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기차역사는 고색창연했다. 건물에서 역사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승객들이 기차를 이용하는 정문을 지나 왼편으로 가니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나온다. 귀빈실을 개조하여 만든 기념관이라 크지는 않다. '안중근의사기념관' 현판을 녹색으로 썼다. 여권을 꺼내 기념관에 전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왼편 벽에 안중근 의사의 유필이 8개가 나란히 걸려있다. 맨 앞 유필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가 눈에 크게 들어온다. 글씨 옆에 단지한 손도장이 눈에 익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ㅡ안 의사는 평생 국가 안위에 노심초사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필을 연구한 다카하시 고준(高橋公純)은 이 유필은 경술(庚戌) 1910년 3월 여순(旅順) 옥중에서 써서 야스오카 검찰관에게 준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국인 안중근의 유필에서 배우다’ 에코브리드, 2011). 원본이 보물로 지정되어 국내 안중국의사기념관이 소장하니, 이곳에는 복사본이리라.

▲ 하얼빈 기차역사에 새로 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

두 번째 유필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 유필 앞에서는 가슴이 떨린다. 이 여덟 글자는 순국하기 5분 전에 쓴 글이다. 5개월간 자신의 전담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주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털끝만큼도 흔들림이 없었다는 것이 글씨에 그대로 드러난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나오는 말이다. 자로(子路)가 성인(成人)에 관해 묻자 공자(孔子)는 “이익을 보게 되면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오래 전에 약속한 말을 잊지 않는다면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맨 마지막이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ㅡ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
▲ 하얼빈기차역사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들어가 입구 왼편에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필을 전시한다.

유필 맞은편에는 안중근 의사 흉상이 있다. 유필을 지나 기념관 서언(序言)을 한 자 한 자 읽었다.
“19세기 중엽부터 군국주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은 점차 조선반도를 병탄하고 중국 동북을 점령하고 나아가 전반 중국을 정복하고 아세아의 패주가 되려는 '대륙정책'을 제정하고 중국동북과 조선반도를 침략의 제일목표로 삼았다. 1894년 갑오전쟁 후 일본이 조선반도를 침략하는 보폭을 다그치니 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기에 이른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박하여 '일한보호조약'(흔히 말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한성(지금의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조선반도에서 온 항일의사 안중근이 하얼빈 기차역에서 당시 일본추밀원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사건은 세계를 경악케 하였다. 하얼빈지방사에 중대한 력사 사건으로 기재된 이 장거는 당시의 일제침략항쟁과 반파쇼투쟁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주은래 총리는 "중일 갑오전쟁 이후, 본 세기초,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였다. 양국 인민이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중국 려순에서 일본점령당국(즉 '일본관동도독부지방법원')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넘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안중근 의사를 기리고 추모하였다. 하얼빈역은 력사 사건의 발생지로써 많은 관심과 조명을 받아왔다. 사건발생의 력사 현장에 기념관을 설립함은 사람들에게 아픈 력사를 기억하고 오늘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보다 아름다운 미래를 지향하게 하는 데 그 취지가 있다.”(序言)

일제침략항쟁과 반파쇼투쟁에 심원한 영향을 주고 한중 양국 국민이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공동투쟁으로 중국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보고 있다. 기념관 설립을 통해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오늘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보다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뜻을 알렸다.
서언을 읽고 곧바로 창가로 가서 의거 현장을 보았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지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 위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사건 발생지. 1909. 10. 26”라고 쓴 중국어 안내 글이 선명하다. 이 기념관이 문을 열기 전에는 거사 지점을 보기 위해 다른 곳에서 기차를 타고 와서 개찰구를 빠져나가기 전에 잠깐 보았다고 임찬경 박사는 말한다. 기차를 타지 않으면 역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전시물은 안중근 의사의 가계도와 함께 안중근의 가정, 교육, 신앙을 중문과 한국어로 적었다. 안중근 의사의 부모 안태훈과 조마리아는 슬하에 3남2녀를 두고 있었는데 안중근은 장자였다. 안중근이 태어나면서 배와 가슴에 검은 점 7개를 갖고 있어 자를 응칠이라 하였다. 성장과정을 소개하고 애국운동과 구국교육운동에 투신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안중근 의사는 1906년 가산을 다 팔아 삼흥학교(三興學校),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에 투신한다.
안중근은 국권회복을 위한 긴 여정에 나섰다. 그는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항에 와서 다시 배로 원산, 청진, 회령을 거쳐 도문강을 건너 중국 연변지역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한일들이 많았으나 일본 통감부의 감시가 심했다. 하여 안중근은 다시 러시아 원동지역으로 향하였다. 이어지는 전시는 하얼빈의거.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크게 소개한다.

