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인시에서 8km 떨어진 오녀산성으로 가는 길. 오녀산성이 점점 더 또렷하고 가깝게 보인다.

오녀산성은 환인 시내에서 8km정도 떨어진 해발 800m의 오녀산에 천연성벽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축성되어 있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첫 번째로 도읍을 삼은 ‘졸본성’ 또는 ‘홀승골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오녀산성’이라는 이름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왠지 우리민족의 정기를 꺾는 것 같달까. ‘오녀산’이라는 이름 전설 속에 다섯 명의 선녀가 흑룡과 싸우다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 하는데 다섯명의 선녀는 한민족과 관련된 설화에는 나오지 않는 여인들로, 아마 고구려 이후 만주가 한족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궁금한 것은 지명은 그 땅의 유래를 담고 있는 것이기에 잘 바뀌지 않는 특징이 있는데,  언제, 왜 바뀐 것일까? 여러 가지 궁금증을 안고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오녀산성은 매표소를 지나 박물관으로 들어가, 관람한 후 2층으로 나가면 대기하고 있는 셔틀버스를 타고 20분 산위로 올라간다. 산위의 셔틀버스 승차장에서 내리면 다시 30~40분 정도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30~40분 정도 쉬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내려오다 다리 풀리는 거 아닐까 싶은 마음에 다소 긴장되었다. 

▲ 고생간이 아니라 위생간. 공중화장실이다. 얼핏보면 한글 '고'자와 같아 보인다.

중국에서 박물관을 들어가는 것 참 불쾌한 경험이다. 들어갈 때 소지품을 일일이 엑스레이 검사를 할 뿐 아니라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라고 하면 감시역이 따라 다니며 지켜본다. 그리고 사진도 전혀 찍을 수 없도록 제지를 하니 꼭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 같다. 오녀산성 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엇이 무섭길래 당당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금지하고, 감시하는 것일까? 
  

▲ 오녀산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갑옷유물. 옛 조상들은 이런 갑옷에 황칠을 발라 황금색으로 도색을 하였다. 햇빛에 반사된 갑옷은 번쩍번쩍 빛을 내며 적군에게는 두려움을 주었고 아군에게는 장군의 위엄을 드높였다.

오녀산성 박물관은 전시물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녀산성에서 발굴된 유물이라며 석기, 철제갑옷, 무기, 토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딱 짚어 이것이 대표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초기 고구려 수도인 만큼 그 상징성을 살려 박물관을 꾸미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2층에는 ‘미창구 장군묘米倉溝將軍墓’의 1:1 재현모형이 있었다. ‘미창구 장군묘’는 환인현 미창구촌에 위치하고 있어 ‘미창구 장군묘’라고 불린다. 처음에는 왜 오녀산성 박물관에 미창구 장군묘의 재현모형이 있을까 의아하였지만 미창구 장군묘가 동명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으니 고구려 초기 수도인 오녀산성과 접점이 보였다. 

▲ 오녀산성 박물관 문에는 '미창구 장군묘' 벽화에 그려져 있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미창구 장군묘는 발견 당시 이미 모두 도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물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연꽃이 가득 그려진 벽화가 남아있어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 연꽃무늬를 두고 학자들은 ‘추정컨대 석가여래의 가호를 받는 왕권임을 나타내어 왕실의 신성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에 창시된 불교보다 훨씬 오래 전인 기원전 29세기의 고대 홍산문화 이래로 신성문양은 8개의 연꽃잎으로 표상되어 왔다. 실제 고구려 고분벽화 중 천장에 그린 연꽃문양은 하늘로 돌아가는 우리 민족의 조천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 선조들은 죽음을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늘로 돌아가는 고귀한 신성의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후대로 가면 연꽃 대신 북두칠성을 그려 넣는 경우도 왕왕 나타나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미창구 무덤도 우리의 답사 일정에는 있었지만 홍수로 인하여 얼마 전 다리가 끊겨서 갈 수가 없다고 하니 아쉬운 대로 이곳에 있는 모형으로 만족해야 했다.

▲ (左) 오녀산성 셔틀버스 타는 곳에 있는 '고구려 시조비'. 비석 위쪽에 삼족오까지 새겨져 있다. (右上) 셔틀버스 주차장 상점가. 각종 토산품을 판다. (右下) 상점가에 있는 어느 음식점이 내걸은 가게 이름. 흡사 국내의 모 분식 프랜차이즈가 생각난다.

박물관을 쭉 둘러보고 2층의 뒷문으로 나오니 셔틀버스 주차장이다. 왼쪽에는 주로 기념품과 함께 토산품을 파는 상점가가, 오른쪽에는 ‘고구려 시조비’라 쓰인 비석이 있었다. 윗부분에 삼족오를 새기고 중국 특유의 빨간 글씨로 ‘고구려시조비’라 쓰인 비석을 보면서 ‘왜 이런 걸 자기들이 만들어?’라고 생각하며 기분나빠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모이더니 ‘단체사진을 찍자’고 하는 우리 일행들을 보니 중국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고구려 시조비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남겼지만 왠지 중국이 깔아놓은 판에서 움직이는 것 같아 불쾌하다.

