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대해서 학창시절 역사과목을 통해 접한 것이 전부인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개인별로 이해 정도는 다르겠지만 분명 역사인식의 차이는 있을 것 같다. 역사인식은 어떻게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창과 같다. 대개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동일한 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실사구시’를 주장하던 실학파들이 왜 그렇게 주체적 역사인식에 온 마음을 두고 역사서 편찬에 집중하였는지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민성욱 박사

실학파의 전체적인 성격을 규정해 주는 대표적인 용어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이 있다. 이 '실사구시'라는 용어는 중국 역사서인 반고의 『한서』에 수록된 「하간헌왕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곧 하간헌왕[경제(景帝)의 아들 유덕]이 선진시대의 옛 서적을 널리 구해서 바치는 등 경서를 존중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학문을 닦으며 옛 것을 좋아하여 실지의 사실에서 옳은 것을 찾았다."고 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 하나는 경전연구에서 사실의 증거를 찾아 옳은 것을 확인하는 고증학적 학풍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실용적 학풍을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조선 후기의 실학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실학의 전반적인 특징은 봉건적인 질서로부터 근대로 지향하는 진보적인 의식, 즉 '근대 지향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사대주의적이고 중화중심주의적인 문화전통에서 벗어나 좀 더 '민족의식'을 각성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은 실학을 평가하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국내에서는 양란을 겪은 후인 17세기에는 고기류(古記類)들이 성행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들이 특히 고대사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한반도와 만주는 지리적으로 연접해 있고,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발해가 멸망한 이후 만주는 한국사 체계 밖에 있는 국가가 통치하는 공간이 되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말갈의 후대라고 일컬어지는 여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명과 고려(조선)가 각축을 벌이기도 했지만 15세기 중엽이후 명의 적극적인 여진 초무정책이 성공함으로써 만주는 명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만주에 대한 조선의 영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의 상황은 달랐다. 중화인 명(明)이 멸망하고 그 자리를 청(淸)이 대신하였다. 이때 조선은 중화의 붕괴 혹은 부재로 받아들였고 스스로 중화의 계승자임을 자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중화의식은 숭명(崇明)을 전제로 하여 조선 이외의 민족을 이적시(夷狄視) 하였다. 반면,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 이른바 실학자의 입장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천문지리학 등의 영향을 받으며 논리적으로 선명하게 종족적ㆍ지리적 측면에서 화이(華夷)구별을 부정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사상계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명청 교체로 상징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를 계기로 나타난 화이론(華夷論)의 변용이라는 흐름 속에서 조선의 고유문화 혹은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국학의 태동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 후기의 열악한 사회현실에 대한 자각과 결합하여 자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역사학은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그러한 인식을 강화해 나가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홍만종과 이익ㆍ안정복 등이 단군을 강조하고,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주장한 것은 조선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대등하게 그 시작과 끝이 전개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학파들의 역사인식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역사는 의식과 가치관의 문제로 귀결되며, 국제질서의 재편이라는 중요한 시점에서는 역사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답은 수없이 반복되어 나왔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역사를 공부하는 실리가 무엇인가? 혹은 역사를 알아서 어떤 이득이 있는가와 일맥상통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인식의 과정이 생략된다면 우리 역사를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받아들이게 되고 정말 알아야 될 우리 역사의 밑바닥에 유유히 흐르는 정신과 문화를 놓치게 된다. 이것은 역사의 본질은 놓치고 변죽만 울리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 역사 교과서에는 한두 페이지에 불과한 고조선의 역사를 확대 수용하고서야 우리 역사의 실마리를 풀 수가 있다. 우리가 고조선 시대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 역사의 시작이자 뿌리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오래된 역사라 남겨진 사료가 별로 없고 그래서 왜곡될 여지가 많아 잘못 알려진 내용이 많다는 것도 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이유들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고조선 시대의 역사는 우리가 역사의 주체로서 역할을 했다는 것에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인생의 주인공이었던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황금기나 전성기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이, 혹은 현재가 최고의 전성기일 수도 있다. 인생이 고달플 때 황금기나 전성기를 떠올리면 힘이 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실패하고 패배한 경험들만 생각하면 갑자기 힘이 빠지고 우울해 진다. 우리 역사에도 피해의식을 심어주는 역사도 있고 반면 고조선 시대의 역사처럼 주인의식을 갖게 해주고 힘이 나며 희망을 갖게 되는 역사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광사만 취하고 수난사는 버리자는 의미는 아니다. 관건은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고 올바르게 이해하자는 데에 있는 것이다. 실학파들이 추구했던 '실사구시'처럼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그토록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자 했고, 지금도 독도영유권 주장과 함께 역사 침탈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자랑스러운 고구려사, 발해사 등을 중국사로 편입하고자 하였고 이미 편입하였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동력원이 되어 줄 것이다.

21세기, 지금도 실학은 존재한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를 바로 세워 국가관 확립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고 풍요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7세기 이후 국학연구와 연관하여 우리의 역사ㆍ지리ㆍ언어ㆍ풍속 등을 깊은 관심으로 연구해 왔던 전통의 새로운 학풍을 부각시키면서 '실학'으로 명명되었듯이 새로운 '실사구시'의 학풍으로 우리 국학을 다시 한 번 일깨울 때가 온 것이다. 그것이 바로 21세기에 필요한 실학의 학풍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