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의 독립운동가 안경신 선생(자료=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안경신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5월 한 달 동안 안경신의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연다. 안경신의 독립운동 스토리를 만나본다.

1888년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평양여자고등학교 2년을 수료한 후 귀향했다가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의 서소문동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평양지역 3․1 운동은 3월 9일까지 지속되는데 이 기간 일본 경찰에 검거된 인원이 약 400명이었다. 안경신은 이때 만세운동 가담으로 체포되어 29일간 구금되었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 6월 대한애국부인회 강서지회가 일제에 발각되면서 전원 체포되었으나 안경신은 체포되지 않았다. 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의 체포로 조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선생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 대한애국부인회 검거문서에 기록된 안경신 선생의 본적과 나이(자료=독립기념관)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군사 조직인 대한광복군 총영 활동에 참여했다.
 
대한광복군 총영은 1920년 7〜8월 중 미국의원 시찰단 방문시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고자 총 3개 대로 인원을 파견하여 국내 폭탄 거사를 준비했다.
 
안경신은 제 2대에 소속되어 중국에서 비밀리에 폭탄을 직접 소지하고 평양으로 잠입했다. 평양지역 의용단과 함께 1920년 8월 3일 밤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등에 폭탄을 투척하여 평남도청 제3부인 평남경찰부 건물 일부를 파괴했다. 의거 당시 임신한 상태임에도 거사를 진행했다. 1921년 3월 20일 경찰에 체포되어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 안경신 선생 체포를 보도한 1921년 5월 10일자 매일신보(자료=독립기념관)
 
안경신의 사형 소식이 상해 임시 정부에 전해지자 김구와 장덕진 등이 탄원서와 석방 건의문을 보내 10년 형으로 감해졌다. 
 
그런데 안경신은 "조선 사람이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냐"라며 재판장을 꾸짖고 당장 석방하라는 불호령을 내려 간수가 가까스로 형무소로 송환했다.
  
출옥 후 안경신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핏덩어리를 안고 형무소로 잡혀갔던 안경신의 출옥 후 생활은 물론 사망 연도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