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이다.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으로서 ‘한글’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언어를 상실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민족의 구심점으로 단군을 모시고 민족의 정체성으로 한글을 지켰다. 주시경과 제자들이다. 대부분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大倧敎) 인사라는 점이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총장 이승헌, 이하 UBE)는 (사)국학원(원장 권은미), (재)한민족기념관(관장 장영주) 공동으로 지난 13일 서울 세종문회화관 예술동 예인홀에서 열린 ‘국학과 한글운동’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조남호 UBE 국학과 교수와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발표를 들어본다.

▲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예수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한 이유?

조 교수는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의 단군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대종교는 국외에서는 무장투쟁으로, 국내에서는 한글운동을 전개했다. 주시경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민족의 정체성으로서 한글을 주장하고, 민족의 구심점으로 단군을 모셨다. 이들은 한글 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 강연 등을 통해 단군을 소개하였다. 이들은 비록 역사학자는 아니었지만, 조선의 민중들에게 단군이 민족의 시작임을 밝히고자 노력했다.

주시경은 1907년에 대종교(단군교)를 개종했다.

“선생은 종교가 예수교였는데, 이때(최익현의 추도식에 참석한 후) 탑골승방에서 돌아오다가 전덕기 목사를 보고, ‘무력침략과 종교적 정신침략은 어느 것이 더 무섭겠습니까?’하고 물을 때에 전 목사는 ‘정신침략이 더 무섭지.’하매, 선생은 ‘그러면 선생이나 나는 벌써 정신침략을 당한 사람이니, 그냥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하였다. 전 목사는 ‘종교의 진리만 받아들일 것이지 정책을 받지 않으면 될 것이오.’하였지마는, 선생은 과거 사대사상이 종교침략의 결과임을 말하고, 종래의 국교(國敎)인 대종교(곧 단군교)로 개종하여, 동지를 모으려고 최린, 기타 여러 종교인과 운동을 일으키었으므로, 종교인들에게 비난과 욕을 사게 되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정신을 보존해야겠다는 결심이 그를 대종교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종교적 체험으로 이어진다.

“넓고 끝이 없어 위아래 가운데 바깥이 없는 저 우주에 하나가 있어 사방에 가득하니 생멸(生滅)과 시종(始終)이 없는지라. 그 사이에 무수한 물체가 있으니 다 이를 따라 이루어지고 또 모든 물체가 각각 이를 따라 명한 본성이 있는지라. 이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모든 존재의 주인이고 천(天)이라. 상제(上帝)라 리(理)라 함이 이를 이름이다.”

이는 1908년에 쓴 글이다. 주시경은 본체론에서 가장 궁극적인 존재를 일(一), 본성(本性), 천(天), 리(理)라고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나누어 설명하지 않고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체는 하나라고 하는 사고에 기반을 둔 것이다.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 그리고 도가의 선천, 불교의 만법귀일(萬法歸一)사고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고는 종교적인 신비체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적 사고에서 나오지 않고 주자학적 사고도 아니다. 이러한 체험이 대종교로 개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주시경에 따르면 궁극적 존재로부터 언어가 나오는 것이고, 그 언어는 민족마다 다르다. 우리 민족의 언어는 한글인 것이다. 한글의 독립성은 국가의 독립성에서 비롯된다.

그의 제자인 이병기는 1921년 '신단실기(神檀實記)'의 교열을 보았고, 권덕규는 '삼일신고'를 번역했다. 두 책은 대종교에서 중요한 경전이다. 최현배는 나철을 따라서 대종교의 행사에 참여했고 대종교 경전을 읽었다. 이극로는 대종교의 찬송가에 해당하는 '한얼노래'를 지었다.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은 일제 항쟁기에 한글을 옹호하였다. 엄혹한 시절에 한글을 지키기 위해서는 학문적 열정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도 있어야 한다. 단군은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단군을 조선민중에게 알리려는 계몽도 적극적으로 해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단군을 통해 좌와 우를 넘어서는 민족적인 통일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서 한국의 근대적 사고는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대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했고, 따라서 친일을 인정해야 한다거나 한국의 근대는 일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한글학자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독재정치에 항거, 남북교류의 길을 열다!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한글학회 연구위원)는 ‘해방 이후 조선어학회의 정치 지형’을 발표했다.

