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높이 뛰는 벼룩 한 마리가 있었다. 그는 발군의 점프력으로 세계선수권대회 높이뛰기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신기록을 갱신하였고, 실로 눈부신 활약상을 보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평소와 같이 좀 더 높이 뛰기 위하여 맹훈련을 하다가 덜컥 유리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민성욱 박사

때마침 한 아이가 무심코 그 유리병의 뚜껑을 닫고는 선반 위에 올려 놓고 가버렸다. 다른 벼룩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리병 곁에 모여 들었지만 그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오히려 친구들을 위로했다.

유리병 속 벼룩: “걱정하지마. 내가 누구니? 세상에서 가장 높이 뛸 수 있는 점프력을 가진 챔피언이잖아.”

날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높이 뛰어 올랐지만 번번이 병뚜껑에 등을 부딪치고는 맥없이 내려와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지쳐갔고 유리병 곁에서 응원해 주던 친구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마침내 혼자 남은 그는 결국 유리병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어느 날 문득 선반 위에서 유리병을 꺼낸 아이는 그 속에 벼룩 한 마리가 들어 있음을 발견하고는 병뚜껑을 열어 벼룩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유리병을 느릿느릿 걸어 다닐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참다못한 아이가 그 벼룩에게 말했다.

유리병 밖의 아이: “벼룩아! 네게는 세상에서 가장 높이 뛸 수 있는 점프력이 있잖니. 그런데 왜 뚜껑을 열어줬는데 도 밖으로 훌쩍 뛰쳐나가지 않는 거니?”

벼룩은 힘없는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유리병 속 벼룩: “부탁이야. 날씨가 추워. 뚜껑을 닫아줄래.”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과 한계를 극복하면 우리 안의 위대한 가치인 국학을 만날 수가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만나는 국학의 요소들을 통해 그러한 가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국학의 요소라고 하면 역사, 문화, 철학을 말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은 고유한 사유체계와 정신문화 그리고 사상적 기반을 토대로 한 철학이 그것이다. 그러한 국학을 역사 속에서 발견함으로써 우리 안의 위대한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또한 역사에 눈감으면 미래를 볼 수 없다고들 한다. 그래서 역사학의 다른 이름은 미래학이다. 요즘 한술 더 떠서 역사는 안보라고도 한다. 역사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안보와도 직결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독도 영유권 주장 등만 보아도 짐작이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은 과거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과거라는 밑그림을 통하여 그려나가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완성한 그림은 미래의 누구에게는 밑그림으로 사용될 것이다.

“역사는 규격화된 상자가 아니라 보자기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거 역사가 만든 작품이다. 우리들의 존재를 보아도 그렇다. 우리 부모님들의 위대한 작품이 우리가 아닌가. 과거를 모르면 현재를 진단할 수도 없고, “진리의 눈”,“인생의 안목”,“인간의 도리” 등을 배울 수가 없다.
역사란 과거 경험의 총체적인 결정체, 역사를 주도하는 역사의 주체가 되거나 아니면 물밀듯이 밀려오는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그 존재마저도 사라질 수 있다. 한민족의 문화적 원형은 상고사인 고조선 시대의 역사에 그 답이 있다.
역사는 규격화된 상자가 아니라 보자기다. 즉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고,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모양과 형태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그 무게도 달라진다. 보자기에 담는 내용에 따라 다양한 역사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의 보자기에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 그 취사선택의 기준이 역사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뿌리역사를 통해서다.”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뿌리 역사와 정신문화의 혼, 이것이 바로 국학의 관점에서 바라 본 우리 역사의 의미이자 가치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민족적 자존감이 가장 강할 때가 있었고, 가장 약할 때가 있었다. 고조선 시대처럼 국학이 활성화되어 있을 때는 민족의 자존감이 가장 강할 때였고, 그러한 국학이 활성화되었을 때 우리의 국혼이 살아났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란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我’란 ‘나와 민족과 인류’를 말한다. 개인과 전체의 조화, 모든 우주만물과 삼라만상의 현상을 다 아우르는 ‘홍익인간 이화세계’ 라는 위대한 정신철학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특히 상고사에서 집중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국학에서 상고사가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가 우리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뿌리역사를 통해서다. 그 뿌리 역사가 상고사이고, 오늘날 민족의 정체성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상고사를 알아야 되며,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의 ‘서시’에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라는 구절이 있다. 우주 삼라만상의 현상을 다 아우르다 보면 눈에 보이는 생명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는 그 형태만 변할 뿐 사라지지 않는 것, 이것은 한민족의 삼대 경전인 『천부경』에도 나온다. 하늘에 부합되는 삶,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었고, 별을 노래하며,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변함없는 에너지와 그 에너지로 인해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은 법칙이전의 법칙으로 자유롭고도 거침없는 우리 한민족의 삶이었고, 그들의 삶의 발자취가 역사 속에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이러한 삶의 중심 가치를 논하는 것이 바로 ‘국학’이다. 국학을 통해서 바라본 우리 역사는 피해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서 위대한 정신철학인 홍익정신으로 문화의 꽃을 피웠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