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을 하나 더 해야 오늘 재판은 마무리가 되겠어.”
 
이명지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비류왕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비류왕의 고소를 받든가 어떤 역사연구단체의 고발을 받아 사라진 부하의 명칭을 회복하고 비류왕의 원한을 풀어드리는 재판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 지도에 성현星峴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달리 비리고개, 비류고개라고도 한다. 서울 가는 길에 있다.
 
“반드시 채판을 해야 하겠어?”
“재판을 하여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면 비류왕 쿼크가 앞으로 귀신의 본성을 발휘하여 이 나라에 무슨 해 꼬지를 하려 들지 모르지 않아?” 
“해 꼬지?”
 
생각해 보니 타당한 말이었다. ‘원한을 풀지 못한 귀신의 해 꼬지’라는 제목의 공포 영화 1편이 내 머릿속을 지나가기 시작하였다. 비류왕 쿼크가 귀신이 틀림없으므로 이번에 기회에 원한을 풀지 못하면 앞으로 신원할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므로 무슨 방법으로 부천 사람들을 괴롭히려 들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숙자에게 빙의하여 소래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금 감응신령께서 자네에게 재판권을 위임한 상태에 있으니 후환後患을 끊기 위해서라도 이참에 재판을 해 치우란 말이야.” 
 
그러나 재판에는 도움이 필요하였다.
 
“재판을 한다면 자네가 도와줄 거야?”
“당연히 도와주지.”
 
이명지가 흔쾌히 승낙하였다.
재판을 하려면 재판의 당사자가 될 비류왕 쿼크의 결심이 필요하였다. 그가 승낙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려는 재판이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아우라 속에 몸을 숨기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비류왕 쿼크를 불러내었다. 
 
“비류왕께서 지금 한가롭게 망중한을 즐기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내 아우라에서 나와 재판에 대하여 상의하십시다.”
 
비류왕 쿼크가 내 아우라 밖으로 나오더니 비류왕으로서의 위의를 갖춘 홀로그램으로 변신하였다. 가륵단군 때의 복장인 청의靑衣를 입고 변발을 하고 간략하게 춘분의 기를 도형화 한 금관을 쓰고 있었다. 그가 내게 처음 보여준 왕의 복식이었다. 재판에 임하려는 결심이 선 것 같아 보였다. 
 
“재판을 받으시겠습니까?”
“나는 그대가 비류왕의 후손으로서 나를 재판해 주기 바라네.”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이 될 것입니다.”
 
내가 결심을 했다고 해도 이번 재판은 감응신령의 윤허가 필요한 일이었다.
 
“비류백제를 신원하는 재판을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내 아우라에 계신 감응신령에게 물었다.  
 
“재판을 하지 않고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지금 재판을 하여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면 두고두고 자손대대로 후회할 일이 생기게 될 것 같습니다.”
“설마 후회할 일이 생기기야 하겠나.”
“지금 중국이 역사에 하는 짓을 보면 동북삼성東北三省 꼴이 나지 않겠습니까?”
 
동북삼성 꼴이란 고대역사에서 동북 삼성의 주인이었던 예맥족濊貊族의 역사를 화이華夷의 역사로 둔갑시키려 하는 사건을 말한다. 중국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우리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둔갑시켜 가고 있었다.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자국의 역사를 도둑질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을 해야지.”
감응신령의 윤허가 떨어졌다. 나는 대통령에게도 사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이곳에서 역사적인 재판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비류왕께서 피고인을 정하시고 고소인이 되시어 재판을 청구하십시오.”
 
▲ 고구려의 다물정신의 근거가 되는 다물지역도. 다물지역은 치우천왕이 황제에게 수공水攻을 당하여 빼앗긴 지역이다.
 
내가 비류왕 홀로그램에게 말하였다.
 
“대리인을 세우면 아니 되겠소? 이 일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살아있는 사람이 재판의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요. 쿼크인 내가 고소를 한다면 그걸 누가 인정하겠소?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데.”
 
듣고 보니 영계인에 속한 그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권리행사를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가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법률적으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나는 재판관의 절친한 친구 이명지를 대리인으로 내세우겠소. 그대가 승낙을 받아 주시오 ”
 
비류왕 홀로그램이 이명지를 비류왕의 대리인으로 지목하였다. 지금 이 시간에 이명지 외에 아무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류왕 쿼크가 당신을 대리인으로 지명하는데 받아들여.”
 
