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당연히 어렵죠. 하지만 범위가 정해져 있는 건데 뭐가 힘들겠어요. 저는 20살에 '나 대학 가면 뭐하지?' 하며 덩그러니 놓일까 봐 그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인생을 먼저 경험해 볼 수 있는 벤자민학교를 선택했어요."

다부진 목소리, 당당한 눈빛. 18살 여고생에게선 '여장부'의 모습이 보였다. 고교 자유학년제인 벤자민인성영재학교(이하 벤자민학교) 2기 재학 중인 충북학습관 이희진 양을 지난 10월 17일 만났다.

 

희진이는 사교성이 좋았고, 공부도 곧잘 했다. 학교생활이 즐겁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던 학생이었다. 그런데 문득 기말고사를 준비하며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중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른 채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과연 잘 사는 건가?' 이 양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벤자민학교 입학 결정을 하며,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예전에 전 모범생이 아닌 우등생이었어요. 공부도 하면서 잘 노는. 사교성도 좋았고, 성적도 반에서 3등 밖으로는 안 떨어질 정도였어요. 하지만 이기적이고 재수 없었죠. 학교 공모전 정보를 알면 저만 상 타려고 친구들한테 얘기하지 않았고, 친구들한테는 직설적인 말도 스스럼없이 했어요. 경쟁체제니까, 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이 양은 벤자민학교 입학 후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숨어있던 리더십을 발견한 것'그리고 '생각하면 바로 실행하는 것'을 가장 큰 변화라고 꼽았다.

1년 동안 교실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공부와 경험을 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벤자민학교 학생들이 가장 먼저 시작했던 것은 '도전'이었다. "살면서 언젠가 한 번 해보려고 했던 것이 국토대장정이었어요. 처음에는 소수 정예로 잘하는 학생들만 모집해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손을 들어보라고 하니, 충북학습관 친구들 거의 모두 하겠다는 거에요. 제가 얘기 꺼냈는데 두고 갈 수도 없더라고요. 그렇게 떠난 길이었는데,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어요."

▲ 이희진 양과 벤자민학교 충북학습관 학생 18명은 8월에 충북 청주에서 전남 해남까지 400km를 12박 13일 동안 걷는 국토대장정을 하였다(사진제공 = 이희진)

다양한 친구들을 위해 희진이는 더욱 꼼꼼하게 계획을 짜야 했다. 다치지 않도록 안전도 고려하고, 하루 걷는 거리와 숙소, 식사 등을 철저히 준비했다. 그렇게 8월에 충북 청주에서 전남 해남까지 400km를 12박 13일 동안 걷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희진 양은 길 위에서 친구들과 함께 웃고, 때로는 함께 울며 '함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들이 한 명이라도 낙오하지 않아야 '그날 잘 걸었다'하고 뿌듯해 할 수 있었어요. 내가 잘 걷는다고 먼저 가봐야 의미가 없죠.  학교 다닐 때는 경쟁에 찌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충북 친구들 다 같이 잘하는 게 좋아요. 나 혼자만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주위를 행복하게 하는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매일 걸으며 친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도 많이 하고, 마을회관에서 자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해남의 펜션에서 고기파티도 열어 '의미 있는 고생'을 자축했다. 동고동락하고 나니 남녀 상관없이 전우애가 느껴진다고 했다. 길 위에서 희진이는 친구들과의 추억은 물론 책임감, 배려심과 같은 인성도 얻었다.

"일반 학교에서 공부하는 안정적인 길을 포기했으니까, 그만큼 더 열정적으로 많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여성가족부의 해외 봉사활동 참가 후 3일 쉬고 국토대장정, 다시 3일 후엔 미국 세도나 지구시민캠프, 그리고 다시 제주 여행…. 두 달 동안 집에 있던 날이 6일밖에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외에도 번지점프, 패러글라이딩, 마라톤과 같은 경험과 어린이 캠프진행, 어르신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 러브랜즈, 외국인 사랑의 밥차 등 봉사활동, 네팔 지진 구호모금과 같은 사회 참여활동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하자마자 바로 계획하고 실행하는 추진력도 얻게 되었다. "생각만 하지 않고 뛰다 보면, 안 될 것 같은 일들도 다 되더라고요."

▲ 희진 양이 진행한 다양한 활동. 번지점프, 패러글라이딩, 마라톤, 어린이 캠프진행, 어르신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 러브랜즈 등 (사진제공 = 이희진)

경험에서 또한 얻은 것은 '사람'이다. 몽골에서 대학생 언니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리더십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연과 탈을 만들어 주면서 한국 문화도 알리고 교육 봉사를 했는데, 처음에는 말이 잘 안 통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친해져서 7~17살 몽골 친구들과 지금도 SNS로 연락하고 있다. 그리고 대안학교를 세우는 게 꿈인 한국인 신부님을 만나 자신의 경험에 관해서 얘기해 감탄과 격려를 듣기도 했다.

고등학교 들어가고서는 공부하느라 항상 가족들이 자고 있을 때 들어가고 나와서 얼굴 볼 틈이 없었는데,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었다. 늘 자신을 믿어준 친구 같은 엄마에게도 감사했다.

"학교에 계속 있었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평범하게 성적에 맞춰 갈 수 있는 과에 진학하고 살았을 것 같아요. 처음엔 학교 그만둔다고 하니 '미쳤구나!' 했던 친구들도, 지금은 제가 어디에서 뭘 하나 궁금해서 SNS를 찾아본대요. 뿌듯하기도, 재밌기도 해요. 친구들에게도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찾아보라고 권해주고 싶어요."

희진이는 이번 1년 신나게 놀고, 검정고시를 쳐서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다시 열심히 공부할 계획이다. "물론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그 사람의 깊이가 보이는데, 좋은 학교에 간 대부분의 사람은 인내를 통해 결과를 맺은 것이더라고요. 전에는 시험 범위가 정해져 있어도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젠 범위도 없이 막연했던 것을 하고 나니, 주어진 시험에 대해서는 더 잘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이 양의 꿈은 '재미있는 인생'을 사는 것. "몸이 힘들고 밤을 새워도, 막상 진행되면 미친 듯이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있잖아요. 그게 재밌어요. 학교에서는 공부 말고는 그렇게 할 게 없는데, 이번 1년 동안 내가 기획하고 선택해서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어요. 그때 집중력과 책임감도 커지고요. 앞으로도 그런 '재밌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공부도 하고 준비해서 사업가가 되고 싶어요. 제 경험에 대한 책도 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