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은  국왕이 사는 집이며 왕이 살며 활동을 하던 곳이다. 왕이 즉위하기 전  살던 집은  '잠저'라 한다. 조선시대  제일의 궁궐은 경복궁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가장 먼저 축조한 궁궐이 바로 경복궁이다. 이를 법궁(法宮)이라 한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자리잡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東闕)이라고 한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서로 다른 별개의 궁이면서도 하나로 합쳐진 궁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궁을 합하여 동궐이라고 부른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궁궐이 경희궁과 덕수궁(경운궁)이다. 경희궁은 또 다른 궁궐인 덕수궁과 함께 서울의 우백호인 인왕산 자락에 있다.  현재의 경희궁은 궁궐이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의 궁궐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궁궐이 바로 덕수궁이다.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인데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주로 몽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선조가  행궁으로 삼아 머물면서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 덕수궁 만다라(김동원, 비단에 채색). <사진=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 (月山大君)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죽었기 때문에 세자빈 (世子嬪) 한(韓)씨가 출궁(出宮)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그러던 중 둘째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成宗)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몽진하였던  선조가 1593년 10월 한양으로 돌아와 보니 한양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곳곳이 불에 타 없어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보존되어 있던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정하고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瑠)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고 궁궐 내에 있어야 할 각 관청을 처음에는 궐문 밖에 인접하여 두었다가 점차 목책(木柵)을 넓혀 세우고 문을 달아 임시 궁성을 형성하여 여러 관청과 위사(衛士) 등을 모두 궁궐 내에 들게 하였다. 또 그 옆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 (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하였다. 1597년에는 담을 둘러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

▲ 전채용신고종황제어진(김은정, 비단에 채색). <사진=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후 1608년 2월 정침(正寢)에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內外政務)를 보았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光海君) 역시 이곳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에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하였다.

 아관파천(1896년) 이후  1897년(광무1) 2월에 고종이 경운궁을 수리하도록 지시하고 인화문(仁化門)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還御)하였으며, 5월에 경복궁(景福宮)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으로 옮겨 지었다. 8월에 고종은 다시 경운궁 수리를 독촉하여 조성한 뒤 10월에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삼아 그 규모로 꾸준히 늘려나갔다. 고종이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택한 것은 이곳이 여러 열강의 공사관이 밀집한, 그리하여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조금쯤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일본에 강압에 의해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준 뒤 경운궁에서 그대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이름 하게 된 이유이다. '덕수궁이라는 궁명은 본래 물러난 왕에게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지어올리는 이름이다. 현재 '덕수궁'으로 부르는 것은 고종이 황제 직위에서 물러나 '경운궁'에 머물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 태상왕으로 있을 때 정종이 태상왕의 궁을 세워 '덕수궁'이라 하고 부를 세워 승녕부라 하였다. 이  덕수궁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전시회가 열린다.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학교(총장 김재열)는 오는 6일부터 17일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길 갤러리 한옥에서 덕수궁을 주제로 한 작품전시회 '덕수궁을 기억하다'를 개최한다.

▲ '덕수궁을 기억하다' 전시회 포스터. <사진=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번 작품전시회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전통회화 전공(지도 권지은 교수) 4학년 재학생들이 기획하여 2014년도부터 연차적으로 진행 중인 ‘5대 궁 이야기(宮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이 기획은 전통회화 기법과 재료를 토대로 모사(模寫)와 창작을 통해 젊은 예비 전통회화 작가들이 궁의 역사와 장소, 인물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현대의 감성에 맞게 풀어나가는 기획전이다.

지난해 ‘창덕궁을 깨우다’에 이어 올해는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덕수궁을 주제로 11명의 학생들이 지난 1년간 답사와 토론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여 작품을 기획하였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 고종이 염원했던 대한제국을 불교의 극락정토와 접목한 ‘덕수궁 만다라’ ▲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신 점에 착안한 ‘가비(커피의 옛말) 시리즈’ ▲ 동서양이 섞인 독특한 양식의 정관헌 기둥 장식을 화려한 꽃장식으로 표현한 ‘정관헌 화훼화’ ▲ 고종의 고명딸(아들 많은 집의 외딸)인 덕혜옹주의 1931년 결혼사진을 전통초상화 기법으로 재창작한 ‘덕혜옹주 초상’ 등 덕수궁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참신한 작품을 통해 접할 수 있다.

▲ 가비 시리즈 (김유진, 비단에 채색). <사진=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번 전시회는 우리가 잊고 지낸 5대 궁에 관한 성찰과 관심을 환기시킴과 동시에 전통회화의 깊이를 일반 대중과 친숙하게 소통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또한, 다양한 전통회화 기법과 전통을 근간으로 한 창작 작업을 통해 전통회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전통을 잇는 젊은 전통 미술인들의 ‘살아있는’ 전통의 전승과 계승을 보여 주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5대 궁 이야기(宮 프로젝트)‘는 창덕궁, 덕수궁에 이어 다음 해에는 창경궁에 대한 이야기를 선보일 계획이며, 5대 궁에 관한 전시회가 끝나면 각 지역에 있는 문화재에 담긴 이야기를 다양한 작품을 통해 풀어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