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지명과 그 위치를 연구하고 그것에 근거한 강역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 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갈석은 현 하북성 영평부로, 발해는 현 발해만 인근으로 부여와 연나라 고죽국 등이 하북성 동북부에 군거(群居)했던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즉 시대에 따른 지명의 위치 변이(變移)를 고려하지 않은 해석에 의해 서로 다른 결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그대로 역사관에 반영된다. 특히 사료가 많지 않은 고대사인 경우에는 이러한 역사지리적인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고대지명 중 국호이기도 한 발해의 의미와 위치에 대하여 시대별로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

▲ 민성욱 박사
발해의 위치를 시대별로 그 위치 변화를 살펴보면, 우선 이른 시기의 발해가 기록된 사서로『회남자』「천문훈」에 유성이 떨어져 발해의 둑이 터졌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사기』「고조본기」에 기록된 제(齊)나라의 위치는 그 남쪽에 태산이 있으며 서로는 탁하(濁河)로 그 한계를 하고 북으로 발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사기』「조선열전」기록에서는 발해에서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가 군선을 띄워 5만의 병력으로 요동을 공격하여 조선왕 우거를 살해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요동지역은 지금의 요동지역과 같은 지역이었을까?

그 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대에는 요동과 요서지역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동과 요서지역을 나뉘는 경계는 요수(遼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요수는 중국 내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동쪽 경계를 의미하였다. 그래서 고대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고, 난하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여 지금의 요서지역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지금의 요동은 현재 요하를 경계로 동쪽 지역을 의미한다. 이렇듯 고대 지명은 역사의 주체에 따라 이동하였고 변화 하였다. 이것을 간과해 버리면 역사의 중요한 요인을 놓칠 수 있다.

『사기』에 기록된 제(齊)와 연(燕)의 위치와 관련된 수계인 탁하(濁河)는 산서에서 발원하여 하남으로 동류하여 유입되는 탁장하(濁漳河)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수경주(水經注)』는 탁장하는 발해 부성현(阜城)과 동창(東昌)의 동쪽 즈음에 있는 것으로 기록 하였으며 청하(淸河)는 탁장수와 남북으로 위치하여 동남으로 흐르는 방향이 같은 청장수(淸漳水)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한서』「지리지」에서 발해군에는 부성현과 동평서(東平舒)가 속해있으며 거마하(拒馬河) 역시 동으로 발해에 흘러 동평서현(東平舒縣) 북쪽으로 흘러들어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서』「지리지」, 『사기』「화식열전」, 『사기』「정의」, 당나라 재상 두우가 저술한『통전』「주군전」, 『괄지지』, 『수경주』 등 여러 지리지의 기록을 종합하면 시대에 따라 위치에 변화는 있었지만 고대에는 탁장하(濁漳河) 및 청장하(淸漳河)가 동류하여 발해에 주입되며 심수(沁水), 요수(潦水), 호타하(滹沱河)등이 발해에 인입되었다. 또한 발해는 거록택(鉅鹿澤)과 연결되어 이후 황하로 흘러 들어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대 발해는 이러한 여러 수계들이 모여 거대한 호수가 형성된 후 황하로 흘러들어가는 산동성 대야택(大野澤)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대청광여도』(청,1785)를 참고하면 요·심·분(遼·沁·汾) 및 장하(漳河)의 하수(河水)가 최종적으로 모여들어 황하가 북동류 하는 하남 복주(濮州) 지역과 산동 동창부(東昌府)를 아우르는 거대한 지역이 대야택(大野澤) 즉 고대 발해지역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서 및 지리지 내용 등을 예로 들어 기술한 대야택(大野澤) 지역이 전국시대 연(燕)나라가 존재했던 발해로 결국 후대의 발해군(渤海郡)으로 개명되었음이 확인된다.

이로서 『사기』「화식열전」에 기록된 “연나라는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있으며 부여(夫餘)가 연나라의 북쪽에 위치하였다”는 내용에 부합하는 연나라 위치는 고대 발해인 산동 거야택(巨野澤 혹 大野澤) 지역과 갈석인 산서성 택주(澤州)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역도원이『수경』에 주를 붙인『수경주』를 해석한 『해경신탐』에서 “고대 발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형의 변화로 물이 줄어들었지만 당시에는 산동 거야택과 황하가 만나는 호수이며 당나라 때에는 남북 3백리 동서 1백리로 대야택(大野澤)이라고도 불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화식열전」으로 부터 부여는 조선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연나라의 위치를 추정하는 지리적 키워드인 갈석과 발해는 산서성 남동부에 위치한바 조선은 자연스럽게 그 동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나라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연나라 동쪽에 위치한 나라가 고조선이고, 고조선의 거수국인 부여가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 국가의 서쪽 경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당서』「고조본기」 무덕 7년(624년) 정월 조, “고려왕 고무를 요동군왕으로,백제왕 부여장을 대방군왕으로,신라왕 김진평을 낙랑군왕으로 봉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삼국의 원래 지역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된다. 고구려는 원래 요동(지금의 요하지역)에서, 백제는 대방(지금의 대릉하 지역)에서, 신라는 낙랑(지금의 난하지역)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이 그 이전의 역사를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책봉하였던 것이다. 후대인 고려 왕건은 현도군왕으로 책봉한 것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그 출신 지역이 요동지역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대조영을 발해군왕을 책봉한 것은 그 출신 지역이 지금의 발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발해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고대의 발해는 지금의 발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내륙에 있었으며, 고조선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분포하고 있었던 지금의 산동 거야택과 황하가 만나는 대야택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비록 당나라 황제에 의해 책봉되어진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라고 할 때 책봉 이후에 동방의 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대진국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되는 발해를 국호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학은 역사의 진실을 밝혀 나가는 학문이다. 앞으로 우리 역사학이 가야할 길은 자명하다. 기존의 편견이나 선입견은 버리고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잊혀진 우리 역사인 발해사를 오늘에 되살려 온전하게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