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시대이다. 음식의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는 일도, 바쁜 시간 중 헬스센터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일도 ‘아름다움’과 ‘건강’의 이유로 공감을 얻고, 관련된 다양한 뉴스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된다. 그 과정에서 몸이 억압되고 도구화되고 상품화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찌되었든 많은 사람이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일은 일단 고무적이다. 그동안 개인적이고 비밀스럽기까지 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몸에 대한 공론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권효숙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내가 어렸을 적 자주 편찮았던 할머니는 ‘아픈 곳이 없어 몸이 있는 줄도 모르면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때는 ‘몸이 안 느껴졌으면 좋겠다’라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병원신세를 져야 했을 때마다 나 역시 할머니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깨닫곤 하였다. ‘느껴지지 않는 몸’을 굳이 풀어내자면, ‘고통이나 불편함이 주의를 몸으로 이끌지 않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이나 불편함은 최적화된 신체의 균형이 깨어졌을 때 나타난다는 점에서 경청해야 할 신호이지만 그것을 즐기고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최후의 통첩처럼 보내는 고통과 불편함의 위험신호 없이도 우리의 몸이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최상의 균형과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최근 몸과 건강을 아우르고 그것을 넘어서 삶의 방향성까지 제시하는 ‘솔라바디(solar body)’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솔라바디는 “자연치유력을 회복하여 스스로 빛나는 태양처럼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승헌, 2015, p.8)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완벽하게 존재하는 균형과 조화의 감각을 되살려 내는 것”(같은 책 p.10)으로 성취될 수 있다. 솔라바디는 이처럼 명료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진 은유이다. 그 은유는 ‘만물의 근원적 에너지(solar)를 품은’ 태양을 보조관념으로 삼음으로써 ‘원래성’과 ‘충만함’과 ‘강인함’이라는 내포를 직관하게 한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태양과 더불어 그 존재를 드러내었고, 태양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러면서 그 태양에너지는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으며 만민에게 모두 공평하다. 태양의 은유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내포하는 ‘공평함’, ‘무한함’이 주는 평화로움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과 같은 경쟁시대에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는 것은 되새겨볼수록 감격스러운 일이다. 당연하게 주어진 것을 감격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흔히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은 ‘한정된 재화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한정된 재화의 이미지 자체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욕망하게 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우리가 사회문제로 지적하는 지나친 서열화는 학교에서, 일터에서, 또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쟁취경쟁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일상에 스며있는 이러한 우리 삶의 행태는 쟁취경쟁 없이 좋은 것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조급증과 강박증을 갖게 했고, 그것은 다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잠식해왔다.

무지개와 파랑새라는 신기루를 쫒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을 망각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라면, 무엇이 소중한가를 판별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안목은 지혜이다. 더구나 그 선택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면 더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솔라바디라는 은유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는 ‘몸속에 태양을 품어 원래의 나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쟁하지 않아도, 조급해 하지 않아도 원하는 바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으니 새삼 감격스러운 일이다. 나누고 또 나누어도 충분하고 남음이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타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고 보듬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는 가질수록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의 풍족함을 통해서는 성취하기 힘든 과제이다. 지금에 와서는 ‘몸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 있기’라는 표현에 실려 있었던 바가 평화로움과 충만함에 대한 갈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돌아가신 할머니께 그 말씀이 그 의미였는가를 여쭈어 볼 길 없고, 여쭙는다고 바로 그 표현으로 재연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에 기대어 그렇게 짐작한다.

이 즈음에서 담론공동체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인간은 선택을 통해 행복해질 기회를 여는 주체적인 존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시선과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옛말에 중구삭금(衆口鑠金: 뭇사람의 말은 쇠도 녹임)이라는 말도 있듯이 ‘말하고 또 말하기’의 힘은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그 말하기의 방향에 따라 그 말은 우리에게 부메랑처럼 좋은 실천으로도 혹은 나쁜 실천으로도 나아가게 한다. 솔라바디가 내포하는 가치의 방향성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삶에 수용하는 과정은 혼자서보다는 담론공동체를 통해서 더 잘 이루어 질 수 있다. 담론은 담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참여한 사람들의 실천과 해석학적 순환을 통한 성장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담론공동체의 교육적 가능성에 주목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