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칠궁이 어떠한 궁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칠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비롯하여, 저경궁(儲慶宮·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대빈궁(大嬪宮·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연호궁(延祜宮·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 선희궁(宣禧宮·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경우궁(景祐宮·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 덕안궁(德安宮·고종의 후궁 엄씨) 등의 위판을 모신 7개 사당으로 이루진 곳이다. 대통령궁의 왼쪽에 있다.

 
①. 육상궁/ 毓祥宮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 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최 숙빈은 숙종 44년(1718)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즉위하면서 숙빈 최 씨의 사우祠宇를 그의 잠저(潛邸)에다 건립하기를 명하였으나 대신들로부터 잠저에 사우를 만드는 것은 불가하다는 반대가 있어, 새로 터를 정하여 영조원년(1725) 12월에 경복궁 북쪽, 즉 현재의 위치에 건립하였다. 건립당시 묘호는 숙빈묘라 하였고 영조 20년(1744) 3월에 육상묘로 정명하였으며, 그 후 다시 영조 29년(1753) 6월에 육상궁이라 개명하였다. 고종 19년(1882) 8월에 육상궁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고종 20년 6월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육상궁은 영조 사친의 묘임에는 틀림없으나 『정조실록』에 따르면, 영조의 어진도 봉안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봉안처가 정조 때까지는 봉안각이라 하였고, 순조 때 이후에 냉천정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 건물 북쪽 가까이 냉천이 지금도 있는 것으로 보아 냉천정이란 여기서 연유하여 봉안각을 지칭한 이름으로 추정된다. ※ 잠저는 창업한 임금이나, 종실에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 영조의 잠저는 창의궁인바 창의궁 현 통의동 35번지 일대이다.
 
②. 연호궁 / 延祜宮,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靖嬪) 이 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정빈은 경종 원년(1721)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대왕은 즉위 후, 진종을 추존하고 진종의 생모인 정빈을 위하여 정조 2년(1778)에 정빈묘를 연호궁이라 정호하면서 북부 순화방, 즉 경복궁 추성문 밖 서북방에 묘를 정하였다. 육상궁과 가까운 거리에 존속해 오다가 고종 7년(1870)에 육상궁 내에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③. 저경궁/ 儲慶宮,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仁嬪) 김 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인빈은 광해 5년(1613) 10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 묘는 인빈의 서거 직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19년(1743) 이전에 원종의 잠저인 송현궁(현 한국은행 후편)에 봉안하였다가 선조의 8남인 여천군가에 옮겨지었다. 영조 31년(1775)에 다시 사우를 송현궁으로 옮겨 궁호를 저경궁이라 하였다. 저경궁에 이건한 한인 빈묘는 그 후 조선말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고종 7년(1870) 정월에 경우궁(景祐宮) 별묘(桂洞)에 이안하였으며, 고종 23년(1886)에 경우궁이 계동에서 옥인동으로 이건하였고, 융희 2년(1908) 7월에는 인빈묘를 육상궁내에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④. 대빈궁/ 大賓宮,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 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희빈은 숙종 27년(1701) 10월에 돌아가셨다. 신주를 정동 사저에 봉안하였다가 경종 2년(1722) 10월에 희빈을 옥산부 대빈으로 추존하면서 사우를 중부 경신방(현 낙원동 24번지 부근)에 건립하였다. 그 후 고종 7년(1870) 정월에 육상궁 내에 이안하였고, 고종 24년(1887)에 경신방의 묘궁에 환봉한 일이 있은 다음, 다시 순종 융희 2년 7월에 육상궁내에 재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⑤. 선희궁/ 宣禧宮,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의 생모인 영빈(暎嬪) 이 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영빈이 영조 40년(1764) 7월에 서거한 다음해 7월에 시호를 의열이라 추정하였고, 그 후 백운동에 영빈묘가 건립되어 의열묘라 하였다. 정조 12년(1788) 선희로 개명하였으며 묘를 궁으로 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고종 7년(1870)에 선희궁을 육상궁 내에 이안하였다가 건양 2년(1896)에 다시 구 선희궁 (북부順化坊으로 현 신교동 1번지 맹인학교터)으로 환봉, 그리고 융희 2년(1908)에 다시 육상궁에 재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⑥. 경우궁/ 景祐宮,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 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이다. 수빈은 순조 20년(1820) 12월에 서거하였으며, 그 다음 해 신주를 창경궁내 전각에 봉안하여 현사궁(顯思宮) 이라 하였다. 순조 24년(1824) 5월에 별묘가 세워지고 같은 해 12월에 경우궁으로 명명되었으며, 순조 25년 2월에 경우궁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건립한 터는 구 용호영의 터였으며, 그 위치는 북부 양덕 방(종로구 계동으로 전 휘문고교 운동장)에 있었다. 건립 후 성일각에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함께 봉안하였다. 이는 육상궁의 냉천정에 아들 영조의 어진을 함께 봉안한 예와 같다.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갑신정변에 고종이 경우궁에 이어하여 혁신내각을 이곳에서 조직, 하루를 묵고 다음날 18일 이재원의 집 계동궁에 이어하였다가 창덕궁에 환어還御한 사실이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경우궁을 이건하는 의논이 있어 고종 23년에 양덕방에서 인왕동(현 옥인동 45-46번지 일대로 중부병원 자리)으로 이건하였고, 다시 융희 2년에는 제사친묘를 합사하는 조치에 따라 저경궁·대빈궁·연호궁·선희궁 등과 더불어 경우궁도 육상궁 내에 이안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⑦. 덕안궁/ 德安宮,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 귀비 엄 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이다. 광무 원년 엄비가 황자를 출생하면서 경운궁 내 구 명례궁 터에 거처할 궁을 건립, 경선궁이라 불렀고 1911년 7월 엄비의 서거 후, 덕안궁으로 개칭하였다. 1913년에는 현 태평로 1가 61번지에 신궁을 영조하여 엄비의 묘우로 하였으며, 그 궁명을 덕안궁이라 하였다. 따라서 1929년 7월 11일에 덕안궁을 육상궁 내로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상 대통령궁의 칠궁 해설)
 
