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답사 6일째인 7월 20일 한중우의공원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했다. 한중우의공원에 있는 ‘주몽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주몽의 집에서 나온 음식은 한식으로 국내와 다를 바 없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식을 맛보았다. 주몽의 집은 한중우의공원 복지관 건물에 있는데, 이곳은 건물 중앙에 들어가는 문에 ‘綜合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오른쪽으로 주몽의 집 식당이 있다. 복지관은 한중 양국 간의 친선외교, 경제교류와 교육개발, 문예진흥, 산업연수를 위한 장소이다. 다목적홀은 예식장, 공연장 겸용으로 한국 전통 혼례, 현대식 예식, 회갑, 세미나 등 다용도 행사가 가능하다.
해림에서 하얼빈까지 283킬로미터라고 도로표지판이 알려준다. 예정대로라면 3시간 남짓 걸릴 터. 오전 8시 해림을 출발했다. 한 시간 가량 가니 비가 내리고 안개가 낀다. 날이 어둡기까지 한다.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731부대를 간다니까 하늘도 그 악행에 노하는가. 버스와 트럭이 드문드문 달릴 뿐 도로가 비어있다. 길 양 옆으로 밭이 이어진다. 만주의 곡창지대가 이어진다.

여독 탓도 있겠지만, 모두 말이 없다. 인체 실험 현장으로 가는 길이라서 일까 아침 분위기가 무겁다. 그 무거운 분위기를 깬 이가 임찬경 박사였다. 임 박사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731부대 관람은 여유가 있으니 아성(阿城)에 있는 금상경역사박물관(金上京歷史博物館)에 들렀다 가자고 했다. 예정에 없는 곳인데 모두 환영했다. 한 곳이라도 더 가서 알고 싶었던 마음이 모두에게 있었다. 상경은 1115년 금(金, 1115~1234년)나라를 세운 태조 아골타(阿骨打)가 도읍한 회녕(會寧)으로 지금의 흑룡강성 아성시 백성자(黑龍江省 阿城市 白城子)일대이다.

▲ 흑룡강성 아성에 있는 금상경역사박물관은 금나라 수도 상경시대의 역사, 문화, 경제를 보여준다.

여진(女眞)이 세운 금(金)나라. 고려시대 윤관(尹瓘? ~ 1111) 장군이 별무반(別武班 )을 조직하여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는 역사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역사.
학교에서는 금나라를 세운 시조가 신라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훗날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우리가 모르는 역사,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최근에 다시 금나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금나라를 세운 시조가 신라인의 후예이므로 금나라의 역사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부터다. 이 주장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다. 박은식(1859~1925)이 쓴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라는 글을 다시 읽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 글에서 박은식 선생은 “대금국의 태조황제는 우리나라 평주(平州) 사람 김준(金俊)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이고 그 민족의 역사로 말하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다른 이름으로 발해족은 마한족(馬韓族)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의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의 한 작은 마을로 흥기하여 단숨에 요나라를 멸하고 다시금 북송(北宋)을 취하여 중국 천지의 주권을 장악하였으니 이는 모두 우리 국토의 산(産 )이요, 우리 민족의 인(人)으로 특별히 천제의 사랑스런 자제가 되어 비길 바 없는 복록을 받아 더할 수 없는 광영을 나타낸 것이었으니 이는 실로 단군대황조의 음덕과 백두산의 신령스런 도움으로 이룩된 것이라 할 것이다.”(백암박은식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백암박은식전집’ 제Ⅳ권, 동방미디어,  2002, 172쪽).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오가는 동안 버스는 금상경역사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대지를 촉촉이 적신 비가 누꿈해지더니 완전히 멈추었다.

▲ 금진왕(金秦王) 완안종한(完顔宗翰, 1080~1137)의 동상이 금상경역사박물관 밖에 세워져 있다.  그는 태조 아쿠타와와 함께 금나라를 건국하여 업적이 아쿠타와 비견된다.

박물관 앞 벽 金上京歷史博物館이라는 글씨가 먼저 우리를 맞아주었다. 박물관 건물 앞에는 삼각형 아치를 세웠는데 모두 다섯 개다. 이는 금나라 상경에서 정사를 보았던 다섯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흉상이 넷 있다. 태조 아골타(牙骨打), 태종, 희종, 해릉왕(海陵王)의 상이 있고 오른쪽으로 솥을 전시했다. 발이 셋인 솥, 정(鼎)이다.
이곳은 금나라 출토 유물과 문화, 역사를 종합하여 보여준다. 여진족의 생활상, 상경(上京)의 모형 등을 전시했다.
이곳 자료를 보면 금상경역사박물관은 1961년 건립하였는데 당시에는 아성현박물관이었다. 1965년 문관소(文管所)로 바뀌었다. 1986년 다시 박물관으로 전환하여 아성현금상경역사박물관이라 하였다. 1987년 아성현이 시(市)로 승격되어 아성시금상경역사박물관으로 개칭하였다. 1987년부터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여 새로 건축하여 1998년 10월 8일 신관을 정식 개관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박물관은 중국 유일한 전문 역사박물관이라 한다.
▲ 금나라 때의 동경.

상경에 1115년 건국한 금나라가 1153년 지금의 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38년간 상경의 역사, 경제, 문화, 교통 등 발전상과 유물을 보여주는 곳이다. 소장유물만 1,791건에 달하며 그 가운데 국가 1급 문물이 20건, 2급이 11건, 3급이 18건이라 한다. 2001년에 AAAA급 여유경구로 선정됐다.
우리 역사와 금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하며 전 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중 금나라의 조상을 설명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북경(大荒北經)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동북은 바다 밖이다.… 대황의 가운데로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이 불함이다. 숙신씨의 나라가 있다”(東北海之外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그 아래는 ‘금사(金史)’ 본기(本紀)의 기록을 써놓았다. "금나라의 조상은 말갈씨에서 나왔다. 말갈은 본래 물길이라 불렀다. 물길은 옛 숙신의 땅이다.(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勿吉, 古肅愼地也)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의 시조는 휘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 諱函普 初從高麗來)는 기록은 박물관 어디에도 볼 수 없다.

이 기록을 국내에 돌아와 다시 살펴보리라 다짐하고 나중에 관련 문헌을 뒤졌다. 역사 기행이 끝나는 지점에서 역사 기행이 다시 시작된다. 이런 갈증을 풀어주려는 듯 심백강 박사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 역사’(바른역사, 2014)를 펴냈다. 이 책  ‘신라의 장’에서 금나라 태조의 가계를 고증했다.
금사뿐만 아니라 청(淸)나라 이전의 기록에서는 금나라를 여진족이 세웠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심백강 박사는 “청나라 이전의 문헌에는 하나 같이 ‘아골타에 이르러 금나라를 세웠는데 아골타의 시조는 신라 사람이었다”고 소개했다. 함보는 누구일까. ‘흠정만주원류고’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왕실에서 온 김씨의 후예이다”라고 적혀 있는데, ‘고려사’에는 성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검토한 심백강 박사는 “금나라의 시조는 고려에서 망명해온 신라왕족의 후예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확실하다”고 했다.
금상경역사박물관을 관람하고 자료판매처에 들러 흑룡강인민출판사에서 펴낸 ‘흑룡강역사’ 책을 구입했다. 금나라 시기 흑륭강 일대는 역사상 유래 없는 번영기를 열었다는 기록이 눈에 들어온다. 송나라를 압박하여 남쪽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지배한 금나라. 중국 역사상 두 번째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이 금나라의 역사를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제대로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채 금상경역사박물관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