내가 이명지에게 말하였다. 
 
“내가 받아야 할 소명이라면 받아 들여야지.”
 
이명지가 승낙하였다. 이로써 사라진 부하를 회복하여 역사에 돌려주고, 비류왕의 나라 비류백제를 회복하여 역사에 돌려주는 재판이 가능하게 되었다. 소송의 명칭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취지를 살리기 위하여 「비류백제 국가 복원과 비류왕명 회복 소송」으로 하였다. 판결을 구하는 주문도 같은 취지의 주문으로 하였다. 이명지가 즉시 소송을 하였으므로 나도 즉시 재판을 열었다. 이 재판에 피고인은 없었다. 피고단체도 없었다. 사라진 역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셈이었다. 이명지가 사라진 역사문자를 그물을 던져 포획하려는 원고이자 증인이었다. 재판정은 대통령궁 본전 앞에 설치하였다. 방청석에 참석한 사람은 오늘 굿에 참여할 혁거세 선생, 사모인 근화, 한 베어 대표, 삼한의 여자 이숙, 대통령, 의전담당비서관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이 재판이 외부로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설사 외부로 새어나간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내게 거탑으로부터 영계인 방청인이 재판을 참관하기 위하여 거탑을 출발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거탑의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에 기분이 상하였다.
 
“거탑에서 재판을 방청하겠다고 통보가 왔습니다.”
 
나는 대통령에게 말하였다. 대통령은 시름에 빠졌다.
 
“저들의 침입을 막고 싶으십니까?”
“지금 우리가 막을 입장이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대통령이 애처롭게 보였다.  
 
“하긴……. 그러나 막고 싶으시다면 저의 유령군을 동원하여 막겠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영계인들의 입장을 허락하겠습니다.”
 
나는 거탑에 대통령의 결정을 보내주었다. 순식간에 순간이동으로 영계인들이 대통령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영계인 방청인들은 플라스마처럼 형체를 변경하여 들어왔다. 그러니 누가 들어오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플라스마 안에 영계인 대통령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무슨 이유로 이 재판을 방청하려 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이 나라의 대통령에게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틀림없이 하실 말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플라스마를 향하여 통신파장을 날렸다.
 
“좋은 생각이야.”
 
답 파장이 왔다.
 
“플라스마 안에 영계인 대통령이 와 계십니다.”
“그래요?”
“나오시라고 해야 하겠지요?”
“내가 약하니 도리가 없군요.”
 
▲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졸본, 오녀산성, 흘승골성, 고구려왕성 등 다양하게 불린다. (왼쪽) 비류와 관련이 있는 부이강과 혼강이 있고, (오른쪽) 추모왕과 관련이 있는 홀승골성은 무덤이 피라미드로 되어 있다.
 
나는 파장을 보내어 영계인 대통령이 플라스마에서 나오도록 하였다. 영계인 대통령이 플라스마 밖으로 나왔다. 나는 영계인 대통령을 나의 대통령 곁으로 안내하였다. 간단하게 인사가 끝났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만남이었다. 두 분이 나란히 앉았다. 재판이 개정되었다. 형식적인 절차는 모두 생략하였고 직접 재판으로 들어갔다. 
 
“삼한의 역사에서 인천과 부천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나는 고소인이자 증인인 이명지에게 물었다.
 
“역사에서 기록을 남지지 않았지만 부천의 역사는 소래의 역사에 함몰되어 있거나 인천의 역사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이들 역사는 모두 사라진 역사입니다. 그래서 삼한역사와 초기백제 역사에서 부천의 역사가 세상에 알려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재판이 성공하면 일실된 소래의 역사를 복원하고 복원한 역사에서 부천의 역사를 일부나마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천의 역사를 소래의 역사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보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인천의 역사는 있어도 소래의 역사는 없지 않습니까?”
“소래의 역사가 인천의 역사에 함몰 당했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나는 집요하게 이명지를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소래의 역사를 찾고 그 안에서 부천의 역사를 찾아야 해! 하고 외치고 있었다. 이명지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기록된 자료가 국내에 없는데 어떻게 사라진 역사를 찾으려합니까?”
“제가 개발한 역사문자 알고리듬 엔진을 가동하면 찾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좋소. 이번 재판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어디 해 봅시다.” 
 
그렇다면 이명지에게 질문의 공세를 퍼부어 코너로 몰고 가도 괜찮을 것 같아 보였다.  
 
