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해 멸망 후 고려의 발해 계승의식을 심층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발해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역사 계승의식은 특정 집단이 내부적으로 동질성을 체감하는 한편,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인식하는 근거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발해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수만에 이르는 발해 유민의 흡수와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리고 고려의 종적에 붙인 사실, 일부 발해문화의 고려전승 및 영토의 흡수에서 약간의 근거를 더 찾을 수 있다.

▲ 민성욱 박사
한국사에서 가장 컸던 나라지만 우리가 가장 잘 모르는 나라가 발해이기도 하다.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의 사관으로 발해를 무시했고, 대일항쟁기 때에는 일본의 관변 사학자들이 주장한 ‘만선사관’에 막혀 발해사는 고구려사와 더불어 만주사의 일부로 변조되었다. 중국은 이른바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 유적지에 철의 장막을 쳐 놓고 발해가 당나라의 변방 소수 민족인 말갈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당나라와는 무관하게 말갈족이 세운 극동의 첫 독립국가라고 해서 은근히 영유욕을 내비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학계에서는 독립국가이기는 하지만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라는 ‘이중 구조설’을 주장하면서 한국 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말갈과 발해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함으로써 말갈과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로 재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각 국가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발해사를 인식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도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다.  그러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인식하고 있다. 발해의 영토는 중국, 북한, 러시아 등 3개국에 걸쳐 있다. 발해관련 유적 및 유물 발굴조사도 해당 국가에서 진행하는데, 한국은 러시아와 공동으로 주로 연해주 지역의 발해 유적 및 유물 발굴조사에 일부 참여하고 있다. 분명 고고학적인 성과도 중요하지만 역사인식부터 제대로 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발해에 관한 자료는 대개 중국의 자료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중국의 시각에서 발해와 말갈을 바라보게 된다. 중국의 시각에서 보면 결코 한국사로 보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는 발해와 말갈에 대해서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발해사를 한국사로 볼 것인가 말 것인가의 핵심은 말갈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관건이다. 발해 건국의 주체는 고구려 계승을 목적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들 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말갈에 대해서는 이미 선입견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민족으로 여기거나 우리 민족과 어느 정도 관계는 있다고 인정하지만 왠지 우리 민족의 범주에 넣기에는 망설이거나 주저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전환이 있기만 한다면 발해사를 온전하게 한국사에 편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고자 할 때 결국 발해인들의 역사인식은 어떠했는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러한 인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가장 먼저 한 것이 역사서 편찬이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한다면 당연히 고구려 역사를 써야 되는 게 맞다. 그런데 대조영은 동생 대야발에게 시켜서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서를 편찬하도록 한다. 이러한 내용은 대야발의 저서인 『단기고사』의 서문에 잘 나와 있다. 그 서문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생각하기로는 , (중간생략) 오직 임금께서는 타고난 영특하고 늠름한 자태로써 의 계통을 이어 천하의 살만한 곳을 정하시고, 황상을 드리워 입으시며, 천훈의 경급(瓊笈)(하늘의 가르침을 적은 것을 보관하는 상자)과 신한(宸翰)(임금이 친히 쓴 문서나 편지)의 보찬(寶贊)(거룩한 찬사의 글)을 받들어 모을 때에, 신에게 명을 내리시어 서문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이해에 또 말씀이 계셔서 『단기고사』를 편찬하라 하시니, 신은 황공히 그 말씀을 받들어 사해에 널려 있는 사서를 수집하고, 여러 역사적 평론을 참고하여 의심되는 것은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하여 13년이 걸려 비로소 완성하였으니, 오호라! 이 글이 어찌 우연히 되겠습니까. “대개 신조단제(神祖檀帝)와 기자로부터 고구려에 이르도록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었으며, 성조(聖祖)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랜 세대를 하나의 계통으로 혁혁하게 신정(神政)이 일체가 되어 , 천하를 다스리는 큰 경륜과 법이 이 책에 실려 찬연히 세상에 밝게 비치니, 얕은 소견과 적은 지식으로는 감히 이 깊은 학문의 뜻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중간생략) 신이 명을 받은 지 13년 동안 주야로 근심과 걱정을 하며, 부탁을 어길까 두려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석실에 있는 장서와 옛 비와 흩어져 있던 사서를 참고하다가 돌궐국에 까지 두 번 들어가 고적을 탐사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 원본은 임금께 올려 목판에 글자를 파서 국서고에 두고 또 그것을 베껴서 백성을 가르침으로 국민의 역사의식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왔습니다. 천통(天統) 31년 3월 3일 반안군왕 신 야발은 명을 받들어 삼가 서문을 쓰나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ㆍ러시아 공동으로 발해 및 말갈 유적ㆍ유물 조사를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 실시해서 많은 성과가 있었다. 여기서 검토가 필요한 것은 과연 그 유적 및 유물이 발해 혹은 말갈의 유적ㆍ유물이 맞는가와 맞는다면 한반도 및 만주지역에서 언제 어떻게 연해주 지역까지 이동 하였는가 이다. 발해 및 말갈관련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볼 때 말갈이 유목민으로서의 특성을 갖고 있고, 시ㆍ공간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면 다른 북방 제 종족들과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그 중 일부가 현재의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발굴되는 말갈 유적 및 유물은 원래 말갈의 고유한 형태라기보다는 다른 종족과 융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국학이라는 관점은 우리 역사의 주체적 수용과 인식을 그 바탕으로 한다. 또한 역사를 통해 정신을 읽어내고 그 정신을 통해 진정한 한국인들의 삶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개인과 민족이 자존감을 회복한다면 인류애를 바탕으로 홍익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함을 확인할 수 있다.
발해를 중심으로 위로는 환인, 환웅, 단군조선을 거쳐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지고, 아래로는 고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왔다. 이것은 강대국들과의 관계에서 몇 차례 어려움도 겪었지만 한민족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 온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장엄한 역사를 갖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는 조상들이 위대했고 내 존재가 소중하며 우리의 가치가 존엄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지금보다 좀 더 민족적 자존감이 커질 것은 당연하며, 나아가 대한민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정신문명 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옛 발해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사를 바라볼 때 과거형의 민족 감정으로 바라보지 말고 미래형의 포용과 이해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민족적 정서인 한과 흥에서 오는 깊이와 높이를 살려 때로는 종교와 이념을 넘어, 또 때로는 경제, 군사, 영토 등의 갈등에서 벗어나 오래된 미래인 우리 역사를 통해서 발현된 정신문화를 오늘에 되살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