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서 한평생이란 말이 있다. 누구나 속고도 속은 줄 모르고 한세상을 보낸다. 우리가 속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2000년 고조선의 역사를 잃고도 잃은 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병도에게 배운 강단사학자들에게 물어보아야 그들은 모른다. 차라리 소설가 이광수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다. 이광수는 일제 말기인 1942년에 소설『원효대사』를 썼다. 거기에서 우리나라 역사는 고조선에서 시작되었는데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 고유의 신교가 있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친일파로 낙인찍혔던 춘원에게 뜻밖의 발언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광복 후 북의 6.25남침으로 납북되어 영원히 소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최근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를 다시 읽다가 저자가 원효대사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광수는 원효대사를 보다 넓은 세상으로 끌어내어 그의 사상을 보다 깊게 보려고 한 사실을 역력히 보여 주었다. 불교는 머나먼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래 종교였다. 이차돈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가 목숨을 버리고 받들어 모신 부처님이 원효대사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 한국종교가 되었다. 아직도 한국불교가 외래종교로 보는 조계사 종무원장이 있어 한국불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형편에 있다.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를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한국에는 큰 가르침인 선도仙道라는 이름의 신교神敎가 불교를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은 불교가 세계종교의 하나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나 그때는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宣敎에 실패하였고 한국에 들어와 겨우 자리를 잡은 인도의 외방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노교 즉 도교가 중국인의 마음을 꼭 잡고 있고 일본에서는 신도가 불교를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만은 불교가 한국의 선도와 손잡아 한국종교로 동화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원효대사야말로 그 일등공신이었다. 이광수는 불교신자인 원효대사의 눈을 통해서 고조선의 고신도(古神道)를 알았다. 다시 말해서 춘원은 불교를 통해서 죽은 선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역사학자들은 모르는 것을 문학을 하던 이광수가 선도를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에게 지금 공동묘지에서 다시 살아난 단군이 있다. 그러나 춘원의 소설이 없었으면 단군을 영영 살아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이광수가 불교와 원효대사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고 있을 때 한 일본인 학생이 다가오더니 “너 조선인이잖아? 금강산에도 못 가 보고 어떻게 조선인이라 할 수 있나. 나는 금강산에 가보고 놀랐다. 너도 가보고 조선인다운 조선인이 되라!” 일본인의 굴욕적인 한마디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귀국 후 이광수는 벼르고 벼르던 금강산에 유람을 갔다. 금강산이 무어 길래 일본 놈까지 홀리는가. 그러나 그의 소설 『마의태자』를 읽어 보면 내금강산 어구에서 본 장관은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외금강산으로 들어가 금강산을 보지만 금강산으로 들어가야 금강산의 진면모를 보는 것이다. 마의태자뿐만 아니라 숙적 왕건까지도 내금강산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광수는 실제로 그런 내금강산을 보고 장안사에 들어갔는데 어떤 젊은이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다가가서 말을 건네 보니 자기 형님이 아닌가. “형님이 여기 웬 일이십니까? 하고 물으니 만주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겨서 여기 와서 숨어 있는 거야” 라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그때 불교에 관심이 있어 형님을 따라 장안사에 묵으면서 불교 공부를 시작하고 원효대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불교를 알고 보니 불교보다 더 큰 우리 종교 선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과 같은 사건이었다. 이광수는 타고난 글재주로 28독립선언서를 썼다. 그리고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독립만세 소식을 알리고 『독립신문』에 애국적인 글을 썼다, 그러나 조국에서는 일제의 방해로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신문에 글을 써서 일생을 망치느니 고국에 돌아가서 『동아일보』에나 글을 쓰자 하고 「민족개조론」을 썼다. 그러나 그 글은 친일언론이었다. 그러나 춘원은『마의태자』(1925)『단종애사』(1928, 동아일보)『원효대사』(1942 매일신보) 등 역사소설을 써서 타다 남은 겨레의 애국정신의 지푸라기에 불을 지펴 주었다.  
 
신문기자가 된 이광수는 사학이 문학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학과 철학이 하나란 사실도 알았다. 이것을 모르는 오늘의 신문기자들은 지금 역사가들과 같이 일생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문사철文史哲을 따로따로 공부하면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진리와 멀어지는 것이다. 이병도에게 배운 제자들은 사학이란 좁은 골방에 갇혀 역사를 쥐구멍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단순한 소설로 알고 그 속에 귀중한 역사세계가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역사는 그림이다. 그림은 화가가 그리는 데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논문이라는 작은 밑그림을 아무리 많이 그려서 찍어 붙여도 그것이 큰 그림이 되지 않는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라 하였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에 소각小覺과 대각大覺이 있는데 대각은 부처님만이 가능한 일이고 보통 사람은 기껏해야 소각으로 끝난다.   
 
역사는 주제가 중요하고 이야기 줄거리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현장을 답사해야 한다. 그리고 또 그 글이 무엇에 쓰이는가도 중요하다. 이광수의 원효대사는 좋은 주제와 이야깃거리 그리고 현장성까지 갖추었는데 그 쓰임새가 좋지 않았다. 이광수가 일제식민사학에 이용당한 것이다. 원효대사가 남긴 책은 세 권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어렵기 짝이 없다. 이광수는 그런 어려운 원효의 불교학을 아주 쉽게 해설해 주었다. 불교와 선도가 만나는 장면을 마치 목격자인 것처럼 설명해 준 것이다. 필자에게 지금 『원효』라는 철학자의 논문집 한 권이 있는데 그 속에 열다섯 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광수의 소설『원효대사』 한 권만 못하다. 한국불교를 알려면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읽어야 한다. 이광수는 원효대사의 사상을 한 마디로 설명하라고 하면 무애행無碍行과 비아非我라 대답해 주고 있다. <무애행>이란 “거침없이 행동하고 살아라.” 는 뜻이고 <비아>란 “매사에 자기를 버리라”는 것이다. 이광수는 또 원효대사에서 신라의 통일을 배웠다.
 
원효는 삼국통일기의 신라에 태어났다. 때문에 통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방략을 고민하고 알아냈다. 무산 전투는 신라의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라군과 백제군이 싸워서 피아에 3,000명의 전사자를 낸 대전투였다. 그 무산이 바로 필자의 고향인 전북 무주 설천이었다. 설천은 핏빛으로 변한 강 이름을 흰 눈의 강 즉 설천으로 고쳤다. 무산전투는 신라와 백제의 생사를 건 통일 전쟁이었다. 백제로서는 나폴레옹이 패전한 워털루 전투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말로만 통일을 부르짖지 말고 무산 전투의 현장에 가서 무덤 앞에서 추모제라도 한 번 지내야 하지 않겠나.(계속)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