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선도의 중심이 대종교였듯이 광복 이후 선도도 대종교 계열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상해임정에서 대종교계 인사들의 활약이 컸기에 광복후 새로 수립된 정부내에서도 대종교 계통 인사들의 비중이 적지 않았는데,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대한민국정부 초대부통령 이시영(李始榮),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감찰위원장 정인보(鄭寅普), 심계원장 명제세(明濟世), 국방부장관 신성모(申性模) 등을 위시하여 다수의 국회의원, 국무위원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선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되는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다. 1948년 9월 단기(檀紀) 사용이 결정되었으며 1949년에는 양력 10월 3일이 ‘개천절’로서 국경일화하였으며, 대한민국 교육이념으로 선도의 ‘홍익인간’ 이념이 채택되었다. 또한 대종교는 종단 제1호로 등록되었으며, 선도이념에 입각한 학원 설립의 노력으로 홍익대학(弘益大學), 국학대학(國學大學), 단국대학(檀國大學) 등 다수의 학원이 설립되었다. 대종교 계통 정치가들에 의해 선도이념은 정치이념화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 안재홍의 신민족주의(新民族主義), 안호상의 일민주의(一民主義)이다. 16)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그러나 이러한 성가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광복 이전부터라도 일제를 매개로 한 한국사회의 서구화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지만 광복 후에는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한국은 서구의 양대 사조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집중적으로 적용되면서,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양자의 대립점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이 되었고 결국 6·25를 계기로 남북이 분단되었다.17)

 

남북 분단 이후 한국사회에 적용된 냉전 체제 하에서 남·북한 할 것 없이 모두 선도의 민족주의 노선을 거부하였고 선도는 크게 쇠락하였다.18) 남한의 경우 정인보, 조소앙, 조완구, 안재홍, 명제세와 같은 대종교계 인사 및 신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납북이 선도 약화의 일차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외에도 냉전체제 하에서 민족주의적 정서가 금기시되었던 점도 선도 발전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남한에서 새롭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미국을 통하여 서양사상이나 종교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어갔던 이유도 컸다.

특히 미군정시기 미국은 기독교의 선교사 보호와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기독교 중심의 종교적 지형을 만들어놓았다. 개신교가 미군정의 적극적 후원하에 거의 유일한 공인종교가 되었고 비기독교 종교들은 기독교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의 기독교 우위의 종교정책은 친미반공을 국시로 하는 제1공화국으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민족주의 성향의 민족종교들의 입지는 점차로 좁아져 위축, 분열되었다.19)

서구 근대의 합리주의적 학문방법론에 의거할 때 한국선도는 원시신앙에 불과해진다. 동양사상들 중에서 불교나 유교 등 후대에 전통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상들은 그나마 동양사상 전통의 하나로 학문적으로 인정되며 때로는 서양사상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되기까지 하였던 반면 한국선도는 ‘원시 샤머니즘(무교, 무속)’, ‘민간신앙’ 등의 애매한 이름으로 격하되었다. 더우기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선도는 단군이라는 우상 숭배의 전통 하에서 나온 ‘이단종교’에 불과해진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한국선도는 상고 이래 한국사의 근간이자 한국적 정체성의 뿌리로서의 위상, 가깝게는 근대 항일독립운동의 주축으로서의 위상마저 심각하게 손상을 입을 정도가 되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전사회적으로 공유되던 선도 인식의 변화가 가시화되던 시점은 1960년대 군사정권 이후 부터이다.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1961년 12월 1일 단기를 폐지하고 서기로 변경한다.20) 연호는 단순한 연대 측정수단 이상으로 한 국가의 역사의식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기의 폐지는 선도에서 시작된 우리 민족사의 유구성과 자주성, 문화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 선도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전주곡이었다.21) 홍익사상과 개천절은 국가제도 속에 그대로 유지되나 개천절은 그 중요성과 규모가 약해져 현재에 이르러서는 국경일이기보다는 오히려 특정 종교와 관련된 날로 여겨지기조차도 한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그 위상에 큰 변화가 있었다.22)

