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사진=윤한주 기자)

역사는 사관의 이야기라고 한다. '승자의 역사인가',  '패자의 역사인가' 에 따라서 전혀 다른 역사를 배우게 된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장수,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김부식의『삼국사기』는 왕을 시해한 무도한 인물로 묘사한다. 하지만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연개소문이야말로 우리 4000년 역사 이래 제일로 꼽을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은 국학원 주최로 12일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강당에서 열린 제142회 국민강좌에서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를 주제로 강연했다. 김 위원은 연개소문이 등에 다섯 가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는 기록에 주목했다.

“지금까지는 ‘연개소문이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중국의 경극 가운데 ‘독목관(獨木關)’이 있다. 여기서 연개소문은 ‘날아다니는 칼(비도飛刀)’, 곧 비도술을 사용하는 장수로 묘사된다.”
 
김 위원은 연개소문이 비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출중한 무술 실력 때문이라고 봤다. 작은 단도가 아니라 웬만한 사람 같으면 한 손으로 들기도 어려울 묵직한 칼을 던진다는 것은 여간한 완력과 무술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상상할 수 없는 가공할 무기인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천자의 제국으로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기병, 보병, 궁수, 도부수, 군악대, 의장대 등 다양한 병사들의 장비와 무장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사서는 고구려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했다. 먼저 『후한서』 ‘동이열전-고구려전’을 살펴보자.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기력이 있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며

이에 대해 김 위원은 “고구려인들이 특별히 싸움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라며 “고구려 시조 주몽은 물론 유리왕, 대무신왕, 모본왕, 태조왕 등 초기 왕들은 모두 정복군주였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후한의 군현들을 공격하고,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다물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삼국지』 ‘위서동이전-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데, 이처럼 앉아서 먹는자(좌식자坐食者)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곡식·소금·생선을 운반해 그들에게 바친다.

김 위원은 “중국인의 눈에는 앉아서 먹는 존재로 보였지만 이들이야말로 전문적인 전사집단인 것”이라며 “이들은 고구려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으면서 외적이 침략하면 나아가 목숨을 바쳐 고구려의 안전을 지키는 존재였다”라고 말했다.

▲ 12일 제142회 국민강좌가 열리는 가운데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이 발표하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특히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는 말을 탄 용사가 앞으로 사격을 하지만 몸을 뒤로 돌리고 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는 말 안장 밑에 다는 발 받침인 ‘등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등자는 유럽에서 8세기경에나 보편화되었다. 등자가 있으므로 기병들은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자세로도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유럽에서는 파르티아사법이라고 불렀다.

또 고구려의 천하관은 중국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자신의 나라를 중화(中華)로 격상시켜 주변 여러 민족을 오랑캐로 격하했다. 중국이 주변 이민족들을 남만(南蠻), 북적(北狄), 서융(西戎), 동이(東夷)라며 사이(四夷)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을 중국인이 규정한 ‘동이’가 아니라 ‘천하의 주인’으로 인식했다.

김 위원은 “중국 역대 황제들이 써온 천자라는 말을 시조 주몽부터 ‘천제의 아들’이라고 사용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라며 “고구려인들의 이런 천하관은 광개토태왕비와 모두루묘지 뿐만 아니라 중원고구려비에도 하늘을 지킨다는 뜻의 ‘수천(守天)’이란 용어로 나타나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143회 국민강좌는 내달 9일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를 초청해 ‘정조의 단군사상’을 주제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