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조선 건국 후, 2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 사회는 뿌리부터 흔들리는 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적 각성이 강하게 일어나며 성리학을 중심으로 했던 기존의 사상에 대해 새로이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 17세기 후반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의 정통적 역사인식이 강화되며 덩달아 선도적 역사인식도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는 지난 9일 국학원 주최로 대한출판문화협회 강당에서 열린 제143회 국민강좌에서 ‘조선 후기사회와 정조의 단군檀君 사상’을 주제로 강연했다.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

이날 정경희 교수는 양란 이후 조선 시대를 관통한 주요 사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우선 기존의 성리학 이념이 양란 이후 각성된 민족의식과 맞물려 더욱 강화된 측면이다. 반대로 성리학 이념과 대척점인 고유의 선도 전통이 주목된 측면이다.

성리학의 이념을 강화하는 측은 유교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기자(箕子)’의 전통을 강조하는 ‘정통론적 역사인식’으로 드러났고, 고유의 선도 전통에 주목한 측은 ‘단군’을 강조하는 ‘선도적 역사인식’으로 드러났다.

정경희 교수는 “이는 하나의 사상이 극도로 강화될 때 이에 대한 반성적 사유 또한 강화되는 현상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 국학원 143회 국민강좌

특히 정조는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후,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중심 삼으면서도 치열한 학문적 연마를 통하여 유교 외에도 불교와 도교의 전통까지 포용하는 개방적인 삼교관(三敎觀)을 보였다. 특히 정조는 직접 선도의 조식(調息) 수행까지 하며, 선도의 전통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 교수는 조선의 국왕으로서 정조가 한국 전통 선도를 수용하고 단군의 가치를 중시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조의 한국 선도 전통 수용과 단군의 위상 제고

정조는 선도제천仙道祭天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한국 선도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을 언급하는 등 고유의 선도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특히 평안도에 있는 단군묘檀君廟(숭령전崇靈殿)에 제사 지내는 것을 검토하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단군의 위상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또한,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모시는 사당인 삼성사(三聖祠)를 수리하고 제사 의식을 지내도록 지시했다.

원구단 제천 기능의 회복

조선 시대 유교를 따르며 제후는 천제를 지낼 수 없다는 논리에 따라 조선 세조 대에 원구제를 폐지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 점을 아쉬워하며 원구단(圓丘壇,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 제천 기능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선도의 제천 전통을 우리 고유의 전통으로 평가하며, 유교적 원칙을 따르면서도 천신제, 풍운뇌우제, 사직 기곡제를 강화함으로써 천제의 기능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 서울 중구 소공로에 위치한 원구단(코리안스피릿 자료 사진)

정경희 교수는 “조선 사회의 중흥기라 부를 만큼 정치·경제적으로 안정기였던 당시에 정조는 왕권 강화 이상으로 전반적인 개혁정치를 통해 새로운 조선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단순히 왕권 강화를 넘어 정조가 꿈꾼 조선은 물질적 안정을 넘어 문화·사상적으로 중국에서 벗어난 탈사대주의의 자주적 조선을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정조의 업적은 현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며 강의를 마쳤다.

한편, 국학원이 주최하고 서울국학원이 주관하는 국민강좌는 매월 둘째 주 화요일 저녁 7시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다. 다음 달 14일 열리는 국민강좌는 허성도 서울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조선후기 사회문화’를 주제로 강연한다. 역사∙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참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