“지금은 조상의 도움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저를 도와주시는 감응신령을 보세요. 그분은 단군왕검입니다. 왜 단군왕검이 이 시대에 현신하셨겠습니까? 시대가 그분의 현신이 필요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상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그분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방법을 가르쳐 주어요.” 
 
대통령이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매년 육궁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제도화해야 합니다.”
“정부에서 결정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할 것이고. 국민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반대할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의 시간을 향하여 성난 탱크처럼 달려가고 있는데 반대하다간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설사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종교인들이 이 나라를 장악한지 오래 되어 설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제사엔 문제가 없겠습니까?”
“비밀리에 제사지낼 것입니다.”
“비밀리에…….화가 나지만 그렇게 하시지요.”
“제가 도와드릴 것이 무엇인가요?”
“조상을 모실 방을 하나 내주셨으면 합니다. 이숙 씨의 몸에 육궁이 빙의하셔서 쉬게 해야 합니다.”
“이숙씨가 힘이 들겠군요. 상춘제常春齊가 있으니 그곳을 쓰세요.”
 
상춘제는 본전에서 떨어져 동쪽에 있었다. 상춘제 앞에 야외에서 연회를 열 수 있는 잔디밭이 있다. 상춘제는 녹원과 백악의 끝자락에 서있는 오래 된 건물이다. 역대 대통령이 이 건물을 1년에 한두 번 사용하였다. 의전담당비서관이 우리를 상춘제로 안내하였다. 상춘제에 방 여러 개가 있는데, 의전담당비서관은 상춘제 입구에 있는 의자와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쉬십시오. 대통령께서 저녁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총무비서관이 말하였다. 그가 돌아갔으나 우리는 쉴 여유가 없었다. 제사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통령에게 앞으로 진행될 제사 전반에 대하여 브리핑을 하였다. 1번으로 한 브리핑
이 육오궁위판六宮位版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육궁위판을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가며 역사의 순서대로 글자를 짚어가며 설명하였다.
 
“고대에 중원에 있었던 하나라에 멸망한 유서국 출신의 매희, 상나라에 멸망한 유소국 출신의 달기, 주나라에 멸망한 포사국 출신의 포사, 세 분과 춘추
 
전국시대 진晋나라에 멸망한 여융국 출신의 여희가 모두 동이족東夷族 출신이므로 동이족 4궁으로 묶었습니다. 이분들이 모두 다 상고시대 우리 조상나라의 역사를 대변하는 분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명성황후를 4궁에 편입하여 오궁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궁 옆에 별도로 비류왕을 모셨습니다. 혹시 위판에 대하여 질문할 것이 있는지요?”    
 
“없습니다.”
 
