에서 한글을 배웠고 주시경을 이어서 한글문법과 사전에 천착하여 <조선말본>, <깁더조선말본>을 펴냈다. 그러면서 그는 나철의 제자이기도 했다. 나철이 1916년 구월산에서 폐관(자결)할 때,  그를 모시던 6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두봉은 나중에 공산주의자가 되기는 하지만,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김두봉의 대종교에 대한 언급은 두 개가 눈에 띈다. 하나는 김교헌을 추모하는 글이다. 김교헌은 나철에 이어서 2세 종사로서 대종교를 이끌다가 1923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추도식이 상해 서도본사에서 1924년 1월 13일에 열렸다. 김두봉은 “나는 이 어른과 십여 년을 같이 있었는데 나의 본 것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공부와 발견이 제일 많다. 그럼으로 광문회에서 고고(考古)의 책을 많이 발행하였으나 거기에서도 이 어른의 공이 많으며 또 오늘의 우리가 이만치라도 역사에 대한 생각을 가진 것은 모두 이 어른의 공이라 할지니 그 공의 큰 것은 중국의 사마천이가 세운 공보다 더욱 큰 것이다.”(<동아일보>, 1924. 1. 23)라고 하여, 김교헌의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와 공헌을 사마천이 중국사에 끼친 영향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고, 자신이 김교헌의 영향 하에 민족사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음을 인정한다. 
 
다른 하나는 상해에서 개천절 행사를 기념하여 1921년 음력 10월 3일 양력 11월 11일에 독립신문에 발표한 「개천절력」이란 글이다. 여기서 독립신문은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를 말한다. 
 
김두봉은 이 글에서 단군의 건군을 기념하는 날이 단군시대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개천절을 명칭, 의식, 날짜 별로 분석을 한다. 먼저 명칭에 대해서 살펴보자.
 
“名稱으로 말하면 三韓의 天君祭라뎐지, 夫餘의 迎鼓會, 穢의 舞天會, 箕氏의 報本祭, 高句麗의 東(盟)會, 新羅의 太日山祠, 百濟의 四仲祭, 渤海의 檀戒祝, 遼의 君樹祭, 金의 長白山冊, 高麗의 三聖詞祭, 朝鮮의 崇靈殿祭 等이 異名同體의 紀念이올시다.” 
 
김두봉은 삼한의 천군제, 부여의 영고회, 예의 무천회, 기자의 보본제, 고구려의 동맹, 신라의 태일산사, 백제의 사중제, 발해의 단계축, 요의 군수제, 금의 장백산책, 고려의 삼성사제, 조선의 숭령전제가 모두 단군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였다고 한다. 요와 금의 행사까지도 단군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의식에 대한 분석이다. 
 
“儀式으로 말하면, 三韓, 夫餘, 穢, 高句麗 等 모든 나라에서는 全國의 共同擧行으로 三韓은 代表者를 選出하여 國邑에 祭하고, 그 남아 세 나라는 民衆이 會集頒祝하엿으며, 箕氏, 新羅, 渤海, 遼, 金, 高麗, 朝鮮 等 모든 나라는 國君이 親祭하거나 或 降香代祭하엿슴니다.” 
 
절차로 말하면 삼한 부여 예 고구려는 전국적인 행사인데, 삼한은 대표자를 선출하여 제사하였고, 부여, 예, 고구려는 민중이 모여서, 기자 신라 발해 요 금 고려 조선은 임금이 직접 제사를 드리거나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날짜에 대한 고찰이다. 
 
