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과 우리 역사와 문화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국학을 알면 역사가 보이고, 문화가 보이며, 그때 보이는 세상은 분명 그 전과는 다를 것이기에 국학과 우리 역사와 문화는 남다른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학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 국학을 역사로 풀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민성욱 박사
그 동안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는 왕조사 중심으로 배웠다. 이제 좀 더 목적의식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민족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풀어 보는 것으로써, 전통문화가 불교나 유교가 아니라 그 이전에 고유한 전통문화가 있었으며, 그것에 주안점을 두고 우리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학을 알기 위하여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고, 나아가 어떻게 홍익정신과 전통문화가 역사를 타고 전해져 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동안 우리가 배웠고 알고 있는 역사 지식으로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진정으로 고유한 정신문화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역사가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은 나름의 고유한 정신문화가 있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고유한 정신문화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답을 우리나라 고대 역사서인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의 유사(遺事)는 후대에 남길만한 일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사인 『삼국사기』와 대비해서 야사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당시 생활상이나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고조선 건국관련 기록에, “옛날에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같은 기록에,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환웅이 이에 잠시 변하여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국조 단군왕검이라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역사는 위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홍익인간이라는 최고의 정신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 복지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이념이자 통치이념이 되었으며, 그 이후 우리 역사의 전개는 그러한 정신문화를 계승하는 역사였다.

우리에게는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으로 나라를 이끌었던 2천 년의 역사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조선의 역사인데, 1대 단군왕검부터 47대 고열가 단군까지 무려 47명의 단군이 존재했었고, 단군은 통치자이자 제사장의 의미를 갖고 있는 호칭이었다. 그러나 47대 고열가 단군 때에 이르러 수행하는 전통이 점차 사라지고 백성들의 타락이 끝이 없자 고열가 단군은 뜻을 이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단군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것은 민족의 건국이념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뜻을 닫아버린 것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폐관이라고 한다. 그 후 2천 년 간 우리 민족은 제 정신을 잃고 남의 정신에 최면이 걸린 채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살아있는 교육의 전통을 우리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인재양성제도를 보면, 고조선 이후 한국사 전개 과정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형태는 달랐지만 단군조선의 교육이념을 이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라의 화랑도이다. 단군조선시대에 국자랑이 있었다면 고구려와 신라는 각각 조의선인과 화랑이 있었고, 백제는 무절이라는 집단이 있었으며, 그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사무라이가 되었다. 고조선의 국자랑은 청소년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는 등 심신 수련과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들이 나갈 때 천지화를 머리에 꽂았다고 해서 천지화랑이라도 불렀는데, 여기서 천지화는 하늘을 가리키는 그래서 하늘을 닮은 꽃으로 강인하면서도 밝고 맑은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를 말한다.

먼저 신라의 교육은 화랑도를 중심으로 나라의 고유한 도인 선도(仙道)를 중심삼아 심신을 수련하여 국가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고, 당시 대외팽창에 따른 군사적 필요에 부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랑도는 6세기 진흥왕 때 제도가 정립이 되었고, 그 후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의 인재상은 국시인 다물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서 다물은 다 물려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구려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다 물려받고자 했을까? 우선 단군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고, 단군조선처럼 고구려도 천하의 중심이라는 천하관과 함께 인재양성제도를 물려받고자 했다. 고구려의 인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데, 교화를 관장함을 참전이라고 했고, 무예를 관장함을 조의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고조선의 국자랑을 고구려시대에는 조의선인이 그 맥을 이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선인은 조의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선배의 이두식 표기라고 할 수 있다. 선배는 『용비어천가』에  '션배'의 형태로 처음 나오는데, 요즈음 선배의 뜻은 학교나 직장을 먼저 다닌 사람 또는 자기보다 약간 나이가 많으면 선배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 학문과 무예 등 모든 방면에서 출중한 사람을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배, 즉 조의선인 출신으로는 명림답부,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과 같이 고구려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들이 많았다. 이러한 조의선인의 국가관은 왕에 대한 충성보다는 국가와 백성이 먼저였으며, 이들 조의선인의 선출은 가문과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았다.
고구려의 선배제도는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져 나라의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외적을 물리쳤다. 이렇듯 선비정신은 크고 작은 의병들을 이끌었고, 일제하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항일 활동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을 알 수 있는 것이 ‘세속오계’와 ‘임신서기석’의 내용이다. 우선 ‘세속오계’인데, ‘세속오계’는 말 뜻 그대로 원광법사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 이래로 세상 속에 존재하던 많은 계율 중에서 귀산과 추항이라는 두 화랑에게 가르침을 베풀고자 다섯 가지만 뽑아 온 것이다. 그 내용은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 이다. 이러한 ‘세속오계’가 불교 교리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살생유택’이다.

이러한 ‘세속오계’와 함께 신라인들의 정신을 헤아릴 수 있는 금석문이 ‘임신서기석’이다. ‘임신서기석’은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귀중한 유물로써 신랑의 두 젊은이가 학문을 닦아 오로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서한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비문에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 ‘충도집지(忠道執持) 과실무서(過失無誓)’라는 구절인데, 효와 충과 도를 굳게 지켜 아무 잘못이 없기를 하늘에 맹서하는 모습은 참으로 엄숙하고 숭고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세속오계’와 ‘임신서기석’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세속오계’와 ‘임신서기석’을 통해서 볼 때 당시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답을 신라 말 석학 최치원은 그의 난랑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최치원은 신라의 고유한 정신을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왈풍류(曰風流)” 즉 풍류라고 이름 하였다. 나아가 “설교지원(設敎之源) 비상선사(備詳仙史) 실내포함삼교(實內包含三敎)”라고 하여 풍류에는 이미 유불선의 개념이 내포 및 내재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와도 분명히 구별되는 우리의 독자적인 고유한 도임을 밝혔다. 여기서 우리는 화랑도가 선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선도문화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던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고구려가 망한지 30년 뒤인 698년에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은 개국하자마자 그의 동생 대야발을 시켜 전쟁 때 불타 없어진 민족의 고서들을 복원하라는 명을 내린다. 대야발은 형이자 황제인 대조영의 명을 충실히 받아 13년에 걸쳐 머나먼 돌궐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국조 단군왕검으로부터 고구려, 대진국에 이르기까지 천손대대로 계승되어 온 계통을 바르게 세웠다. 이것이 바로 단군조선시대의 역사서인 『단기고사』이다. 이에 대조영 자신은 한웅천황 때부터 전해져 내려 온 ‘삼일신고’에 찬양문을 짓고 대야발은 서문을 지었으며 개국공신이자 문적원감 임아상은 주해를 달았다. ‘삼일신고’는 ‘천부경’과 ‘참전계경’과 더불어 한민족의 고유한 삼대 경전 중 하나이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기록에서, “3대 문왕 대흠무가 태학을 세우고,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니 이에 동방의 현묘한 도가 백성들에게 전해지게 되어서 홍익인간의 교화가 만방에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발해는 고구려의 다물 정신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과 천하질서를 재편하여 해동성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 이것은 위와 아래가 합심하여 국사를 바르게 세운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발해는 고구려의 고토와 민족정신을 지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던 나라임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국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시작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다면 자기 뿌리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게 되고, 이것은 자기 자신이 속한 나라와 민족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국학을 통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국학을 알면 역사가 보이고 문화가 보이고 우리말이 보이는 것이며 그때 보이는 세상은 그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