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차 한민족미래포럼이 지난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렸다.

"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의 서술에 의하면, 백제 건국 시조는 온조이고 그 계통은 고구려가 된다. 고구려가 종가(宗家)라면, 백제는 그 작은 집이 되고 마는 셈이다. 백제 건국 집단이 고구려에서 남하했다는 기록을 일방 통행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가 지난 12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제13차 한민족미래포럼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이 교수는 '글로벌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이 교수는 백제사 왜곡에 대한 사안을 뽑아 허구성을 지적하고, 그 근간이 되는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백제는 고구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아들의 나라가 아버지의 나라와 수백 년간 전쟁을 벌인 국가로 본다"며 "백제 건국 세력을 잘못 풀이한 바람에 선입견이 생긴 것이다. 이것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 시조 전승(傳承)'과 '비류 시조 전승' 등 2종류의 백제 시조 전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온조 시조 전승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에 굵은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이며, 비류 시조 전승은 백제본기 할주(割註)에 작은 글씨로 기록된 것이다. 현재 온조의 고구려 기원설과 비류의 부여 기원설이 팽팽한 상황이나, 온조 전승이 본문에 적힌 덕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이 교수는 "온조 이야기는 근거가 너무 박약한데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며 "백제 시조 온조왕은 만들어진 역사다. 온조 일행의 남하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어머니 소서노를 데리고 간 것은 비류왕"이라고 말했다. 또한, 백제 건국 세력은 고구려계가 아닌 부여계라며, 시조의 경우만 하더라도 부여계 전승 대 고구려계 전승이 4:1로 부여계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했다.

"472년에 개로왕(백제 21대 왕, 455~475)이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에서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했다. 이것보다 분명한 기록이 어디 있나? 일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국왕이 외교 문서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서 찾았다. 실제로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扶餘) 씨이다. 온조 건국설화가 맞는다면, 고구려 왕실의 고(高) 씨를 써야 맞지 않는가?"

이 교수는 "중국 사서에 보면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고 했다. 백제와 고구려는 뿌리가 같은, 대등한 형제국가이고 경쟁상대"라며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 소재한 약소국이 아니다. 고구려에 대한 열등감이 아닌 오히려 자긍심을 지닌 민족이었다.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는 천손국(天孫國) 의식으로 주변 국가와 외교적 관계를 맺으며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고 말했다.

▲ 해상을 통한 백제의 활동 영역. 백제는 국제성과 독창성으로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가교 역할을 했다.

"백제는 해상을 통해 중국 남부까지 진출했다. 제주도는 물론 북규수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했다. 다시금 항로를 연장시켜 인도차이나 반도에까지 이르렀으며, 지금의 캄보디아를 가리키는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

이 교수는 "해상 실크로드의 동쪽 출발점이 백제다. 물산이 풍부해 인구도 제일 많았고 생산력도 높았다. 중국인, 왜인을 조정의 요직에 기용하는 등 다문화를 지향하는 열린 국가였으며 선진국이었다"고 했다. 백제는 한반도 남부에 국한된 작은 나라가 아니라, 해외까지 진출하며 다양성을 추구한 글로벌 국가였다.

한민족원로회가 주최하는 제14차 포럼(2016년 1월 14일)에는 하버드대학교 박사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학교 교수가 초청되어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을 주제로 강연한다. 한민족미래포럼은 격월로 홀수달 두 번째 목요일에 열린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동서남북의 분열과 대립, 정파 간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되기 위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고자 마련된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