분단 때문에 독립유공 포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 3명(이극로, 이만규, 정열모)을 제외하더라도, 2014년 현재까지 조선어학회 선열 33인 가운데 24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다. 이를 보더라도 조선어학회 인사들의 항일 투쟁은 혁혁했다.

조선어학회의 항일투사들은 해방 이후 새 나라 건설 작업에 참여했다. 항일 투사들은 통일 민족국가 건설 운동에 참여하였고,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일부 항일투사들은 해방 이후 분단 정권의 수립을 거부하고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좌우 합작운동과 남북 협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조선어학회의 정치 지형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33명 가운데 4명을 제외하면, 좌우합작 노선의 인사(6명), 합리적 보수 인사(22명), 극우 인사(1명)로 나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조선어학회 인사의 대다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데 이바지하였다.

이인은 4·19혁명 때에 시위학생들을 1,000여명이나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고, 총에 맞아 부상당한 40여 명에게 응급 치료를 해주어 ‘학생의 부모’라는 존칭까지 받았다. 이승만의 하야와 체포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냈다. 김양수는 이승만 정권이 추진한 신국가보안법의 제정을 반대하였다. 윤병호도 이승만의 독재 정치를 비판한 민족주의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서민호는 조선어학회 인사 가운데 목숨을 내걸고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했다.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정치보복을 당하였다. 또 남북 교류를 주장한 것이 문제가 되어, 박정희 정권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두 차례 투옥되었다. 그의 선구적인 남북 교류론은 김대중이 계승하여 결실을 보았다

김윤경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3·15 부정 선거를 신랄히 비판하여 4·19혁명에 불을 붙였다. 김도연과 김윤경은 박정희 정권의 졸속한 한일협정 체결을 반대하였다.

신현모는 해방 뒤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당무부장을 역임했다.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시절에, 국회의원이 받는 보수인 세비를 제외하고 일체의 수당과 교통비를 받지 않았다. 종래에 받던 3만 환 보수를 세비와 수당을 합해 7만 환으로 올린 결의안을 국회가 통과시켰는데, 그는 여기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수당과 교통비를 받지 않고 국회에 되돌려주었다.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 공직에 나가지 않았다. 충무공기념사업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1958년 이기붕이 자신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도와달라고 하면서, 비서를 시켜 돈 10만 환을 보내왔다. 신현모는 돈을 되돌려주고 이기붕의 선거운동을 거절하였다. 이처럼 신현모는 이승만 독재 정권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호상은 1948년 10월 초대 문교부 장관 시절에, ‘한글 전용법’을 통과시켰다. 대종교 총전교를 역임했다. 1986년부터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회장으로 선임되어 한글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안호상은 1994년 3월초 베이징에서 북측 대표와 회담을 했다. 개천절 행사를 남북이 공동으로 치르기로 합의했다. 정부의 불승인(不承認)으로 그해 개천절 행사는 공동으로 개최되지 못했다. 그는 1995년 4월 14일이 어천절이어서, 이 날의 행사에 참여하려고 4월 11일에 방북했다. 그는 북한 당국에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김일성 문상을 하겠다. 둘째는 김일성대학에서 강연하겠다. 셋째는 단군릉 참배와 어천절 행사를 공동으로 치르자. 첫째와 둘째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셋째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단군릉·동명왕릉·애국열사릉을 참배했다. 같은 해 4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였다. 이처럼 그는 개천절 행사의 남북 공동 개최에 물꼬를 텄다. 이후 몇 차례 개천절 행사가 남북 공동으로 개최되었다. 그는 1999년 2월 21일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