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0주기 추모식이 30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겸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성재 이동휘 선생의 '서거 80주기 추모식'이 30일(금)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은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회장 류준형) 주관으로 열린다.

이 추모식에는  정관회 서울남부보훈지청장과 기념사업회원, 하빈 이씨 종친회 등 100여명이 참석한다.  약전 봉독, 기념사업회장의 식사와 서울남부보훈지청장의 추모사, 헌화 및 분향의 순으로 진행되며 추모식 이후에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충열대 무후선열 제단을 참배한다.

 이동휘 선생(1873. 6. 20~1935. 1. 31)은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899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를 졸업하고 1902년부터 강화도 진위대장(進衛隊長)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계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군직을 사임한 뒤, 강화도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결성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과 구국계몽운동에 헌신했다.
1908년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인천 무의도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1912년 유배지 탈출 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김립, 계봉우 등과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꾸준히 민족주의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거점을 옮긴 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이상설, 이갑,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 투쟁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4년에는 중국 왕청현(汪淸縣) 라자거우의 한인촌으로 거점으로 옮겨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3ㆍ1운동 직후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문창범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대한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동녕현에 독립군을 지휘할 임시군집부(臨時軍執部)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을 강하게 추진하였으며, 1919년 8월말에는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및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항일 독립전쟁을 전개할 독립군 양성에 헌신하였다.
 1921년 이후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후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력하였으며,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62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