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彰義門) 은 서울 성곽의 4대문 사이에 있는 4개의 소문 중 하나로 그중 서북쪽 문이다. 처음에는 이곳이 양주와 북한으로 가는 길과 이어져 있었다. 이곳은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인조반정(仁朝反正)의 훈신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있다. 영조19년(1743) 5월 영조는 창의문(彰義門)의 누각에 임하여 정사 훈신(靖社勳臣)의 성명을 새겨 걸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후세의 임금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나다가 성조(聖祖)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 조선 도성의 4소문 중 하나인 북서문인 창의문.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박물관>

하였다.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을 말한다. 이때 공신을 정사공신( 靖社功臣)이라 하는데 사직을 다스려 편안하게 한 공신이라는 의미다.

영조는 왜 창의문에 정사공신을 새기게 했는다?  이귀 등 서인은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반군은 삼경에 창의문으로 들어가 창덕궁 앞에 이르러 마침내 반정에 성공했다. 창의문에는 이런 역사가 깃들어 있다. 영조는 창의문의 옛일을 되새기며 후세 왕들이 잊지 말기를 바랐다.

창의문은 태조5년(1396)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로는 폐쇄되어 일반적인 출입은 금지되고 다만 왕명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하였다.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수백년간 사용하지 않았고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처럼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창의문의 역사를 알아보는 전시회가 열린다.  

▲ 부암동에서 바라본 창의문 일대.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 산하 한양도성박물관은 4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창의문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2015 한양도성박물관 상반기 특별전 ‘창의문과 사람들’을 5월 29일(금)부터 8월 30일(일)까지 한양도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전시는 창의문의 인문지리적 환경과 형태적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과 창의문이 역사에 부각된 인조반정, 창의문이 주로 개방되게 된 조선후기 도성외곽 수비 체계의 강화, 창의문을 드나들었던 사람들, 그리고 1·21사태 이후 다시 폐쇄되었던 창의문을 조명하였다.

▲ 도성연융북합대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박물관>

전시는  창의문의 인문지리적 위치와 형태적 특징을 보여준다. 
창의문 그림과 지도를 통해 창의문의 입지를 알아보고, 창의문의 형태 특성을 알 수 있는 창의문 실측 조사 도면과 세부 사진이 전시된다. 또  성문 축조 과정을 3D 영상으로 제작하여 성문의 육축과 문루가 건축되는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창의문’, ‘대일항쟁기 창의문' 부분에서는 인조반정과 조선후기 도성외곽 방어체제의 정비, 창의문을 드나들었던 사람들을 통해 창의문의 바깥 지역을 소개한다.
 창의문이 역사에 중요하게 등장한 대표적 사건인 인조반정을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상영한다. '연융대도’, ‘도성연융합도’ 등의 대형 그래픽을 배경으로 18세기 도성방어를 위한 요충지로 주목 받은 창의문 바깥 지역사를 부각시킨다.

▲ 인조반정 공신 현판.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박물관>

 일반인들과 물자를 실은 상인들이 주로 드나들었던 다른 도성문들과 달리 총융청·평창 등 군사시설의 관료와 군인, 조지서의 관료와 장인匠人, 유람하는 양반, 제지업과 포백업에 종사하는 주민들 등 창의문을 드나들었던 사람들을 통해 창의문 바깥 지역의 입지를 살펴 볼 수 있다. 
북한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홍제천이 흐르는 이 지역 맑은 수석(水石)의 풍광, 특히 세검정 일대의 경치는 조선 초기부터 손에 꼽히는 절경으로 문객들의 발길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제지업(製紙業)과 포백(曝白)의 본원이 된 배경이었다. 대일항쟁기에  이곳에는 제지와 포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이곳의 경치, 특히 가을철 단풍을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대표적인 하이킹 코스로 소개되었다.

남북분단으로 창의문도 고난의 역사를 걸었다.  1·21 사태 이후 창의문 앞에 고가도로가 놓이고 수도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성곽을 따라 철조망이 둘러쳐졌다. 창의문 지역에 대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다가 1993년에야 시민들에게 개방되게 된다. 
대한뉴스 영상, 스카이웨이 공원 조감도 등을 통해 1·21 사태 이후 서울과 창의문 지역의 경관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지도와 사진으로 창의문 주변 지역의 변화를 살피고, 창의문과 인근지역에서 찍은 사람들의 사진을 전시한다.

▲ 장동팔경첩 중 창의문(국립중앙박물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박물관>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建隆 6)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는 기록이 나왔다.

 관심있는 시민들은 누구나 무료로 관람 가능하며, 자세한 정보는 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museum.seoul.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박상빈 한양도성연구소장은 “한양도성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작업의 일환으로 창의문에 얽힌 이야깃거리들을 모아서 엮어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