“고대사에서 인천의 지명이 몇 개나 있는지 거명해 보시오.”
“고구려 추모왕(BC 59년-19년) 때의 미추홀彌味忽, 신라 경덕왕(?-765년) 때의 매소홀買召忽, 고려 인종(1109年-1146年) 때의 소성邵城이 있습니다.” 
“이들 지명에 대하여 설명이 가능합니까?”
“역사와 문자 알고리듬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설명하시오.” 
“미추홀에서 먼저 미彌자를 해석하겠습니다. 미추홀이라는 말은 당시에 고구려와 백제에서 쓰던 말을 한자화 하여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는 문자입니다. 미彌자에는 ‘사사직도祀社稷禱’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직직도에서 ‘사직’에 ‘제사지내 소원성취를 빈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모비母婢’라는 뜻도 있습니다. 모비의 뜻은 ‘부인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부른다’는 뜻이라 합니다. 미彌자는 소서노(연타발의 차녀, 延陀勃之次女)의 아들과 관련이 있는 소서노의 아들을 뜻하는 ’너‘자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소서노가 추모왕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기를 낮추어 한 말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미彌자를 궁弓+이爾자로 보면, 활을 가지고 있는 너(여汝)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소서노와 아들과의 관계를 나타낸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서노가 아들 비류를 부를 적에 미자를 써서 ‘너’로 불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추자를 해석하겠습니다. 추鄒자는 추모왕을 의미하는 말이고, 홀忽자는 골(谷), 즉 마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미추홀은 소서노召西弩(奴) 쪽에서 보면, “소서노와 추모왕의 마을”이 되고, 아들 비류 쪽에서 보면,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 “네가 사직에 제사하고 기도하여 소원성취 하여 얻은 추모왕의 마을”로 해석이 됩니다.”
“미추홀이 누구의 땅이라는 말입니까?”
“추모왕에게서 받은 비류왕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무의식중에 추모왕을 3번 외우고 있었다.
나는 잠깐 추모왕을 보았다. 내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게 와서, 
 
“내가 고소인의 증인을 서 주랴?”
 
하고 묻는 것이었다.
 
“도움이 될 진술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대들이 너무 나약해서 나는 지금 울화가 치밀어 죽을 지경이다. 다물 정책의 시행자인 고구려가 화이의 지방정부라니 말이 되느냐?”
 
다물이란 고구려에서 썼던 ‘다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치우천왕이 황제 에게 멸망하여 빼앗겼던 청구의 옛 땅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고구려가 당의 지방정부 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고구려는 수隋와 당唐이 나라가 되기 전부터 고구려가 있던 자리에 있었다. 
 
“대왕이시여, 어떤 판결을 원하십니까?”
“고구려의 역사를 훔치려는 자들을 자체발화 화장터로 보내는 판결을 원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 홍익위반죄를 물어서 자체발화 화장터로 보낼 판결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물쭈물 하지 말고 후딱 해 치워.”
“후딱 해 치우겠습니다.”
 
나는 추모왕이 이 재판에 개입하기 시작했으므로 몸에 땀이 나기 시작하였다. 추모왕이 재판에 간섭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무언데?”
“비류왕이 백제 역사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그 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온당치 못한 처사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지.”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그대가 비류왕에게 나라를 찾아 주게.”
“알겠습니다.”
 
▲ (왼쪽) 소서노의 고향 소원진과 온조의 고향 온향과 (오른쪽) 비류의 고향 부이강이 있는 압록강의 지류 혼강.
 
다행스럽게도 추모왕은 구리시에서 벌이는 ‘고구려축제’에 가야 한다고 자리를 떠났다.  
 
“매소홀에 대해서도 해석하시오.”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이면지에게 2번째 질문을 하였다.
 
“미추홀은 후대에 가서 고구려로 주인이 바뀌면서 이름이 매소홀買召忽로 바뀝니다. 매소홀은 미추홀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를 밝혀 주는 이름입니다. 매買자가 ‘산다, 매입買入하다’는 의미이고, 소召자가 소서노의 성이므로, “소서노가 추모왕에게서 산 땅”으로 해석되는 이름입니다. 이 지명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고구려가 비류를 버리고 소서노를 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비류가 소서노의 친아들이 아닐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비류를 버리면 비류의 땅이 온조의 땅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가설이 성립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서부터 고구려와 백제가 온조를 소서노의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하여 비류를 백제역사에서 추방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류가 소서노의 친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가설이라…….”
 