다음에 2번으로 브리핑한 것은 향관 배치표였다. 제사의 방위는 북방을 향하여 위판을 놓고 그 앞에 제상을 놓는 구도였다. 대통령이 단독으로 제관이 되어 좌우집사와 좌우시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제상에 헌작獻爵하며 삼헌제사三獻祭祀를 지내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펼친 것은 제물진설도祭物陳設圖였다. 제물진설도는 제상위에 총 66개의 제물이 올라가도록 기획된 것이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종묘제례 때 쓰는 제물진설도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다. 제물을 진설하는 예를 천조례薦俎禮라 하는데, 옛날에 도마 위에 제물을 놓아 제상에 올렸으므로 도마조俎자를 써서 천조례라 한 것이다.  
 
제향을 받으실 분들의 전면인 남쪽을 향하여 왼쪽에는 마른 제물(건제물乾祭物)을 변籩에 담아 놓고, 오른쪽에는 진 제물(곤제물坤祭物)을 두豆에 담아 놓는다. 변과 두는 형태는 두豆자처럼 생겨 변이 두처럼 닮았으나, 변은 마른 제물을 담도록 공기가 통할 수 있는 자료로 만든 것이고, 두는 젖은 제물을 담도록 유기鍮器 등으로 만든 것이다. 
 
제상의 중심에는 4종류의 곡물을 각이진 제기인 보簠와 궤簋에 담아 놓는다. 보와 궤는 각이 저 있고 뚜껑이 있다. 
 
곡물 앞에는 네모난 목기를 놓는데, 소, 돼지, 양 3종류의 가축을 잡아 고기를 7조각을 낸다. 이를 7체體라 한다. 그 앞으로 향로와 폐백광주리를 놓고, 맨 앞에 3종류의 술인 감주甘酒(단술), 앙제盎齊(막걸리), 청주淸酒(약주)를 작爵에 담아 올린다. 마지막으로 맨 앞에는 초혼주招魂酒인 울금주를 올린다. 
술잔의 좌우로 산짐승을 잡고 남은 털과 피와 내장을 담은 그릇인 간료등을 놓는다. 이외에 등잔은 위판 가까이에 좌우로 제상의 가장자리에 놓고, 촛대는 제상 가장자리에 제주 가까이에 놓는다. 제기는 혁거세 선생이 자신이 쓰던 것을 실어왔고, 제물도 자신이 운영하는 굿당에서 만들어 실어왔다. 제단으로 쓸 식탁 6개를 대통령궁의 구내식당에서 가져다 3개씩 두 줄로 맞붙여 놓았다. 그 위에 백포를 깔아 사방으로 늘이고 제물을 진설할 자리를 나타내는 제물진설도를 그 위에 깔았다. 제단 뒤쪽에도 식탁을 놓고 그 위에 오궁위판과 비류왕 위판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제사를 받을 분들이 누구라는 것이 밝혀지게 하였다. 제단 앞에 절하고 술을 올리는 자리를 만들었다. 
 
▲ 제물진설도祭物陳設圖. 제물 중에서 음식에 속한 제물은 양념을 쓰지 않고 소금에 간을 한다. 고대엔 양념을 쓰지 못했다는 표시이다. 또한 염장鹽藏을 한 제물을 바친다. 폐백은 백비단과 구슬을 바친다.
 
제사는 자시子時가 시작될 때 시작하기로 하였다. 제례악은 장소가 장소이니 만치 정숙을 유지하기 위하여 쓰지 않기로 하였다. 저녁식사 초대를 받은 우리는 본전에 있는 식당에서 대통령과 함께 식사하였다. 식사는 간단하게 준비한 것이라 식탁이 화려하지 않았다. 밥과 소찬이 전부였다. 식사가 끝난 다음에 제단이 차려진 잔디밭으로 갔다. 날이 어두워졌다. 
 
상춘제 문 옆에 있는 한 방에 이숙과 이명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숙을 돕기 위하여 이명지가 이숙이 곁에 있었다. 대통령은 흰색의 한복을 입고 있었다. 대단히 격조 높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하여 준비한 듯 보였다. 나도 근화가 지어 준 한복을 입고 있었다. 이숙과 이명지도 흰색의 한복을 입고 있다.
 
“이 선생이 이 의미심장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늘의 찬자가 되어 주시오.”
 
내가 이명지에게 권한다. 이명지가 제단에서 홀기를 집어 들어 펼친다. 
 
“혁거세 선생이 축을 읽어 주시오.”
 
내가 혁거세 선생에게 말한다. 
 
