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국邾國과 주국도문邾國陶文. 주국은 추국鄒國이다. 고주몽을 주국 출신으로 볼 수 있다. 고주몽을 추모왕이라 하였다. 추국 출신의 왕이라는 뜻이다.

나는 부천역에서 내려 와우고개 길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혈압이 갑자기 떨어질 때처럼 잠깐 머리가 어찔하였다. 이런 순간이 오래 지속되면 넘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근화가 내림굿을 할 때를 기억하는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근화가 내림굿을 한지가 언제 인데 감응신령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그런 것을 묻고 있다. 
 
“기억합니다.”
“그때 한인천제가 오셨는가?”
“오시지 않았습니다.”
 
감응신령은 엉뚱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산신각으로 가서 감응신령과 좀 더 대화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가지 않고 시흥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와우고개를 넘어가 산신각 입구에서 내렸다. 산신각까지 가려면 300여m는 착실히 걸어야 하였다. 
 
100m쯤 갔을 때 백마장군이 점박이 흰 말을 타고 은월도를 비껴들고 산신각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었다. 백마신장이라면 조선 초기에 마가의 수장이었던 분이다. 중여곤이 그분이다. 이 시간에 무슨 이유로 백마신장이 그곳에 와 있는지 궁금하였다. 
 
저녁시간이라 날이 저물어가고 있는데, 이 늦은 시간에 산신각에서 고사를 지낼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혹시 누가 고사를 지내고 있습니까?”
 
내가 절을 하고 물었다.
 
“고사를 지내야 해. 고사가 필요해.”
“누구를 위해서요?”
“감응신령을 위해서.”  
 
산신각에 무엇인가 중대한 사단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요?”
“낸들 아나? 감응신령을 모시는 천신동자가 와서 말 한마디 던져주고 가서 내가 왔어.”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보지요.”
 
나는 백마신장 곁을 떠났다. 등에서 땀이 났다. 산신각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산신각 안으로 들어갔다. 산신상과 동자와 동녀상과 백호신상을 보자 신명이 떠나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빛이 죽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산으로 가셨나?”
 
나는 성령감응을 3번 외쳐 감응신령을 불러보았다. 내게 청동팔주령이 없으니 감응신령이 나타나 주지 않았다. 나는 비류에게 핸드폰을 걸었다. 당장 물어볼만한 사람이 그 밖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 그가 산신각에 있고 싶다고 하여 레이 Society 연수원 사이를 오가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거리며 달려왔다. 
 
“감응신령께서 산신각을 떠나신 것 같은데 어디로 가셨는지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었습니다.”
 
감응신령과는 상의하여 처리할 일이 많은데 산신각을 떠났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감응신령이 가서 계실만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관음사에 가 보십시다. 지금 감응신령이 가실만한 곳은 그곳입니다.”
 
백마신장은 아직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가자.”
 
백마신장이 말했다. 백마신장과 감응신령은 단군왕검이라는 한 몸에 붙은 손과 발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두 분은 고사 때마다 붙어 다녔다. 단군왕검은 검은 시루에 흰 떡을 찌면 나타났고, 백마신장은 북어와 타래실을 함께 놓으면 나타났다. 우리는 관음사에 있는 산신각으로 갔다. 관음사의 산신각은 관음전의 뒤 쪽에 있었다. 산신각에 가니 신명들이 모두 그곳에 와 있었다. 죽어있던 신상들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살아난 것이다. 
 
“왜, 갑자기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내가 산신의 형상을 하고 있는 감응신령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도부신인이 태어나려면 내가 와서 있어야지.”
 
