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미래가 궁금할 때 누구나 무교인(무속인)을 찾아가 점을 보기도 하고 조언을 구한다. 이러한 무교인의 점술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고난을 극복하는 지혜를 갖게도 한다. 그러나 무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편하지 않다. 미신, 사람을 현혹한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무속신앙 등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 지난 12월 8일 국학원 제149회 국민강좌에서 조성제 무천문화연구소장은 '상고사 속 무속이야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전 세계에 자기나라의 샤먼을 이렇게 매도하고 무시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몽골, 태국, 캄보디아, 일본, 중국에 가서 무당을 만나보면 굉장히 당당하다. 존중받고 존경을 받는다. 우리 무당들은 무당이 된 것 자체가 죄인으로 취급받는다.”

지난 8일 사단법인 국학원이 개최한 제149회 국민강좌에 초청받은 무천문화연구소 조성제 소장은 우리 무교문화가 낮게 평가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우리 무교가 일제에 의해 무속신앙이라는 말로 폄하되고 저속한 문화로 인식이 된 것을 매우 안타깝다는 조 소장은 “무속이라는 표현보다 무교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폈다.

이날 조 소장은 우리 역사기록에 나타난 각 시대별 무교의 모습과 역할, 위상을 조명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원형성이 살아있는 황해도 굿을 통해 무교 속에 나타난 상고사의 흔적을 강연했다. 그는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굿이 있는데 황해도 굿만큼 우리 역사와 부합되고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간직한 굿이 없다.”고 강조했다.

조 소장은 우리 전통 굿거리 속에 담겨 있는 놀라운 발견들을 발표했다.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교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천의례에서 비롯되었다. 『태백일사』「삼한관경 본기」에 “한웅천왕이 제사를 지내러 갈 때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고 했다.

무교의 굿은 한웅천왕의 제천의례에서 비롯되었다

우리의 제천의식에 대해 예의 무천舞天, 부여 영고迎鼓, 고구려 동맹東盟이라 배웠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서는 무천, 영고, 동맹이 모두 고조선의 제천의식이라 했다. 무천은 하늘을 우러르며 춤을 추는 것, 영고는 북을 치며 하늘을 맞이하는 것, 동맹은 동쪽을 향해 맹세한다는 것이다.

무당이 되서 처음으로 하는 굿을 ‘일월성신굿’라 하는데 그 속에는 영고, 동맹, 무천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전물상을 차려놓고 장구와 징을 치면서 무당이 물동이 위에 올라서서 춤을 춘다.

여자 무당을 가리키는 무巫는 병을 치료하는 의사, 조선시대 동서활인원에서 활약

남자 무당은 ‘격覡 또는 축祝’, 여자 무당은 ‘무巫’라 했다. 남자 무당인 축이 하는 일은 제사를 주관하고 축문祝文을 읽는 것이다. 오늘날 유교식 제사에서도 남자가 제사상을 준비하고 축문을 읽는 것은 여기서 유래했다.

또한 『희남자』<설산훈>에는 무녀가 바로 의사라고 되어 있다. 지금도 병원, 의사라는 뜻의 ‘의(醫)’에는 무당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국립의료기관격인 동서활인원에는 무녀들이 배치되어 한의사와 함께 환자를 돌보았다. 또한 동서활인원의 운영비는 거의 무녀가 납부하는 무세巫稅로 충당되었다.

신라는 법흥왕 때 비로소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고구려, 백제보다 155년이 늦었다. 그만큼 오랫동안 전통적인 무풍巫風이 강했다. 신라 방언에 무당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하는데, 웅雄은 신시 한웅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초기 왕의 호칭이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이라 한 것은 정치적 군장보다 제사장의 개념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과 천관녀 모두 무교와 연관돼

신라 김유신에 관한 민간설화에 어머니 만명(萬明)부인의 엄중한 당부로 기생 천관녀(天官女)와의 관계를 끊으려 천관녀의 집을 찾아간 백마의 목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만명이란 명칭이 예사롭지 않다. 무당임에도 무당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을 만명 또는 말명신이라고 한다.

조 소장은 “만명부인도 역시 무당이었고, 천관녀라는 이름도 기생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지내는 무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이미 불교 중심 사회로 변모했으므로 출세하기위해 무교를 버린 것을 상징한다”고 추정했다.

▲ 우리 민족의 원형성이 살아있는 황해도 굿 중 도산만명거리를 설명하는 조성제 소장

황해도 굿 ‘도산만명거리’에 나타난 도산에서 고조선 중심의 UN총회가 열렸다

온갖 재담과 유머가 담긴 황해도 굿 ‘도산만명거리(또는 도산말명거리)는 주목할 만하다. 도산塗山은 지금 중국 안휘성 회원현 당도산을 말한다고 한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왕검이 부루태자를 파견하여 순임금에게 9년 홍수를 다스릴 오행치수법을 전했다고 하는 곳이다. 이 도산에서 열린 도산회의는 지금으로 보면 ‘유엔총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아흔 아홉 서방’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고조선을 모시는 제후국의 대표자를 상징한다. 또한 당시 화백회의가 만장일치제였으므로 완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 99로 표현될 수도 있다. 황해도 무당들이 사용하는 대신방울 역시 방울이 아흔 아홉 개가 달려있어 ‘아흔아홉상쇠방울’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황해도의 천신대감 굿과 군웅거리는 14대 한웅인 치우천왕을 나타내고, 천수거리는 한민족의 창세기를 다룬 『부도지』에 기록된 마고어머니가 인간의 욕심으로 오염된 마고성을 씻어내던 천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고려 중기부터 무교의 위상 본격적 인 약화 그러나 왕실과 관청에서 공식활동도 했다

▲ 조성제 소장는 우리 역사와 정체성이 살아있는 무교문화의 가치를 조명했다.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국가의 중대사에 무교의 역할은 컸다. 고려에서는 상류집안의 여자가 신이 내리면 ‘선관仙官’이라 하여 고려 왕실 주요 제례 인 팔관회를 주관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무풍을 음사陰祀로 규정하고 무당을 도성에서 내쫒기도 했다. 또한 이때부터 무녀들은 조세의무를 졌는데, 조선 세종 때 기록에 의하면 무녀들이 정승과 맞먹는 과중한 조세를 부담했다. 평안도, 황해도 무당들의 무세巫稅로 북방을 경계하는 국방비에 충당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와 함께 무속도 탄압하여 무당은 광대와 더불어 8천민의 하나가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무녀를 탄압하고 배척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믿고 의지했으며, 팔도에 국무성수청, 소격서, 각 관아의 부군당, 왕실의 산실청, 사신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사신당 등 왕실과 관청에서 공식적인 활동을 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무교가 본격적으로 배척받게 된 것은 일본강점기부터였다. 당시 마을 굿은 농사나 일상에서 사소한 감정으로 다투었던 이웃간의 갈등들을 풀어내던 해원상생의 장이었다. 일제는 굿판에 참여한 마을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뭉치면 반일감정으로 발전될까 싶어서 늘 굿을 통제하고 미신이나 무속신앙으로 폄하했다.

조성제 소장은 강연을 마치며 “민족의 정체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때 가장 먼저 탄압받던 것이 무교였다. 굿이 가지고 있는 민족 정체성과 우리 역사의 흔적을 소중히 해야 한다”며 무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