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가득한 새벽녘, 아직 떠오르지 않은 태양을 뒤로하고 먼저 몸을 일으켰다. 한 계단 한 계단 굳건하게 두 발을 내디뎌 올라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공원. 하늘 높이 치솟은 탑을 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두 주먹으로 아랫배를 둥둥 두드린다. 몸을 살짝 데운 후 누구든 오길 기다렸다.

어느새 한 사람이 앞에 와서 섰다. 그는 한눈에 보아도 걸음이 불편해 보였다. 한쪽 팔과 다리가 굳은 것을 보니 그는 중풍을 앓고 있었다. 굳고 막혀있는 그의 몸을 풀어주기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온몸 털기’였다. 선 채로 무릎에 가벼운 진동을 주어 위아래로 몸을 터는 동작이다.

다른 이에게 그는 그저 그날 공원을 찾은 중풍 환자였을지 모르나, 그는 ‘나와 민족과 인류를 대신하여’ 찾아온 존재였다. 1980년 경기도 안양의 충현탑 공원. 국학기공이 시작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일지 이승헌 총장이 깨달음을 얻은 뒤 찾은 경기도 안양시 충혼탑 공원. 미국에서 온 국학기공 동호회원들이 모여 기체조를 하고 있다.

국학기공의 창시자인 일지 이승헌 총장은 새벽 일찍 일어나 공원을 향하는 것으로 ‘홍익(弘益)’을 시작했다. 국혼(國魂)의 명맥을 되살리고, 모든 사람의 건강과 행복,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이 총장은 스스로 제1호 국학기공 강사가 되었다.

국혼과 이 총장의 첫 만남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총장은 어려서부터 교육자인 아버지로부터 국혼과 홍익인간 이념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는 지금도 ‘통일 성약 오심중(統一 聖藥 悟心中)’이라는 한시를 되새기고 있다.

‘통일 성약 오심중’이란, 통일을 할 수 있는 성스러운 약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깨달은 마음에 있는 것으로 ‘천손 소지(天孫 所知)’ 홍익인간 정신, 즉 국혼을 가진 천손만이 알 바이며, ‘비여경(非餘境)' 그 외의 사람은 아무리 성스러운 약이 있어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부터 국혼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삶의 의미와 이치에 대해 고민해 온 이 총장은 서른이 되던 해 전라북도 전주 모악산을 향했다. 먹지도 눕지도 자지도 않은 채 오직 근원을 깨닫고자 하는 일념으로 21일을 보낸 끝에 그는 한민족 국혼의 명맥이 끊어졌음을 자각하고 세상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만의 깨달음으로 둘 수 없었다. 개인만을 위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국혼의 명맥이 끊어진 것을 안 순간, 그는 이 민족과 국가, 인류에 대한 큰 사명감에 휩싸였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전달할 수 없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혼자만 깨닫고 혼자만 깨달음에 머물러 있다면 그 역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깨달음을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그를 동트기 전 공원으로 이끌었다. 지금 당장 무엇이든 전하라는 하늘의 재촉이었다.

▲ 대한민국의 새벽을 여는 국학기공

공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가 오길 바라는 이도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아무도 없었지만 시작했다. 안 하면 안 된다. 하기로 했다면 혼자서라도 시작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단전 두드리기를 하면서 1호 국학기공 동호인인 중풍 환자를 만난 것이다.

국학기공은 널리 만물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 정신을 전달하고자 했던 이 총장의 첫 실천이자 노력이었다. 35년 전, 그의 첫 실천과 노력은 이제 전 세계 10개국의 공원과 복지관, 학교, 직장으로 확대되었다. 수십만 명의 국학강사들과 100만 명의 동호인들이 제2, 제3의 ‘일지’가 되어 건강과 행복, 평화의 정신인 ‘홍익’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