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근대 문화유산의 상징적인 공간, 정동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정동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을 말한다. 정동하면 뭔가 정겹고 동적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근세조선의 도읍지였고 대한제국의 수도이자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그 중에서도 가장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정동, 그 정동을 모처럼 다녀왔다. 정동 기행을 통해 민족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근대화와 선교의 요람, 신식 교육과 문화가 유입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식 모더니즘의 그 출발점이 되기도 한 공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모-던 껄의 장신운동(裝身運動)[자료 출처] 안석주, 「가상소견(1)」, 『조선일보』, 1928.2.5.

1920년대 당시 ‘모던보이’, ‘모던걸’은 새로운 유형을 좇아 1920 ~30년대 경성의 도심을 활보한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모던걸은 단발머리와 발목이 드러나는 짧은 치마, 스타킹에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들거나 양산을 든 근대적인 옷차림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앞장서 보여 주었다. 이들의 사치스러운 차림은 유행만을 쫓거나 지나친 노출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봉건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몸짓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특히 서구식 시계가 도입됨으로써 지금의 시간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고, 역설적으로는 그러한 문명적 혜택이 오히려 사람들을 하루 24시간, 구속받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그때부터 시간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 그 시선에는 정동도 예외일 수 없다. 과거 24시간의 시간 개념이 생기기 전만 해도 12지지를 활용한 시간 관념이 일반적인 시간의식이었다. 시간의 범주와 여유가 있었으며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삶 또한 자연친화적이었다.


이러한 정동은 6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통해 우리 역사와 만나게 된다. 우선 정동이라는 지명은 1396년(태조 5년),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지금의 정동 일대에 정릉을 조성하면서 유래되었다.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던 현비가 승하하자 태조 이성계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에 능역을 조성하고 능의 동편에 흥천사라는 절을 지어 왕비의 명복을 빌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자 , 다른 왕릉과는 다르게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그 크기 또한 너무 크고 넓다하여 1409년(태종9년) 도성 밖 현재의 성북구 정릉으로 이장하였다. 그래서 정릉동에서 능이 빠진 정동으로 된 것이다.
이장 후 태종은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다. 광통교는 축조 당시 신덕왕후 능을 이장하고 방치해 두었던 신장석을 다리 교대석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중 일부가 거꾸로 놓여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문양석이 거꾸로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신덕왕후와 정적관계에 있던 태종 이방원의 의도적인 복수심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신덕왕후의 능침을 지켜야 할 신장석이 수 백 년 동안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그 빛을 보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조선시대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던 것도 정동지역이었다. 붕당이 시작되어 처음으로 나뉜 동인과 서인 중 서인이 이곳 정동에서 시작되었다. 흔히들 동인과 서인이라고 부를 때 서쪽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정동이다. 그래서 달리 말하면 정동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조선 선조시기에는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서애 유성룡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리고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들과 임진왜란 등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많은 구국의 영웅들이 존재하였다. 인물배출은 최고지만 결과적으로는 인재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결국 전쟁으로 국가를 피폐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선조였다. 선조가 왜란으로 몽진을 갔다가 다시 한양에 돌아왔을 때 모든 궁들이 불타고 없어져 왕의 마땅한 거처를 찾아야만 했다.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큰 아들이자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정하고 자연스럽게 정릉동 행궁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덕수궁의 최초 시작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 해에 창덕궁이 완공되고 정릉동 행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바로 이때 정릉동 행궁은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경운궁 즉조당에서는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를 하였다.
경운궁을 둘러싸고 있는 정동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고자 노력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곳곳에 나라의 주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대한제국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덕수궁 준명당(浚眀堂)이다. 준명당의 명을 유심히 보면 일본을 의미하는 날일(日)자를 쓴 밝을명(明)자가 아니고 눈목(目)자를 쓴 밝게볼 명(眀)자를 쓰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눈을 부릅뜨고 나라를 잘 지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경운궁은 지금의 덕수궁으로 궁의 명칭이 바뀌게 된다.
 

정동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있게한 근대화의 공간적 상징이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과 갈등 그리고 피해의식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즉 국권을 빼앗기고 나라잃은 서러움과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 장소가 경운궁 내의 중명전이었다. 중명전은 덕수궁 안에 최초로 지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 황제가 머물렀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궁궐 밖에 있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이러한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현장이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남북분단을 통해 극단적인 이념 대립과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만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것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차례 개최되면서 민족의 분열과 갈등을 오히려 가속화시켰음에 기인한다.
 

정동하면 덕수궁 돌담길이 떠 오른다. 덕수궁 돌담길은 가을에 서울 도심에서 가장 아름답고 로맨틱한 정동길 혹은 데이트 코스로도 최적화된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대한제국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근대문화유산 1번지 정동의 재발견을 통해 고종의 근대화 정책이 시작되고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대일항쟁기까지 한반도 중심지역으로서의 정동이 갖는 그 시대의 자취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정동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역사적 상징성과 그 의미는 서로 상반된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제 민족의 아픔과 그 아픔으로 빚어진 갈등은 근대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던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역사를 발판으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지구경영의 시대가 한반도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암흑기였던 한반도의 20세기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짧은 대한제국과 근대시기의 발자취를 더듬어 오늘을 사는 우리로 하여금 정동이라는 공간이 갖는 역사적 상징성과 그 의미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우리 근대사를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고 민족의 아픔과 희망이 교차하는 정동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