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의 길 vs. 한국인의 길”
“국학의 길 vs. 한국인의 길”
  • 민성욱 박사
  • culture@ikoreanspirit.com
  • 승인 2015.10.22 2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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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을 통해 바라본 우리 역사80 : 쉽고도 재미있는 국학이야기4

국학의 길,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고, 한국인의 길, 우리 국학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다. 우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출발점이 되는 단군조선에 이르게 된다. 그 이전부터 생성되어 단군조선시대에 정립이 되었던 우리 역사와 문화는 고유한 사유체계인 국학을 낳았지만 이천 년이 지난 시점에 일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문화적으로는 단군조선시대의 폐관이 있었고, 역사적으로는 단군조선의 붕괴와 열국시대의 개막이 있었다. 여기서 열국(列國)은 열 개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들이 존재했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 민성욱 박사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부여, 옥저, 예맥, 삼한 등 열국들은 단군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정신문화적으로 하나가 되고자 끊임없이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삼국시대를 먼저 통일한 것은 가장 약체로 평가되던 신라였다. 민족사 관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선덕여왕 11년(642년)의 대야성 비극으로 인한 김춘추의 삼국 외교(고구려, 왜, 당과의 관계)는 신라와 당의 군사동맹 체결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김춘추의 청병요구가 관철되어 660년 나·당연합군이 형성됨으로써 결국 백제를 정벌하게 되었고,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분명 필연적인 이유는 있었겠지만 민족적인 관점에서 보면 당과 같은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신라의 무열왕(김춘추)은 친당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받아들인 중국 문물은 관제와 복식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고, 사후 묘호도 태종이라고 해서 중국의 묘호를 따랐던 것이다. 무열왕에 이어 그의 손자인 신문왕대에 이르면 삼국통일 후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국학(國學)을 설립하게 된다. 이때부터 국가적으로 유학자를 양성하게 되었고, 그들이 국정 전반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결국 고유한 전통문화는 외래문화인중국의 문물에 의해 밀려나 점차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일한 고려, 그 고려가 인종 때가 되면 대내외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워지게 되는데, 당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나라는 어지럽고, 국력은 쇠약해졌으며, 임금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마땅히 개혁이 필요했던 때였다. 임금에게 개혁을 해야 한다고 서경파들은 이야기하였고, 서경천도론, 칭제건원론, 금국정벌론 등의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이에 김부식 등의 개경파들은 서경파가 내놓은 개혁안마다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서 묘청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김부식 등이 이끄는 중앙군(개경파)에 의해 난은 진압이 되었으며, 서경천도운동은 그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민족의 주체성은 점차 상실되어 갔고 끝내는 원나라의 부마국(속국)이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하여튼 서경천도운동의 실패로 이 땅에 사대주의가 팽배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이후 조선왕조가 들어서게 되면 중국의 정신적 속국이 되게 이른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가 상실되자 국권까지 빼앗기는 수난의 역사를 거듭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고려 이후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유교가 국교가 되고, 유학이 국시가 되었다. 이로부터 무속신앙이나 전통문화 등은 모두 미신이나 악습으로 인식해 없애거나 무시하게 되었고, 역사 인식 또한 국조 단군은 신화적인 인물로 묘사하여 기자를 부각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우암 송시열 같은 인물은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인 만동묘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은 철저한 ‘존명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의식은 사대주의의 심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민족정신이 상실되어 그 바닥을 드러내자 우리의 민족정신이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과 갑신정변과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밑으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동학농민운동이었고, 이러한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이란 사람 안에 하늘 성품이 있다는 전통적인 선도문화의 부활로,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것과도 일맥상통한 얘기가 되었다.
그러나 온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과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분출되었던 동학의 힘이 외부의 세력, 즉 일본과 물질문명에 의하여 한풀 꺾이게 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물질에 의하여 쉽지 않은 길을 갈 것을 예견하는 사건이 되었다. 당시에 조선이 동학의 정신을 받아 들여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변화되었다면 좋은 결과가 올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하여 계속된 좌절의 시간이 있었으며 지금과 같은 어려움이 초래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도 계속적으로 민족의 에너지가 집결되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으니 이것을 하나로 모을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고, 이것이 희망이며, 비전이었던 것이다.

구한말에 발흥한 동학, 천도교, 대종교 등 민족종교들은 모두 우리나라 고유의 선도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단군의 홍익정신이 있었다. 특히 대일항쟁기에 종교운동, 민족주의 역사학, 국어학 운동을 주도했던 대부분 국학자들은 대종교의 교도이거나 대종교 철학과 역사관에 사상적인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현대 국학의 부활

그 이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난 후 1980년대에 이르러 현대 국학은 다시 시작이 되었다. 1987년에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고 안호상 박사 등 뜻있는 민족의 선각자들이 모여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 깨달음의 철학이자, 보편적 민주주의 정신이며, 민족단합의 구심이자 인류평화사상임을 만천하에 밝히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매년 개천절을 기념하는 축제를 민간 차원에서 복원하여 전국적으로 그리고 해외 동포사회에서 개최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오고 있다. 그 외에도 통일기원 국조 단군상 건립 운동을 벌여 초중고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369기의 단군상이 세워지게 되었고, 2004년에는 민족정신 및 역사, 문화의 연구와 교육을 위하여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이 있는 흑성산 자락에 국학원을 개원하게 된다. 이러한 국학원은 세워진 이래 동북공정 반대, 고구려 역사 지키기 등 민족의 정신과 문화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일을 해왔고, 또한 많은 공무원, 군인, 학생들이 다녀가며 나라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어서 살아있는 역사교육과 체험을 통해 우리 민족의 국학을 알리기 위하여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세기 단군을 꿈꾸며

단군조선의 역사는 우리들의 가장 오래된 미래, 그 미래를 열어갈 우리들 모두는 21세기 단군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고 정신문화를 전승하는 길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면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홍익의 가치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국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구인의 마음으로 우주를 품고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사람을 품는 다면 진정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국학에서 말하는 가치 창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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