“래이 Society 대표는 회원들을 시자와 집사, 그 외에 필요한 향관을 차출하여 제단 주변에 배치해 주기 바랍니다.”
 
내가 대표에게 말했다. 제관과 향관이 모두 자리를 잡자 나는 각자의 임무를 숙지시키고 3번 예행연습을 하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와 대통령과 혁거세 선생이 상춘제 문 앞에 대기하였다. 자시가 가까워지자, 우리는 녹원의 끝에 있는 상춘제 가까이에 있는 잔디밭에서 제사를 시작하였다. 
 
근화가 상춘제 안으로 들어갔다. 찬자贊者가 내 뒤에 섰다. 나는 대통령의 곁에 섰다. 시부신상尸婦神像으로 좌정한 이숙이 신이 흠향할 제물을 차린 제상 앞에 앉아 있다.  
 
“제사가 시작되면, 오궁五宮과 비류왕을 모시는 초헌헌무招魂獻舞를 추도록 하겠습니다. 이숙 씨가 초헌헌무를 추며 제단으로 갈 것입니다. 혁거세 선생이 축문을 읽을 것입니다.”
 
내가 대통령에게 말했다. 초헌무는 홀기에 기록이 없는 춤이었다. 오궁과 비류왕의 쿼크들이 통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춤의 파장을 만들자는 것이 나의 의도였다. 
 
“오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숙 선생이 오늘 제사를 받으실 6분의 빙의를 허락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오궁제례와 비류왕 제례를 합사合祀한 육궁제례六宮祭禮를 시작하여 이숙 선생에게서 육궁의 빙의를 풀어 드리고 육궁의 쿼크를 위판에 모시어 제사를 지내겠습니다.”
 
내가 선언하였다. 
 
오늘 육궁제례의 찬자는 혁거세 선생이 맡았다. 찬자의 음성이 자직하지만 장중하게 울린다. 쿼크들의 움직임을 이끌어내고 통제할만한 위력을 가진 음성으로 들렸다.
 
찬자 : (대통령에게) 육궁을 향하여 사배하십시오. 대통령이 육궁을 향하여 사배한다. 큰절 1배, 고두배 3배로 하는 4배의 절이다. 절하는 순서는 국궁鞠躬, 읍揖, 궤跪, 배拜, 흥興, 평신平身이다. 오궁이 이숙의 몸에 빙의하였으므로 대통령은 시부신상으로 앉아 있는 이숙을 향하여 절하지 않을 수 없다. 시부신상에게 절하는 절법이 치우천왕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다가 조선왕조 태종 때 왕이 하륜의 건의를 받아 신상을 없애고 위패를 쓰기 시작하면서 없어진 유습이나 오늘 이를 복원하였다. 인간의 몸이 쿼크와 홀로그램의 집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찬자 : 사모(Shaman)는 제사청祭祀廳 주변에서 부정을 쳐내시오. 
사모인 근화가 옥수가 담긴 작은 항아리를 들고 나와 솔가지에 옥수를 묻혀  사방에 뿌리며 한 바퀴 돈다. 장소를 정화시키는 정화의식이다. 이런 의식이  가락국의 김수로왕 이전부터 계불禊祓로 행해 오던 것이다.   
찬자 : (대축에게) 대축은 축문을 읽으시오. 좌집사가 축문 두루마리를 들어 혁거세 선생에게 주자 혁거세 선생이 우렁찬 목소리를 톤을 낮추어 읽는다. 
 