나는 무의식중에 매소홀을 3번 외우고 있었다. 이때 매소홀이 신라의 경덕왕을 부르는 주문이 되어 경덕왕이 나타났다. 
 
“매소홀이라는 지명이 마음에 드는가?”
 
경덕왕이 물었다.
 
“역사 알고리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1백점짜리 지명입니다. 대왕은 미래에 오늘의 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대왕의 예지력이 탁월하십니다.”
 
나는 경덕왕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 나라에서 여느 역사가도 나를 칭찬하는 자가 없었는데 그대가 나를 칭찬하다니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군. 내가 그대를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게.” 
“칭찬을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고장이 소서노가 추모왕에게서 산 땅이 맞습니까?” 
“맞아.”
“제가 원하는 답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대답을 듣고 경덕왕이 사라졌다.
 
“소성에 대해서도 해석하시오.”
 
나는 이명지에게 말하였다. 
 
“매소홀은 백제가 신라에게 멸망하면서 이름이 소성邵城으로 바뀌었습니다. 소邵는 소씨召氏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소성이 처음에 召와 邵의 두 성이 있었으나, 두 성이 소卲로 합치면서 소邵씨로 불리게 되었다고 『씨족박고氏族博考』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가 멸망시킨 고구려의 추모왕과 백제의 소서노 어하라의 잔재를 지우기 위하여 매소성의 買자와 召자를 버리고 소성邵城으로 바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미추홀은 주인이 고구려로 바뀌면서 매소홀로, 다시 주인이 신라로 바뀌면서 소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세 가지 이름에 삼국시대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나는 무의식중에 소성을 3번 외우고 있었다. 
이번엔 고려의 인종이 나타났다. 내게 고려의 인종이 나타났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고려의 역사는 나의 전공분야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성이라는 지명이 마음에 드는가?”
 
인종이 내게 물었다.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가 도울 일은 없는가?”
“아직은 없습니다.”
“도울 일이 있으면 나를 불러. 그대가 소성! 소성! 소성! 하고 외치면 득달같이 나타날 테니까.”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소서노와 추모왕을 증인으로 신청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 자네가 지금 내게 한 것처럼 그분들과 관련이 있는 지명을 3번만 외우면 그분들이 나타나 줄 거야.”
 
인종은 내게 중대한 비밀을 알려주고 사라졌다.
 
“미추홀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명지에게 물었다. 
 
“인천시청이 「인천의 지명을 소개하는 글」에서 미추홀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760년 영조 36년에 발간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인천의 문학산성文學山城을 미추왕고도味鄒王古都(미추왕은 추모왕의 오기로 보입니다)라 하였습니다. 이곳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 “비류가 도읍한 곳”으로 명기하였습니다. 고구려에서 미추홀을 매소홀로 개명한 것으로 보아서, 이곳도 소서노가 추모왕에게서 사들인 땅 매소홀買召忽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소서노가 이곳에 그의 대리왕으로 비류를 임명하고, 온조를 데리고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지경을 넓히며 옮겨 갔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합니다.” 
“고소인은 미추홀이 문학산성이라 믿소?”
“저는 산동반도과 한반도의 역사통로인 소래로 보고 있습니다.”
“소래라……. 이유를 말하시오.”
“설명이 깁니다.”
“길어도 괜찮소.” 
“춘추전국시대에 동이족이 살고 있었던 산동반도는 전화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제국齊國과 노국魯國과 초국楚國이 동이족의 영토를 빼앗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킨 전쟁범죄자들이었습니다. 여러 소국들로 나뉘어 흩어져 살던 동이족은 이들 전쟁범죄자들에게 쫓겨 산동반도를 탈출하였습니다. 산동반도에 있는 여러 항구는 동이족의 탈출항구였습니다. 동이족은 모족牟族, 추족鄒族, 온족溫族, 涿族탁족, 래이족萊夷族, 선족鮮族, 한족韓族, 소족邵族 등 여러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제수濟水를 끼고 살던 사람들은 제수로 탈출하였고, 황하黃河를 끼고 살던 사람들은 황하를 탈출하였고, 장강長江을 끼고 살던 사람들은 장강을 탈출하였습니다. 발해만에 있는 각 항구가 이들이 탈출하는 탈출항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한반도에 와서 배를 댄 곳이 소래蘇萊와 화성華城과 고창高敞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래이족萊夷族이 있습니다. 래이족은 산동반도의 동쪽에 살았던 래국萊國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한반도에 와서 소래 가까운 곳에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을 세웠습니다. 모국 사람과 탁수涿水(탁록涿鹿)에서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우체모탁국이었습니다. 우체모탁국의 모牟자가 후대에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鄒牟王의 모牟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 산동반도에서 조선이 진에게 멸망한 이후에 동이족이 처음 세운 래국. 래국이 조선과 삼한 사이에 끼어서 고대역사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추모왕을 3번 외었다.
그러자 추모왕이 나타났다. 
 