이처럼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선도 인식 변화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단기가 서기로 바뀐 것 외에도 선도 인식 변화의 조짐을 예고하는 다른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본격 시행되면서 한국사회에서는 근대화가 일차 목표가 되면서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가치는 무시되기 시작하였고 더하여 한국전쟁 이후 격화된 남북대립의 상황으로 인해 민족문제는 이념문제의 뒤편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군사정권에서는 1966년 서울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1억원의 정부 보조금과 국민성금으로 단군전을 건립하려 했으나 기독교측와 학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1968년 현정회가 나서 사직공원 내에 작은 규모의 단군성전을 건립하였다.23) 이에 대해서는 당시 강단의 학자들도 동조하였으니 선도나 단군에 대한 다양한 인식의 차이가 가시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한편 1977년 정부에서는 단군 표준 영정을 지정하거나 전국체전시 강화도 마니산에서 성화의 채화·봉송을 지속적으로 시행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선도나 단군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극히 일관성이 없으며 애매모호한 상태이다. 우리사회는 국가제도적 차원에서 대한민국과 선도의 관계, 선도의 국가적 의미를 아직 분명하게 정리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24)

국가제도적 차원의 애매함과 맞물려 선도의 중심 세력인 민족종교 또한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광복 이후 민족종교로는 구래의 대종교나 단군교 외에도 개천교, 한얼교, 천화불교, 광명도, 용화불사, 단군마니숭조회, 단군교종무청, 단군성조수도원, 선불교 등이 끊이지 않고 등장하였고 1985년에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발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1960년대 이후 선도 관련 종교단체의 수는 줄고 있지 않으나 이들 단체의 신앙 활동은 매우 침체된 것으로 보고되었다.25) 민족종교의 수위에 자리한 대종교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민족종교는 계속 위축되어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대종교계 지식인들의 국학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특히 민족주의 역사학 방면에서 큰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대종교계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납북으로 이들의 연구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남북 분단 이후 사학계에서는 민족사학 대신 실증사학이 우세해졌고 실증사학의 학문 태도와 방법론으로 인해 식민사학에 대한 극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26)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실증사학을 주도하는 전문 학자들과 일제시기 민족주의 사학의 계승을 표방하는 재야학자들간의 대립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이른 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대립이 그것이다.27)

국사학계 내에서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대립이 두드러졌던 반면 철학, 국문학, 종교학, 민속학계 등에서는 강단의 학자들이 대종교계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선도 연구를 계승, 발전시켜갔고 그 결과 선도사상이 새롭게 ‘한사상’으로 정립되는 성과도 있었다.28) 그러나 이러한 선도 연구가 국사학계로 수렴되지는 못하였기에 국민들의 역사인식 속에서 선도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지 못하였던 점은 선도 약화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분석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시기 선도는 일제의 탄압으로 약화되기도 하였지만 민족정신의 원류로서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반면 광복 이후에는 선도나 단군에 대한 탄압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서구화 추세 속에서 선도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종교를 위시한 민족종교는 크게 침체되었으며 특히 대종교계의 민족사학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실증사학이 우세해지면서 선도에 대한 역사 인식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는 선도 쇠퇴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주.
 16) 정경희, 「한국선도와 ‘단군’」,『도교문화연구』31, pp.122-123.
17) 정경희, 「선도의 약진」,『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pp.726-727.
18) 정영훈, 「대종교와 단군민족주의」,『단군학연구』10, p.300.
19) 이재헌,「미군정의 종교정책과 불교계의 분열」,『불교정화 운동의 재조명』(서울: 조계종출판사, 2008),  pp.15-16 ;「한국 신종교 민족주의 운동의 변화와 전개」,『신종교연구』26(2012),  p.50.
20) 양승태,「연호와 국가정체성; 단기연호 해명을 위한 정치철학적 논구」,『한국정치학회보』35-4(2001).
21) 이용범,「현대 한국의 단군 인식과 민족 문제」,『동북아역사논총』20(2008), pp.64-65.
22) 강돈구,「동아시아의 종교와 민족주의」,『종교연구』22(2001), p.29.
23) 이형래,「해방후 단군인식과 현대 단군운동의 전개 」,『한국사의 단군인식과 단군운동』(천안: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06) pp.368-369.
24) 이용범, 앞의 글, pp.64-66.
25) 조흥윤,「한국단군신앙의 실태」,『단군; 그 이해와 자료』(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pp.342-345.
26) 조동걸,「해방후 한국사연구의 발흥과 특징」,『한국현대사학사연구』(서울: 나남출판사, 1998), pp.392-393.
27) 정경희,「선도의 약진」,『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pp.729-731.

[더보기] 현대 ‘선도수련문화’의 확산과 ‘단학(丹學)’ <1> 선도의 현대화,  단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