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의 길,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고, 한국인의 길, 우리 국학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다. 앞서 우리나라의 고유한 정신문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역사를 타고 이어져 왔는지를 인재양성 제도와 관련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그러한 고유한 정신문화가 국학이라는 이름으로 잘 계승되어 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이유를 역사 속에서 살펴보고 앞으로 어떻게 우리의 국학을 발전시켜야 나가야 할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 민성욱 박사
우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출발점이 되는 단군조선에 이르게 된다. 그 이전부터 생성되어 단군조선시대에 정립이 되었던 우리 역사와 문화는 고유한 사유체계인 국학을 낳았지만 이천 년이 지난 시점에 일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문화적으로는 단군조선시대의 폐관이 있었고, 역사적으로는 단군조선의 붕괴와 열국(列國)시대의 개막이 있었다. 여기서 열국은 열 개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들이 존재했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부여, 옥저, 예맥, 삼한 등 열국은 단군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정신문화적으로 하나가 되고자 끊임없이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형성될 수 있었다.
고대국가로 발전한 삼국은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사상으로 하나가 되어야 통치가 수월해 지기 때문에 왕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종교, 즉 불교를 수용하게 된다. 왕이 곧 부처라는 이념을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삼국 불교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 불교문화의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무속신앙으로 내려오던 칠성각, 산신각 등을 사찰 내에 가장 높은 곳에 배치를 하였고, 주 부처인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는 전각을 대불전이라고 하지 않고 대웅전(한웅전)이라고 한 것도 전통문화인 선도문화를 바탕으로 불교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는 고대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고, 철학적 인식의 토대를 구축했으며, 왕권의 강화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교는 고려시대에 와서는 국교로 자리 잡았고, 점차 고유한 선도 문화는 사라지고 불교문화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삼국을  통일한 것은 가장 약체로 평가되던 신라였다. 민족사 관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선덕여왕 11년(642년)의 대야성 비극으로 인한 김춘추의 삼국 외교(고구려, 왜, 당과의 관계)는 신라와 당의 군사동맹 체결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김춘추의 청병요구가 관철되어 660년 나·당연합군이 형성됨으로써 결국 백제를 정벌하게 되었고,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분명 필연적인 이유는 있었겠지만 민족적인 관점에서 보면 당과 같은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의 삼국통일에  논란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신라의 무열왕(김춘추)은 친당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받아들인 중국 문물은 관제와 복식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고, 사후 묘호도 태종이라고 해서 중국의 묘호를 따랐다.  무열왕에 이어 그의 손자인 신문왕대에 이르면 삼국통일 후 유교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국학(國學)을 설립하게 된다. 이때부터 국가에서 유학자를 양성하게 되었고, 그들이 국정 전반을 주도하게 되었다.  결국 고유한 전통문화는 외래문화(중국의 문물)에 의해 밀려나 점차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일한 고려. 그 고려가 인종 때가 되면 대내외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워지게 된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나라는 어지럽고, 국력은 쇠약해졌으며, 임금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마땅히 개혁이 필요했던 때였다. 임금에게 개혁을 해야 한다고 서경파들은 이야기하였고, 서경천도론, 칭제건원론, 금국정벌론 등의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에 김부식 등의 개경파들은 서경파가 내놓은 개혁안마다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서 묘청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고, 김부식 등이 이끄는 중앙군(개경파)에 의해 난은 진압이 되었으며, 서경천도운동은 그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민족의 주체성은 점차 상실되어  끝내는 원나라의 부마국(속국)이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하여튼 서경천도운동의 실패로 이 땅에 사대주의가 팽배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이후 조선왕조가 들어서게 되면 중국의 정신적 속국이 되게 이른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가 상실되자 국권까지 빼앗기는 수난의 역사를 거듭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러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실패를 "조선 역사상 일 천년 이래 제일 큰 사건"이라고 평가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결국 김부식은 묘청과 그 일파를 진압하는 데 성공하고, 벼슬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외세에 빌붙어 안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이 나라의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실패를 거울삼아 일제에 몸을 의탁한 친일파를 비롯하여,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조선 유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천여 년 간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며, 자주적인 정신이 사라지게 될 중요한 시기에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사대모화사상을 척결할 기회를 맞았으나 끝내 이를 살려내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지금, 우리 민족의 자주적이며, 진취적인 기상을 드높여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고려 이후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유교가 국교가 되고, 유학이 국시가 되었다. 이로부터 무속신앙이나 전통문화 등은 모두 미신이나 악습으로 인식해 없애거나 무시하게 되었고, 역사 인식 또한 국조 단군은 신화적인 인물로 묘사하여 기자를 부각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우암 송시열 같은 인물은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인 만동묘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은 철저한 ‘존명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의식은 사대주의의 심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민족정신이 상실되어 그 바닥을 드러내자 우리의 민족정신이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과 갑신정변과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밑으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동학농민운동이었고, 이러한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이란 사람 안에 하늘 성품이 있다는 전통적인 선도문화의 부활로,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것과도 일맥상통한 얘기가 되었다. 그러나 온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과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분출되었던 동학의 힘이 외부의 세력, 즉 일본과 물질문명에 의하여 한풀 꺾이게 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물질에 의하여 쉽지 않은 길을 갈 것을 예견하는 사건이 되었다.

