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인 기자의 고향 집은 추석날이 되면 가족친지들로 북적인다. 차례를 지낸 후 함께 음복도 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대화의 방향이 자녀 세대로 향할 때면 어른들로부터 '돈벌이는 어떠냐', '결혼은 안 하느냐' 등의 부담스러운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수년간 쌓인 노하우로 은근슬쩍 답을 넘기곤 한다. 

명절날 가족모임은 추석 당일 저녁이면 모두 마무리된다. 어릴 적 사촌 식구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까지 어울려 놀던 기억은 그야말로 추억 속의 일일 뿐이다. 이제 성인이 된 형제들은 공부나 생업, 휴식 등을 위해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말로만 듣던 당일치기 명절 문화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다.

기자가 겪는 명절 문화가 비단 기자 개인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요즘은 연휴를 이용한 여행과 여가활동이 늘어나면서 명절의 의미보다는 휴일이란 개념이 더 부각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OECD 국가 중 세계 2위의 장시간 근로국가에서 살고 있는 만큼, 쌓인 피로를 연휴를 통해 풀고 싶은 건 당연한 심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가사노동 혹은 결혼, 취업, 공부 등에 관한 친지들의 관심에서 오는 피로를 생활에 더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맘때쯤 되면 으레 올라오는 주부 명절증후군이나 취준생 명절스트레스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느덧 명절은 현대인에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날이 됐다.

실제로 기혼남녀 22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30%가 '명절 후 싸운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50세 이상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부모 세대의 46%가 '자녀의 부모 방문은 서로 편한 당일치기가 좋다'고 대답했다. 대학입시를 앞둔 학생이나 결혼을 하지 않은 성인남녀 역시 명절이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명절은 조상에게 감사의 마음을 올리기 위한 시간만은 아니다. 바쁜 일을 뒤로 하고 한 자리에 모인만큼 가족의 사랑과 화합을 이끌어내는 자리이기도 하다. 진정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서로의 입장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남편은 가사로 고된 아내의 마음을, 아내는 회사 일로 지쳐 연휴 날 무조건 쉬고 싶은 남편의 심정을, 부모와 자녀는 세대 차이로 인한 생각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추석에는 내가 먼저 가족들을 배려해보자. 상처 주는 말 대신 내가 먼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보는 것이다. 다 함께 지친 가족의 어깨를 마사지해주는 시간을 가져도 좋다. 단 하루만 같이 있고 싶은 피곤한 가족이 되느냐, 하루를 있어도 힘이 되고 도움을 주는 가족이 되느냐는 내가 하기에 달렸다. 이왕이면 킬링패밀리(Killing family)보다는 힐링패밀리(Healing family)로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