이제 셔틀버스를 탔다. 30여명 정도 탈 수 있는 버스에는 우리 답사팀과 중국인들이 섞여 가득 찼다. 10여분이 지났을 무렵부터 오녀산성 정상부의 암벽들이 점점 가깝게 보인다. 저 암벽들은 정말 볼수록 위엄이 넘친다. 실제로 오녀산성은 성의 전체 둘레 4,754m 중 4,189m가 천연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성벽의 대부분이 저런 암벽이다. 인위적으로 쌓은 성벽은 전체 중 12%인 565m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중에 오녀산성을 올라가면서 보았지만, 천연 암벽은 거의 수직을 이루는 낭떠러지여서 이곳을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 싶다.

▲ 호객행위에 성공한 가판대 아저씨가 팔던 사과배. 돌배처럼 생겼는데, 맛은 사과 맛도 배맛도 아닌 맛.

무시무시한 계단이 기다리는 입구에 도착하였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던 셔틀버스에서 내리니 8월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뙤약볕과 음료와 기념품을 파는 가판대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가판대 주인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서툰 한국말로 ‘천원’을 외치며 우리 일행의 주의를 끌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노력이 통했는지, 몇몇이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과배’에 흥미를 갖더니 사람 수만큼 구매하였다. ‘사과배’라는 것이 신기했기에 얼른 한 알을 받아 한입 크게 깨물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맛이 무언가 좀 부족하다. 사과처럼 새콤한 것도 아니고 배처럼 달콤한 것도 아니고 껍질마저 두꺼워서 씹기 쉽지 않았지만, 물이 매우 많아서 그럭저럭 갈증은 해소 할 수 있었다.

▲ 계단을 바라보고 놀라는 일행들. '저걸 올라 가라고?!'

본격적인 오녀산성 등반(!)이다. 입장권을 내고 개찰구를 통과하니 돌계단이 끝도 없이 뻗어 있다. 계단을 본 순간 우리는 그냥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고대 설화에 등장하는 하늘 사다리가 이런 느낌일까?

▲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오녀산성 정상은 이런 계단을 30~40분 올라가야 한다.

아랫배 단전에 힘을 잔뜩 주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이 많을 뿐 아니라 하나하나 높이도 낮은 편은 아니었다. 입구에 계단이 많은 중국 관광지에서 볼 수 있다는 가마가 있는 것을 보니 계단을 오르기 쉽지 않은 건 국적을 가리지 않나 보다. 관광지 계단을 오르는 가마를 얼마 전 유명 TV 예능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실물을 보니 꽤나 신기하였다. 계단 옆에는 갈지자之 모양의 언덕길도 있었는데 무릎이 안 좋거나 계단이 힘든 사람들을 위한 길이라고 한다. 
 

▲ 세월을 짐작케 하는 바위들이 신령한 기운을 내뿜는 이곳이 바로 '통천문通天門'이리라. 마치 옛날 신성지역에 들어가기 위하여 정화를 하는 곳 같았다.

올라가기 시작한 지 거의 30분쯤 되었을까. 계단과 나무만 보이던 풍경이 바뀌었다. 더욱 좁아진 계단 길 양쪽으로 수직 절벽이 아파트 5층 높이 정도로 높게 솟아 범상치 않은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아까 환인시에서 오녀산성으로 오면서 보였던 암벽이 바위들이 아닌가 싶다. 수천 년도 더 되어 보이는 바위 덩어리들은 마치 저 위쪽의 무언가를 지키는 수호신인양, 버티고 서 있으면서 이곳을 통과하려는 사람들을 매섭게 지켜보고 있었다. 
 
바위 안으로 한 발 내딛자, 서늘한 바람이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저 땀을 말려주는 그런 바람이 아니었다. 바람은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들과 섞여 신성지역으로 들어가기 전 온 몸에 남아있는 답답하고 무거운 기운을 씻어주는 듯 했다. 이것이 바로 ‘통천문通天門’이 아니던가. 

에너지는 누구나 느낄 수 있다고, 중국에서도 이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나보다. ‘천창문天昌門’이라 하여 절벽이 시작되는 입구 앞 너럭바위에 굵게 글씨를 새기고 붉은 페인트를 칠 해 놓았다. 하지만 주변과 조화롭지 못하니, 오히려 없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 오녀산성 정상부에서 보이는 환인 시내. 평온하면서 신성한 느낌을 가진 이곳은 한 나라의 첫번째 수도가 될 만한 기운을 가졌다.

▲ 오녀산성 정상부에서 환인시내 반대편으로 환인댐 수몰지구가 보인다. 저 밑에 우리의 옛 유적들이 잠겨 있다.

우여곡절 끝에 계단 끝까지 올라왔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환인 시내가, 올라온 쪽의 반대편에서는 환인댐으로 인한 수몰지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물속에 고구려 시대와 그 이전 시대까지도 점쳐 볼 수 있는 수많은 피라미드 적석총과 고구려 성터 – 진짜 졸본성으로 추정할 수 있는 성터 여러 개가 모두 잠겨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안타까움과 답답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정말 물어보고 싶다. 진정 당신들의 역사라고 생각했다면 저기를 수몰시킬 수 있었겠는가?라고. 
  

✔ 천손문화연구회 2015 중국 동북3성 선도문화탐방 그 여섯번째 ::  
 [6편] 오녀산성(下), 국내성 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