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태초의 기억 '창세설화'. 그 발자취를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이상향을 엿볼 수 있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이 '설화(신화, 전설, 민담 등)는 집단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듯이, 창세설화 속에는 각 민족이 추구해온 완전무결한 유토피아의 모습과 삶의 절대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한민족의 가장 오래된 사서 <부도지(符都誌)> 속 창세설화 '마고성 이야기'를 통해 인류 시원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자.

▲ Light, toward the origin of soul [그림=최종린 화가]

평화와 조화의 세상 '마고성'

태초에 우주에는 오직 음(音)만이 존재했다. 우주 창조의 원음이자 리듬인 율려(律呂)에서 지구 어머니인 마고가 탄생했다. 율려가 여러 차례 부활을 반복하여 별들이 생겨났다. 여기서 율려는 창조주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려가 창조해냈다는 마고성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근원적인 세상의 모습을 말한다.

마고 어머니는 홀로 두 딸 궁희와 소희를 낳고 그들로 하여금 천지간 만물을 창조하는 일을 돕게 했다. 궁희와 소희 역시 마고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닌 완벽한 존재로, 홀로 각각 두 딸과 두 아들을 낳았다. 이들 네 천녀와 천인은 황인, 백인, 흑인, 청인을 이루어 율려로써 만물을 다스렸다. 네 천인 중 황궁은 토(土), 백소는 기(氣), 청궁은 수(水), 흑소는 화(火)를 담당했다.

마고성 사람들은 오늘날의 인간과는 달리 땅의 젖인 지유(地乳)를 마셨다. 그들의 품성은 순수하고 따뜻하며 혈기가 맑았다. 능히 스스로 하늘의 소리를 듣고 그 이치와 통하여 완전한 조화 속에서 살았다. 그들은 소리 없이도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으며 형상을 감추고도 오갈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의 에너지는 천지와 하나였기에 육체의 한계를 넘어 장수를 누렸다.

타락과 분별의 시작 '오미의 변'

마고성의 평화로운 상태는 영원하지 않았다. 마고성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지유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지유를 먹기 위해 기다리는 일이 생겨났으며, 무리 중에는 배고픔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백소의 무리 중 지소라는 사내 역시 지유샘을 찾았으나 사람이 많아 다섯 번을 양보하다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게 포도를 먹게 됐다. 포도는 단맛, 신맛, 짠맛, 쓴맛, 매운맛 등 다섯 가지의 맛을 지니고 있었다.

포도의 맛과 힘에 놀란 지소의 말에 포도를 먹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포도는 지유처럼 맑지 않아 마고성 사람들은 절대적인 합일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며, 너와 내가 다르다는 분별이 일어났다. 지유 이외의 음식 섭취를 금하게 되면서 자재률(自在律)을 파기하게 되었다. 타락한 이들로 인해 마고성의 존립마저 위험에 처하게 됐다.

장자인 황궁은 오미의 변에 대한 책임으로 마고 어머니께 사죄했다. 네 천인은 마고성을 지키기 위해 후손을 데리고 성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청궁은 오늘날의 중국, 일본, 중남미 쪽, 백소는 중동과 유럽, 흑소는 인도네시아, 인도, 아프리카 쪽, 황궁은 시베라아, 동아시아, 북아메리카로 제각각 흩어져 갔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다시 하늘과 연결할 수 있게 되면 마고성으로 돌아오리라고 맹세했다. 이것이 바로 '복본(復本)의 맹세'였다. 

[전문가 코멘트]

<부도지>는 『징심록』 제1지로서, 신라 4세기 말 박제상에 의해 작성된 역사서이다. 「부도지」에서는 한민족사의 출발점에 자리한 마고성시대를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마고성시대 사람들은 내면의 생명력이 온전히 유지하였고 더하여 이러한 사람들로 인해 세상까지도 생명력으로 충만하였다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마고성은 성 중앙의 천부단(天符壇)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4개의 보단(堡壇)을 갖춘 모습이었다. 우주의 근원적 생명에너지인 마고(천부天符)가 공기·불·물·흙으로 대변되는 현상의 물질세계를 움직이고 주도한다는 의미를 상징하였다. 이렇게 마고성 중앙에 천부단을 설치하고 하늘의 소리, 곧 마고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또 이를 세상 속으로 펼쳐 실천하는 마고성시대 사람들의 모습에서 동아시아 고대 천손사상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도움말=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