당시에 조선이 동학의 정신을 받아 들여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변화되었다면 좋은 결과가 올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하여 계속된 좌절의 시간이 있었으며 지금과 같은 어려움이 초래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도 계속하여 민족의 에너지가 집결되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으니 이것을 하나로 모을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고, 이것이 희망이며, 비전이었던 것이다.

구한말에 발흥한 동학, 천도교, 대종교 등 민족종교들은 모두 우리나라 고유의 선도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단군의 홍익정신이 있었다. 특히 대일항쟁기에 종교운동, 민족주의 역사학, 국어학 운동을 주도했던 대부분 국학자들은 대종교의 교도이거나 대종교 철학과 역사관에 사상적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 선생의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존재한다.”는 시대적 명제는 무장 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다. 이러한 민족정신의 부활은 홍익인간 정신을 구심점으로 신앙 운동, 국학 운동, 항일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홍암 나철 선생이 선도수련의 최고 경지인 폐식법으로 돌아가시면서 민족에게 남긴 예언 시가 인상적이다. 예언 시 중 두 번째 구절까지는 이루어졌는데, 마지막 구절의 예언은 아직 남아 있다. 남아있는 예언을 이루어 내는 것이 후손된 자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 마지막 구절의 내용은 “마침내 한민족의 선도문화가 크게 번창하여 공산, 자유의 대립 파멸을 막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 이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난 후 1980년대에 이르러 현대 국학은 다시 시작이 되었다. 1987년에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고 안호상 박사 등 뜻있는 민족의 선각자들이 모여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 깨달음의 철학이자, 보편적 민주주의 정신이며, 민족단합의 구심이자 인류평화사상임을 만천하에 밝히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매년 개천절을 기념하는 축제를 민간 차원에서 복원하여 전국적으로 그리고 해외 동포사회에서 개최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오고 있다. 그 외에도 통일기원 국조 단군상 건립 운동을 벌여 초중고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369기의 단군상을 세웠다.  2004년에는 민족정신 및 역사, 문화의 연구와 교육을 위하여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이 있는 흑성산 자락에 국학원을 개원하게 된다. 이러한 국학원은 세워진 이래 동북공정 반대, 고구려 역사 지키기 등 민족의 정신과 문화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일을 해왔고, 또한 많은 공무원, 군인, 학생들이 다녀가며 나라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어서 살아있는 역사교육과 체험을 통해 우리 민족의 국학을 알리기 위하여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군조선의 역사는 가장 오래된 미래, 그 미래를 열어갈 우리들 모두는 21세기 단군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길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면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홍익의 가치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국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구인의 마음으로 우주를 품고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사람을 품는 다면 진정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루어질 것이다.

역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고, 삶 속에서 지혜를 제공하며,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연결시켜 준다. 그래서 역사는 지식으로만 받아드릴 것이 아니라 역사의 밑바닥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정신을 이해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고, 진정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이것이 어쩌면 ‘국학의 길’이고, 진정한 ‘한국인의 길’이 아닐까 한다. 글로벌시대에 세계로 뻗어 나가는 힘,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원천을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국학에서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