▲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역사의 현장을 기념관 안에서 볼 수 있게 하였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과 엄인섭 등 11명의 동지들은 연추에서 집회를 가졌다. 회의에서 안중근은 의병운동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자신의 왼손 무명지의 한 개 관절을 자른 후 피로 '대한제국' 국기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다. 이어서 다른 동지들도 연이어 손가락을 절단하여 피로 서명하였다. "필히 힘을 다하여 대한독립을 도모할지어다. 이 약속을 어길 시에는 설사 벼락이 떨어져 온몸이 불타고, 오족이 연루된다 할지라도 원망아니하리". 열두 명은 이렇게 맹세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안중근을 맹주로 추천하였다.”
단지 동맹 열두 명의 명단과 그 때 쓴 맹세의 글이 사진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대한의사안중근공혈서’.
하얼빈의거를 소개하는 전시물은 날짜순으로 정리되었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의 열하루. 1909년 10월23일 하얼빈에 도착한 날부터 11월 1일 여순으로 이송되기까지 11일간의 경과를 기록했다.
1909년 10월23일: 안중근은 아침 일찍 거리에 나와 소식을 탐문하였다. 당일 발행한 '원동보'에는 이토가 중동철도총국의 특별열차를 타고 관성자(지금의 장춘)에서 출발하여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해서 코코프체프를 만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안중근과 동지들은 하얼빈역을 돌아본 후 하얼빈공원(현 조린공원)으로 돌아와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하얼빈역에서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판단하고 중간역인 채가구(길림성 부여현 경내 위치함)에 가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온 안중근은 바로 다가올 거사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벅차고 정서가 격앙되어 호매로운 '장부가'를 써내려갔다.
1909년 10월 25일 : 채가구에 머문 안중근과 동지들은 아침 여섯시면 날이 채 밝지도 않으니 설사 이토가 기차에서 내린다 해도 어둠속에서 거사에 성공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였다. 거려 끝에 우덕순과 조도선이 채가구에 남아 기회를 봐서 거사하기로 하고 안중근은 혼자 낮 열두 시 기차로 하얼빈에 돌아와서 다시 김성백의 집에 류숙하였다.

거사일 1909년 10월 26일. 이날의 설명은 길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안중근은 브라우닝 F-1900 권총을 다시 한 번 검사하고 '+'자가 새겨진 탄알 8발을 장전하였다. 아침 7시 낡은 신사복을 입고 압설모를 쓰고 권총을 주머니에 넣은 안중근은 김성백의 집에서 나와 마차를 타고 하얼빈역으로 향하였다. 하얼빈역에 도착한 안중근은 일본교민들 속에 섞여 대합실로 들어갔다. 그는 대합실 내의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전 9시, 이토가 탄 기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먼저 코코프체프가 기차에 올라가 이토를 영접하였다. 약 20분후 이토 히로부미는 코코프체프와 함께 기차에서 내려 검열을 시작하였다. 군악대의 주악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이때 안중근은 플랫폼에 들어가 러시아 의장대 뒤에 섰다. 9시30분, 이토가 러시아의장대 앞으로 다가와 안중근과 10보 정도 떨어져 있을 때 안중근은 러시아군인 사이를 뚫고 의장대 앞으로 달려 나가 이토와 5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침착하게 총을 꺼내 이토를 향해 연속 세 발을 발사하였다. 세 발 모두 이토를 명중하였고 가슴과 배에 총을 맞은 이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때 만약 쓰러진 게 이토가 아니면 큰일을 그르친다는 생각이 안중근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이토를 수행하는 일본사람들을 향해 네 발을 발사하였다. 하얼빈주재일본총영사관 총영사 가와카미, 만주철도회사 이사 타나카, 비서관 모리 야스지로, 남만철도회사 총재 나카무라가 총알을 맞았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을 덮쳤다. 안중근은 권총을 던져버리고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를 세 번 외치고 나서 태연하게 체포되었다. 수행 의사들이 신속하게 이토를 열차로 옮겨 구급처지를 하였으나 20분후 이토는 절명하였다.
저녁 열한 시 러시아당국은 안중근을 하얼빈주재일본총영사관에 인도하였다.
1909년 10월29일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소식은 세계를 진감하였다. 세계 각국의 매체들은 많은 뉴스와 평론을 보도하였다.
1909년 10월30일 : 하얼빈주재일본총영사관 지하실에 있는 심문실에서 미조부치 검사는 안중근에 대한 1차 신문을 진행하였다. 안중근은 미조부치가 제기한 백여 개 질문에 대답하였으며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열거하였다. 그 죄목을 하나하나 나열하였다.
1909년 11월 1일 : 안중근 등 9명의 동지들은 12명의 일본헌병과 13명의 러시아헌병에게 압송되어 하얼빈에서 기차를 타고 여순으로 출발하여 11월3일 여순감옥에 도착하였다.
하얼빈에서 열하루.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살펴보면 얼마나 주도면밀하고 침착했는지 놀랍다. 이후 전시는 여순감옥에서 생활을 소개한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여섯 차례의 재판이 연속 진행되었다. 법원은 약속을 어기고 러시아변호사 미하일로프, 영국변호사 더글라스 대한제국 변호사 안병찬 등의 법정변호 신청을 거부하였으며, 일본 관선변호사에게만 변호를 허락하였다.