“왜 나를 부르는가?”
“이명지의 진술이 맞는지 확인해 주십사고 모셨습니다.”
“맞아.”
 
추모왕은 사라졌다. 이번엔 ‘고구려축제’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추모왕의 모자와 우체모탁국의 모자가 어떤 관계가 있소?”  
 
내가 이명지에게 물었다. 
 
“추모왕은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시호입니다. 우체모탁국에 고주몽의 시호 모牟자가 들어 있습니다. 모자는 고주몽이 모국인과관련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에 주朱자가 들어 있어서 그가 주국邾國과도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주국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모국 사람이 되기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국과 주국은 산동반도에 있는 나라들입니다. 모국은 우체모탁국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체모탁국에 모국 사람과 주국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우체모탁국이 멸망한 후에 나타나는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체모탁국은 삼한시대에 부천과 부평과 소래에 있었던 나라인데, 우체모탁국의 탁涿자가 탁수에서 온 청구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구의 중심을 흐르는 강물을 탁수涿水라 하는데, 우체모탁국에 들어있는 탁涿자가 탁수와 탁록涿鹿을 의미합니다. 고구려는 국가정신으로 다물정신多勿精神을 내세웠는데 다물정신이란 황제에게 멸망한 치우천왕이 다스렸던 청구국靑邱國을 수복하자는 정신을 말합니다. 청구국이 있었던 곳이 탁록입니다. 우체모탁국 사람들이 탁수에서 지명이동을 해 와 우체모탁국이라는 국명에 썼습니다. 탁자가 고구려의 다물정신의 모태母胎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체모탁국 사람들이 국명에 탁자를 썼다는 것은 탁수 출신들이 한반도에 새 나라 우체모탁국을 세우면서 고구려가 다물정신을 선포하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보다 먼저 다물정신을 선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모왕에 대하여 말하시오.”
“추모왕은 이름이 고주몽高朱蒙입니다. 고高는 모계족성母系族姓이고, 주朱는 주국邾國 출신이라는 뜻이고, 몽蒙은 아버지의 씨칭氏稱입니다. 그를 지나의 학자는 주루족朱婁族이라 합니다. 우리말로 주족邾族이라는 말입니다. 전욱고양이 주국의 시조라 전해옵니다. 주국을 추국邹国이라고도 하는데 주루邾娄라 칭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산동반도에 있는 비費, 추邹(zōu鄒), 등滕, 제저济宁, 금향金乡 등의 현縣의 지역이 주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고주몽은 이들 지역 어디엔가에서 출생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를 산동반도에 살았던 동이족 출신으로 보면 그의 선조가 춘추전국시대에 산동반도를 떠나서 소래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선조에게서 다물정신을 이어받았다면 소래에서 북상하여 그가 고구려를 세운 졸본卒本으로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모왕과 비류왕과의 관계를 말하시오.”
“비류왕은 온조왕과 함께 추모왕의 의자義子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생모는 소서노로 알려졌습니다. 두 의자의 생부는 우이(태)로 알려졌습니다. 사서에 이들의 역사가 부여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고장의 이름으로 성을 삼았으므로 이런 기록에 따르면 
소서노의 성은 소召, 고주몽의 성은 주邾,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의 성은 연延, 비류의 성은 그가 태어난 부하의 부富, 온조의 성은 그가 태어난 온溫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엔 성을 조상으로부터 승계하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태어난 곳이 어디라는 것은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소서노의 족성 소召는 소원진邵原鎭에서 나온 성입니다. 소원진은 소성召姓의 국가가 있었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온조의 성 온은 온현溫縣에서 나온 성입니다. 연타발의 연延은 연진延津에서 따온 성입니다. 소서노는 제수濟水 북쪽의 하북河北, 온조는 제수 남쪽의 하남河南, 연타발은 제수 북쪽의 하북 출신입니다. 소서노와 온조가 한반도의 소래로 들어와서 동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정착한 한강 가의 하남河南은 중국의 제수이남濟水(河)以南이 지명이동을 해 온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남성河南省에서 왔음을 알리는 뜻입니다.
이들은 모두 제수를 끼고 살아 온 풍이족風夷族의 후예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풍이족의 후예인 진짜 동이족이었습니다. 중국 쪽의 기록은 ‘산동반도의 제수 유역이 풍성을 가진 동이족이 집단으로 사는 지역’(山东济水流域是风姓东夷族的聚居地)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제수유역에서 살다가 한반도로 건너온 소서노와 온조의 원래의 족성이 풍성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한반도로 왔을 때 그들을 래이족萊夷族이라 하였습니다.
래이족이란 풍이족이 떠나와 정착한 부족이라는 뜻입니다. 래이족은 산동반도의 동쪽 끝에 래국萊國을 세웠습니다. 래국은 조선이 진에게 멸망한 이후에 처음 세운 나라였습니다.”
“비류와 온조에 대하여 말하시오.”
▲ 비류가 넘었을 것으로 추리가 가능한 비루(비류)고개와 래이족이 상륙했을 것으로 보이는 소래포구. 소래포구는 삼한시대 초기에 하백 소벌도리가 상륙하였고, 삼한시대 말기에 어하라 소서노가 상륙하였고, 삼국시대 때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당군의 소정방이 상륙했을 것으로 보이는 역사의 현장이다.
 