그러나 아직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임신한 여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도부신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회복의 의미가 있지.”
“훼손된 우리 역사를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를 원하지 않는가?”
“역사가 회복된 다음에라야 메시아가 올 수 있다고 봅니다.”
“옳은 말이군.”
“우선 미추홀彌鄒忽를 회복합니다. 그렇다면 미추홀의 지명이 생긴 진짜 위치는 어디일까요? 인천시청에서 발표한 「인천의 지명을 소개하는 글」에 미추홀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천에서 미추홀이라는 지명을 찾으려 한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당연히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산동반도를 떠난 모국 사람들이 소래산 앞을 지나서 성주산을 넘어가 지금의 부천 땅에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을 세웠습니다. 모국에서 온 사람들과 탁수涿水(탁록涿鹿)에서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우체모탁국이었습니다. 우체모탁국의 모牟자가 후대에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鄒牟王의 모牟자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주(추)국에서 소래로 들어온 고주몽 일족이 삼한시대에 우체모탁국에 살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추모왕의 추모는 추국 출신으로 모국을 세워 왕이 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체모탁국이 있었던 부천에서 고주몽인 추모왕을 찾았다는 것은 획기적인 발견입니다. 그런데 비류왕과는 어떻게 연결시킬 것입니까?”
“인천광역시의 남동구 만수동에서 부평구 일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비리고개(비류고개)라 하는데, 이 고개가 백제를 세운 온조의 형인 비류가 넘어간 고개로 전해 옵니다. 비류가 문학산에서 비류국을 세웠다고 전해 오기도 하는데, 이곳은 부천과 소래와 인접한 곳입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6년 발간 1760)에는 인천의 문학산성文學山城을 미추왕고도味鄒王古都라 하였습니다. 미추왕의 옛 도읍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 “비류가 도읍하던 곳”으로 명기하였습니다. 고구려에서 미추홀을 매소홀로 개명한 것으로 보아서, 이곳이 소서노가 추모왕에게서 사들인 땅 매소홀買召忽의 일부였을 것으로 봅니다. 소서노가 이곳에 그의 대리자로 비류를 임명하고, 온조를 데리고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지경을 넓히며 옮겨 갔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합니다. 지금은 소래의 일부를 시흥시(소서노가 소래에 상륙했을 당시에 군포, 안양, 영등포, 서초 일대를 포함하여 잉벌노仍伐奴라 하였습니다)가 관장하고 있는데, 당시에 시흥을 포함한 주변 일대의 지명을 잉벌노仍伐奴라 했던 점으로 보아서, 미추홀을 추모왕으로부터 매입한 소서노가 온조와 함께 토착세력을 정벌해 나가면서 그가 인솔한 백성들을 살게 하여 잉벌노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잉仍자는 人+乃자로 ‘이어 사람을 살게 하다’는 뜻으로 풀이가 가능하고, 벌伐자는 소서노가 토착민을 토벌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노奴자는 소서노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잉벌노는 ‘소서노가 정벌하여 얻은 땅’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서노는 토착민을 정벌하며 하남 쪽으로 갔고, 비류는 이곳에 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결론을 내렸다.
 
“역시 거리검 선생의 역사추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비류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비류 선생을 비류왕을 추대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비류국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대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겠지만 이해가 문제이겠지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당하긴 하지만 이곳에 왕국을 하나 세우면 국가멸망시계가 그 왕국에 귀속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먼저 비류 선생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소래에서 노숙인 생활을 오래 하셨으니까  생각해 두신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시흥시장을 움직이면 됩니다.”
“국가반란을 꾀하자는 말인가요?”
“그게 아니라 축제 때 비류왕 대관식戴冠式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부하를 회복하는 것은 그 다음에 비류왕이 하면 됩니다.” 
 
문득 부하에서 비류왕 대관식을 축하하러 사절단이 조공물朝貢物을 가지고 오는 광경이 떠올랐다. 소래포구에는 해산물을 팔기 위하여 매년 10월 중순에 4일 동안 축제를 해왔다. 상인들이 해온 먹고 마시는 의미 없는 축제였다. 횟집들이 하는 축제라 역사축제 문화축제와는 번지수가 다른 축제였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하여 벌이는 축제라 할 수 있었다.  
 
비류왕 대관식은 장사하고 먹고 마시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는 이곳 사람들에게 역사 문화를 보는 눈을 뜨게 할 것이다. 
 
“부하를 살리려면 소래가 무슨 의미인가를 먼저 밝혀내야 합니다. 현재 소래의 역사를 역사서나 고고학적 유물에서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이미 다 해결되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부하를 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노래를 하나 지어서 축제 때 부르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가사를 하나 지었다.
 
소래찬가 
 
東海濱에 모여라 馮夷族 / 해마지 북 울려라 조이족 / 船上祭를 지내라 풍이족
개마국으로 떠나자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소도를 접어라 동이족 / 아사달 접어라 동이족 / 황하로 배 저어라 동이족
웅심국으로 떠나자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새 나라의 소벌도리 / 새 소도의 소벌도리 / 새 河伯은 소벌도리
하백을 찾아 떠나자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새 아사달 동이족 / 새 아사달 래이족 / 새 아사달 풍이족
삼한으로 떠나자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三韓의 시작은 蘇萊 / 馬韓의 시작은 蘇萊 / 弁辰의 시작은 蘇萊
소래로 떠나자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