축문
 
오늘 비로소 유시국의 매희 궁주, 유소국의 달기 궁주, 포사국의 포사 궁주, 여융국의 여희 궁주를 사궁주로 정하고, 여기에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를 더하여 오궁으로 정하여, 오궁을 얽어매고 옭죄어 온 살과 고를 풀어, 매희의 저주, 달기의 저주, 포사의 저주, 여희의 저주, 명성황후의 저주를 풀어서 이 나라와 우리 조상 동이족의 회손毁損된 역사, 민족, 국가, 인간을 회복하여, 오랜 세월을 어그러져 온 음양의 조화와 차서를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나라를 잃고 왕명을 잃은 비류왕의 원한도 풀어드려 일실된 역사를 찾고 바로 세워 올바른 역사가 이 땅에 서도록 하겠습니다. 
육궁이 처음 부르는 호칭이라 생소합니다만 오늘 이후로 매해마다 육궁제례를 지내면서 호명하게 될 것이므로 차차 익숙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육궁의 제1궁은 하국夏國시대의 유서국 출신의 매희妹姬 궁주요, 제2궁은 상국商國시대 유소국有蘇國 출신의 달기妲己 궁주요, 제3궁은 주국周國시대의 포국褒國 출신의 포사褒姒 궁주요, 제4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여융국驪戎國 출신의 여희驪姬 궁주요, 제5궁은 일제日帝 강점기시대 대한제국大韓帝國 출신의 명성황후明成皇后입니다.  
이분들 중에서 매희, 달기, 포사, 여희 4궁주는 적국인 하국, 상국, 주국, 진국에 사로잡혀 멸망한 궁주 나라의 원수를 갚아 자신을 포로로 잡은 나라를 멸망하게 하였으나, 유독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를 빼앗겼던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는 나라가 망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살해당하여 본인이 스스로 원한을 풀지 못하였습니다. 
명성황후는 경기도 여주에서 1891년(철종 2년)에 민치록閔致綠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황후의 나이 9세 때 대원군의 부대부인 민 씨가 천거하여 궁중에서 간택되어 대한제국의 황후가 되셨습니다.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대 을미년에 왜적 낭인의 습격을 받아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칼을 맞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들이 시신을 건청궁의 한 모퉁이에서 불태워 버린 후에 1919년에 고종황제가 붕어하시어 홍릉洪陵에 합장하고 침전寢殿을 지으면서 지은 상량문上樑文에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보관하였습니다. 
 
“혜악부담빈궁고독惠渥溥覃貧窮孤獨 공고만세종사지기鞏固萬歲宗社之基 ”
  
이제 백악의 기슭에서 첫 오궁제사를 드리오니 오궁께서는 동이족의 조상으로서 친궁親宮하시어 대한민국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존하게 하소서. 
또한 비류왕이 오매불망寤寐不忘해 오던 부하富河를 찾아 돌려드리고, 부천을 부하로 개명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고, 부천에 우체모탁국의 역사와 삼한의 역사를 복원하고, 비류국의 역사를 복원하여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소성백제시대가 있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의 뜻이 이러하오니 비류국과 비류왕이라는 왕명을 잃어버린 원한을 씻으시고 오늘 제사에 동참하시어 제사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9월  8일  대한민국 대통령 OOO이 제문을 바칩니다.
 
대축이 축을 봉독하고 나서 축문을 우집사에게 준다. 우집사가 축문을 받는다. 찬자 : 사모는 육궁 한분 한분에게 6장의 백색 넋 수건을 나누어 드리시오. 
근화가 6장의 넋 수건을 이숙에게 준다. 이숙이 받는다. 넋 수건은 근화가 살풀이를 할 때 쓸 수건이다. 
찬자 : (근화와 이숙에게)  사모와 오궁은 초헌헌무를 추며 제단으로 가시오.
근화와 이숙이 초혼헌무를 추며 제단을 향하여 간다. 초헌 헌무는 살을 풀고 고를 풀기 위하여 육궁을 모시고 육궁 위판 앞으로 거동하는 과정을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살풀이와 고풀이 춤을 섞어서 춘다. 근화가 노래한다. 
 
살풀이 고풀이
 
하늘에 살 땅에 살
나 위해 남 해치며 
맺힌 살 풀어라 
꼬인 고 풀어라
구월산 삼성대왕님 전殿 
소복 입은 여자 보내
하늘에 살 땅에 살
맺힌 살 풀어라 
꼬인 고 풀어라
이승 저승 넘나들며
살 풀고 고 풀자
하늘, 땅, 사람에 맺힌 살
하늘, 땅, 사람에 꼬인 고
풀어라 풀어라 풀어 없애라  
 
이숙과 근화가 제단 앞에 당도한다. 살풀이 고풀이 노래가 끝난다. 근화가 이숙을 오궁과 비류왕 위판을 향하여 꿇어앉게 한다. 이숙이 꿇어앉는다.  
 
찬자 : (이숙에게) 빙의자의 머리에 좌정하신 매희, 가슴에 좌정하신 달기, 복부에 좌정하신 포희, 팔에 좌정하신 여희, 명성황후, 다리에 좌정하신 비류왕을 육궁위판에 좌정하도록 보내 주십시오. 근화가 도살풀이 수건을 든 두 손을 내밀어 이숙의 몸 안에 좌정한 육궁이 이숙의 몸 밖으로 나오도록 춤으로 유도한다. (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