“月日로 말하면, 三韓, 穢, 高句麗, 遼 等 모든 나라는 十月로 하였고, 百濟는 四仲祭로, 高麗, 朝鮮은 春秋로 하였고, 그나마 몇 나라는 어느 달에 하였는지 아직 잘 알 수 (업스)없으나, 歷代에 十月로 함이 가장 많이 들어난 事實이요, 또 우리나라 最近까지 傳來하는 風俗을 보면, 全國이 共通하여 十月달이라 하야, 이달에 初一日이나 或 初三日에 三神祭, 帝釋祭 等 여러 名目으로 紀念하는데, 그 由來를 考察하면 三神은 桓因桓雄桓險(卽檀君)이오 帝釋은 三神을 佛家에서 부르는 別稱인즉, 其實은 다 檀君을 紀念함인데, 옛적에는 國祖敎祖라 하여 紀念하던 國慶日이 近世에 와서는 한 귀신 섬기는 淫祀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달로는 삼한 예 고구려 요 등의 나라는 10월로 하였지만, 백제는 사중제, 고려 조선은 봄가을로 하였다고 한다. 그중에서 10월이 공통적인 달이라고 한다. 일로는 1일과 3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날은 삼신제, 제석제라고 하는데, 모두 단군을 기념하는 날이 근세에는 귀신섬기는 날로 변했다고 한다. 
 
“十月一日과 三日中 何日이 的確한 日인가? 저 생각에는 一日보다 三日이 그날인 듯합니다. 初一은 어느 달에든지 月日로 定하는 일이 있으나, 初三日은 特히 三月 말고는 紀念할 날이 아니면 祭 지내는 일이 없음이요, 또 十月을 開月이라 하여 開天한 月인 意를 包含하였다 함을 저가 某書籍에셔 본 일이 있습니다. 「열」이란 名稱이 數를 셀적에 손가락을 다 펌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으로 믿는데, 이것이 이에 偶合함인지 或 後人이 付會함인지 알 수 없으나, 「十」의 「開」의 뜻이 있다 하면 「三」 의 訓에도 或 開의 뜻이 (업)없는가 함이올시다. 卽 「날이 샌다」 는 「새」는 確實히 「開」의 뜻이 있는뎨 「三」의 訓이 「세」인즉 「새」의 소리는 「세」에 소리와 가깝지 않은가 함이올시다. 이것이 確實한 證據는 못 되들래도 이날을 紀元慶節日로 定함은 無妨할 줄로 압니다. 國家의 紀念日을 둘 必要가 없다면 모르겠지오. 만들 必要가 있다면 一年中 아무달 아무날이라 定하여 共同紀念만 하였으면 그 目的은 이룬 줄로 압니다. 그런데 이十月三日은 철수로 말하더래도 여러 가지 穀粟과 果實을 다 거둔 뒤에 經濟狀態가 一年中 第一 좋은 때라 一般國民이 比較的 心理도 편안한 때요 또 日氣도 그리 춥지 아니하여 生氣나기 좋을 만한 때인즉 歷代로 이 十月三日을 國慶日로 지낸 일이 없었다 해도 우리가 이날을 定하는 것이 無妨하겠는데 하물며 歷史에 그만한 證據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曆學上으로 陰曆日字는 해마다 그 差異가 甚함으로 이것은 陽曆으로 據算改定할 必要가 있습니다. 이에 關한 말씀은 다음 다른 機會를 기다림니라.”
 
개천절을 시월일일과 시월삼일을 중에서 시월삼일은 특별히 정해진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월삼일을 개천절로 정한 것이라고 추론한다. 개천절로 하는 이유에 대해서 김두봉은 한글학자답게 십은 손가락을 모두 연다는 뜻이 있고, 삼은 세 혹은 새로, 마찬가지로 연다는 뜻이라고 한다. 새로 여는 날이라는 뜻이다. 10월 3일 정도가 되면 추수가 된 이후라 경제상황이 안정되어 심리도 편안하고 날씨도 춥지 않고 기운이 날 좋은 때라고 한다. 그렇지만 김두봉은 이 날이 음력이기 때문에 날짜가 고정되지 않아서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현재 양력으로 개천절을 10월 3일로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상의 짤막한 글이지만, 김두봉의 개천절에 대한 분석은 남다른 점이 보인다. 단순히 시월삼일이 아니라 명칭, 의식, 월일을 분석하고 거기다 새로 여는 날이라고 하는 한글의 의미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공산주의 활동과는 별개로 그의 단군과 국학에 대한 인식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조남호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법학연구단 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겸 국학연구원장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이황과 이이'(김영사 2014), 역서로는 '강설 황제내경1,2'(청홍 2011), 논문으로는 '주시경과 제자들의 단군에 대한 이해' , '선조의 주역과 참동계연구 그리고 동의보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