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녀산성 안내 지도. 빨간 색으로 표시된 부분들이 우리가 갔던 장소이다.

오녀산성에 올라 기운을 느껴보니 ‘오녀산성이 정말 수도였을까?’는 의문이 들었다. 기존 연구들이 오녀산성을 고구려 초기 수도라고 하였기에 ‘수도였나 보다’라고 생각하였지만, 직접 올라와서 느껴보니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제천을 하던 ‘소도蘇塗’의 느낌이 강했다. 전쟁이 났을 때는 천연암벽과 낭떠러지를 끼고 있는 지형상의 이점을 활용한 ‘전시성戰時城’이었을 수도 있다. 아마 단군조선 선도정신이 많이 남아있었을 건국 초기에는 소도였다가, 시간이 흐르며 개개인의 선도 정신과 수행이 약해지고, 전쟁이 잦아지면서 소도보다는 전시성의 역할이 더 커진 것이 아닐까?

▲ 오녀산성 정상부에 남아있는 고구려 시대 '치'. '치雉'는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찰하고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오녀산성 정상에는 산꼭대기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평탄한 지형이 제법 많았다. 고구려의 축성 방식이 잘 드러난 ‘치’를 비롯한 돌로 만들어진 성벽과 건물이 있었던 장소가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우리 답사팀의 관심을 끌었던 곳은 ‘천지天池’라는 이름의 연못이었다.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마르지 않았기에 성내 사람들의 식수공급원이었다는 이 연못은 ‘천지天池’라는 이름도 범상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태백산 제천단과 용정龍井, 마니산 제천단과 천제암궁지에서 볼 수 있듯 한국선도에서는 제천단이 있으면 그 아래 제천을 준비하는 장소와 신성한 우물지가 항상 같이 있기에, 오녀산성에서 제천의례가 있었다면 천지 연못이 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빨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 경악스럽기 그지 없는 '천지天地'연못의 모습. 잠시라도 머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기스러웠다.

그런데, 직접 본 ‘천지’는 실망을 넘어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 털이 모두 곤두 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연못의 가운데 다리를 놓고 중국 도교에서 신으로 받들어지는 조잡한 황금색의 ‘관우’의 상이 있었으며 온 사방은 붉은색의 도교식式 복을 비는 끈을 감아 놓았다. ‘신령’한 모습은커녕 괴기스럽기까지 하여 이 모습을 본 순간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다리 건너편 가판대에서 물건을 파는 언니는 이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일행에게 오른쪽에 있는 나무판자로 된 임시 건물에서 더 큰 복을 빌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호객행위를 하였다. 그 언니를 남겨두고 어서 자리를 떠났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를 훌쩍 넘겼다. 오늘 머물 곳은 집안. 환인에 집안으로 가는 길은 산과 강을 끼고 가는 길이었기에 도로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기에 조금이라도 환할 때 움직여야 한다. 가이드 김선생님은 일행들을 재촉하였다.

▲ 오녀산성 내 가장 큰 건물이 있었다는 곳. 가로 13미터, 세로 6미터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서둘러 내려가던 중 ‘왕궁지王宮址’라고 쓰여 있었던 건물터를 지나게 되었다. 게시판에는 이곳은 오녀산성 안에서 가장 큰 건물터로 왕궁으로 추정이 된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가로 15m미터, 세로 6m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터가 왕궁이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건물터를 가만히 보는데 적봉시 우하량에서 발굴된 홍산문화시기의 신궁터가 생각이 나는 건 왜였을까. 혹시 이곳은 왕궁이 아니라 신궁이 아니었을까? 건물이 자리한 위치도 천지 연못과 가깝고 정상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주거지터와 떨어져 있다. 무엇보다도 기운이 다르다. 시간이 존재했고, 그 시간의 흐름을 겪은 공간이 있다. 그래서 공간에는 그동안 흘러온 지난 시간의 에너지가 마치 오래된 벽지의 손때처럼 남아있다. 그것이 감각을 열고 조금만 집중하면 시간을 뛰어 넘어 공간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이유이다.

그 에너지를 느껴보기로 했다. 일행의 대부분이 산을 내려가고 있었지만, 뒤에 남은 몇몇이 건물터와 통행로를 구별하기 위하여 쳐놓은 선을 넘어 과감하게 건물터로 들어갔다. 참 신기한 것이 이 건물지에 발을 들이는 순간 마치 외부세계와 차단이 된 듯 고요하고 성스러운 느낌이 감돌며 머리 전체로 폭포수 같은 기운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마, 이 자리는 왕궁이 아니라 신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길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졌다. 오녀산성에서 내려온 우리는 집안으로 간다.

