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을 맞아 조국 광복과 대한민국 탄생의 초석이 되었던 독립운동을 국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포럼이 열렸다.

한민족원로회(공동의장 이수성, 김동길)는 지난 12일(목) 저녁 7시 세종문화회관 예술동 1층 예인홀에서 김호일 중앙대학교 명예교수(전 독립기념관 학술원장)를 초청해 제10차 한민족미래포럼을 개최했다.

▲ 지난 12일 열린 제10차 한민족미래포럼.

김 명예교수는 '독립운동을 통해 본 국학-백포 서일(白圃 徐一)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한국독립운동사를 재조명했다. 백포 서일은 북로군정서 부대를 이끌며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승리해 당시 암울했던 대일항쟁에 길을 열었던 지도자다.

김호일 명예교수는 1876년 개항 이후 독립운동사를 크게 4가지로 설명했다.

무기를 직접들고 일본 제국주의와 무장투쟁했던 '독립전쟁론', 국제사회에 우리의 상황을 호소하고 도움을 받아 자주독립을 해보자는 '외교독립론',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실력을 양성하자는 '실력양성론', 1920년대 이후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형태를 인정하면서 실력을 키워 독립을 쟁취하자는 '자치론'이다.

일제는 의병을 토벌하지 않고는 합방할 수 없다는 의도 하에, 1908년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인다. 특히 한일병합이 되던 1910년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 전라도 지역은 약 40일 동안 4천 명 이상이 체포 또는 사망했다.

김 명예교수는 “한일병합 이후 많은 의병들이 만주로 근거지로 옮겨 항일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자주적 독립을 하려고 해도 국제적 영향으로 쉽지 않은 여건인 안타까운 상황”이라 말했다.

▲ 김호일 중앙대 명예교수(전 독립기념관 학술원장)

최근 무장항일투쟁의 지도자로 백포 서일(白圃  徐一)이 주목받고 있다. 백포 서일은 북로군정서 부대를 이끌며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승리해 당시 암울했던 대일항쟁에 길을 열었던 지도자다.

김호일 명예교수는 이날 포럼에서 백포 서일의 생애와 주요 활동 및 그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백포 서일은 1881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1890년 김노춘 선생에게 한학과 주역을 배웠다. 1902년 함경북도 경성군 함일학교를 졸업한 후, 1910년까지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에 종사했다.

그러나 1911년 한일병합 이후 만주로 망명해 청일학교(靑一學校)와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해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교육구국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홍암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다.

서일은 1911년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해 단장에 추대된 이후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시작한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재편성해 그해 8월 김좌진, 이범석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결성한다. 이를 무장단체로 훈련시켜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4일 동안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다.

그후로도 소련과 만주로 이동, 10여 개 독립군 부대를 통합해 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재로 추대된 뒤 항일 독립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한편, 지난 2013년 7월에 발족한 한민족원로회는 이수성 전 국무총리, 김동길 태평양시대위원회 위원장이 공동의장을 맡고, 정치, 경제, 교육, 법조, 언론, 문화 등 각 분야 100여 명의 원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원로회 미래포럼’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과제에 대한 정책제안을 위해 격월로 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다음 행사는 5월 21일 우리나라 상고시대 유물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강원도 춘천에서 고적 및 유적 답사를 진행한다.

글, 전은애 기자 ㅣ 사진. 한민족원로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