▲ 기념관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얼빈에서 11일간을 정리했다.

안중근은 어떤 자세로 재판에 임하였는가. 전시물은 이렇게 소개한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의거의 정당한 이유와 목적을 진술하였으며 이토가 조선반도를 침략하고 동양평화를 파괴한 15가지 죄목을 열거하였다. 방청객은 대다수가 일본인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은 안중근의 공소를 듣고 나서 안중근의 정의감에 감복하였다. 그러자 법관은 안중근의 발언을 중지시키고 휴정을 선포하였다. 세계 각국의 신문들은 심판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영국기자 찰스 모리모는 "이 세계적인 심판에서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법정을 떠났다. 그의 진술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는 파렴치한 독재자로 부각되었다"고 보도하였다.
1910년 2월 14일의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에게 일제는 사형을 언도했다. 이는 안중근이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안중근은 미소를 지으면서 재판관에게 물었다.
"일본에서 사형보다 더 중한 형벌은 없소?" 고등법원 원장 히라이시는 안중근에게 항소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으나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였다.

‘장렬한 최후 불후의 유언'이란 제목으로 전시 자료는 어머니 곽마리아 여사의 당부를 보여준다.
아들의 사형 판결 소식을 들은 안중근의 모친은 안중근의 동생 공근과 경근을 여순에 보내 마지막 순간에 입을 민족복장과 당부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처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 일본 '아사히신문'은 '시모시자'라는 제목으로 평론을 발표하여 안중근 모친과 안중근의 위대한 흉금을 찬양하였다.(‘전시문’)

1910년 3월 10일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 면회실에서 감시 하에 정근, 공근 두 아우와 홍석구 신부를 면회하고 최후의 유언을 전하는 비장한 장면은 사진으로 보여준다.

최후의 유언 :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옆에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하여 다오. 대한독립의 소식이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전시문’)
'최후의 유언'을 소개하는 글은 '청초당(靑草塘)'이라는 유묵을 새긴 조린공원 내 안중근의사유묵비 사진을 배경으로 하였다. 풀이 푸른 한 안중근 의사의 불의에 항거한 의(義)는 늘 푸르리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두 동생이 일본에 유체를 넘겨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일본당국은 그들을 강제로 '대한제국'에 압송하고 안중근 의사의 시체를 비밀리에 여순의 모 지점에 암매장하였다. 근 수십 년간 한국과 중국, 북한이 유해발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 1급 화가인 권오송(權伍松)이 그린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다"는 제목의 그림이 그날의 현장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미처 완성하지 못한 '동양평화론'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의 주요 구상’으로 소개한다. 동양평화론의 주요 구상은 1, 2로 번호를 부여하고 2에 5개 항목을 적어 동양평화론의 핵심을 요약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중국 저명인사들의 휘호와 시가 사진과 함께 걸려있다. 장개석 총통은 "장렬천추'(壯烈天秋)라고 썼다. '서언'에 소개한 주은래 수상의 평가를 별도로 전시하였다. 손문(孫文)은 한글로 일제가 시체를 내어주지 않아 두 아우는 더욱 슬퍼서 통곡을 하다가 마지못하여 귀국하였더라고 쓰고 한시를 읊었다. 저명한 학자인 장태염(章太炎)은 "아주제일의협(亞洲第一義俠: 아시아의 첫째 가는 의협)'이라 하였다.
양계초는 한시(漢詩)로 "유혈오보대사건(流血五步大事件) 광소일성산월고(狂笑一聲山月高)"라고 하였다. "다섯 걸음 앞 격살은 대사건이라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산위 달과 같이 높구나"

기념관은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의거의 의의를 잘 드러냈다. 일본 우익인사들라도 이곳에 와서 본다면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하지 못하리라. 전시물을 다 보고 다시 창가에 모여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현장을 보며 안중근 의사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