▲ 길을 묻는 우리 일행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환인과 집안 사이 마을의 주민들.

환인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은 2시간 남짓. 지도를 볼 때는 가까워 보였기에 금방 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두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없어서 시골 마을과 계곡을 따라가는 산길로 이동해야했기에 도로사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산길을 따라 마을이 드문드문 보였다. 시골마을이라 그럴까? 마을을 지날 때마다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눈동자가 온통 우리 버스를 따라 움직인다. 참 순박한 눈동자들이다.

계속 산길을 달리던 버스의 차창 밖 풍경이 어느덧 찾아온 어둠과 함께 강으로 바뀌었다. 아, 압록강이구나. 달빛 아래 은은하게 흐르고 있는 압록강. 그렇다면 저 건너편 불빛은 북한의 마을일 것이다. 압록강, 압록강.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되뇌어 보았다.‘압록강’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벅차오른다. 빨리 저 모습을 보고 싶은데.. 왜 이렇게 해가 빨리 졌을까 내심 아쉽다. 내일 아침이면 환하게 볼 수 있겠지. 급한 마음을 달래 본다.

집안은 압록강이 보이고도 한참이다. 긴 이동시간에 다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가이드 김선생님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한 때가 30분 전인데 끝이 보이질 않는다. 압록강 바로 옆의 도로인데다 왕복 2차선의 좁은 곳이라 그런지 버스는 더욱 속력을 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뱃속에서 꼬르륵거릴수록 마음을 점점 비우고 언젠가 도착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중국에서 ‘조금만’은 30분을 넘는 시간이라고 한다. 아… 살고 있는 땅의 크기가 시간에 대한 체감도 다르게 만드는 듯하다.

▲ 집안의 어느 음식점 간판. 한글과 한복을 입은 여인의 사진이 있다.

저녁 8시 10분. 환인을 출발한 지 3시간 20분 만에 집안에 도착하였다. ‘집안’이라는 도시 이름은 우리말로 ‘집의 안’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듯, 집안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어두워서 전부를 볼 수 없었지만, 도시 곳곳에서 한글로 된 간판과 한복 입은 여자가 그려진 광고를 쉽게 볼 수 있었다.

▲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일까? 집안의 간판들에는 한글이 병기되어 있다. 하지만, 한글이 있다고 주인이나 판매원들이 다 한국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중수교 후 개방 초기의 집안은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도 낡은 호텔 하나 밖에 없을 정도로 시골도시였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 유적 밀집지대로 알려지면서 한국 사람들의 관광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관광업의 성장과 함께 집안시의 경제규모도 커졌다고. 혹자는 한국 사람들이 집안에 돈을 퍼부어줬다는 표현도 서슴없이 할 정도이다. 지금도 집안 관광객의 90%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저녁 식사 후 호텔에 짐을 풀고 창밖을 내다보니 국내성 성벽이 보인다. 국내성 성벽은 집안시의 빠른 경제성장의 증거로 화려한 네온사인 빛을 뿜어 대는 호텔들과 아파트 사이에서 홀로 고고히 서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일행 중 과일을 사러 시장을 간다는 몇몇이 있어 얼른 따라 나섰다.

▲ 시장 좌판에서 과일을 사고 있는 답사팀 일행들. 품종은 달라보였지만, 판매하는 품목들은 포도, 복숭아, 참외, 대추 등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숙소에서 시장은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문을 연 곳은 한두 군데 밖에 없었다. 포도와 복숭아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과일이 있었지만, 처음 보거나 모양이 좀 많이 다른 과일들도 있어 신기하였다. 과일 가게 주인 부부는 늦은 시간 찾아온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우리에게 이것저것 시식을 권한 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과일을 맛볼 수 있었다. 똑같은 포도도 어느 땅에서 자랐는지에 따라 이렇게 맛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먹어본 포도와 복숭아의 맛은...‘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맛이었다.

▲ 초라하게 서 있는 국내성 성벽. 높이도 성인 남성의 허리춤 밖에 안되어 보였다.

과일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드디어 국내성성벽을 보았다.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 그립고 반가웠다. 가까이서 본 국내성 성벽은 더욱 안쓰러웠다. 400년이 넘도록 고구려의 수도로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했을 국내성의 성벽은 이제 성인 남성 어깨춤밖에 오지 않을 낮은 높이의 담벼락만이 남아 애처롭게 서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져서 가로등도 없이 달빛이 비친 그 담벼락을 오래오래 보고 있었다.

 

 

 ✔ 천손문화연구회 2015 중국 동북3성 선도문화탐방 그 일곱번째 ::  
 [7편]  압록강, 환도산성, 산성하고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