내가 이명지에게 말하였다.
 
“제수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 비류가 인솔하는 한 부류는 제수 하구河口를 떠나서 압록강 북쪽에 있는 졸본에 정착하였고, 소서노와 온조가 인솔하는 한 부류는 소래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들어와 부천에 정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달리 두 부류가 모두 함께 졸본으로 갔다가 부천으로 남하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2가지 가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말기의 산동반도의 역사를 한반도의 삼한역사에 접목시킨 획기적인 가설이었다.
 
“계속하시오.”
나는 이명지에게 말하였다.
 
“인천광역시의 남동구 만수동에서 부평구 일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비리(비루) 고개라 하는데, 이 고개가 백제를 세운 온조와 비류가 넘어간 고개로 볼 수 있습니다. 비류가 문학산에서 비류국을 세웠다고 전해 오는데, 이곳은 부천과 소래와 인접한 곳으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비류는 부이강 출신이었고, 부이강은 혼강의 지류입니다. 혼강은 비류수라 합니다. 비류의 이름이 비류수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이곳에 살았다고 전해 옵니다. 저는 고주몽이 산동반도에서 이곳에 이주해 온 주루족邾婁族 출신으로 봅니다. 다른 설에 따르면, 비류수는 지금 길림성에 있는 임유하林柳河라고도 합니다. (一说即今吉林柳河)  고주몽의 어머니의 이름이 유화柳花였으므로 임유하는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와 관련이 있는 강으로 생각되지만, 비류와 관련이 없는 곳으로 생각됩니다.『제기济纪』에, ‘고주몽의 후처 소서노의 전 남편의 이름은 우이로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는 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济纪』有朱蒙的后妻之前夫优台是北夫余王解夫娄庶孙之说)고주몽이 졸본에 고구려를 세웠음으로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깊이 관
 
 
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소서노는 고주몽과 갈라져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고주몽의 친자 유리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설에는 지금의 요녕성 동북쪽에 있는 환인桓仁의 부하富河를 비류수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一说即今辽宁东北桓仁富河) 부하富河(혼강의 지류, 今浑江支流富尔江之说)를 다른 말로 바꾸면 부천富川이 됨으로, 지금 소래와 붙어 있는 부천富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부천에 강이 없는데 부천이라 한 것을 보면 비류가 부하(부이강)에서 가져온 지명이동地名移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명이동이라는 관점에서, 부천은 비류가 정착한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설을 하나 만들 수 있습니다. 역사기록에, 온조와 비류가 의견이 맞지 않아 온조는 하남 쪽으로 갔고 비류는 인천 쪽으로 갔다고 했는데, 온조와 비류가 영원히 갈라선 곳이 부천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부천을 부하의 지명이동으로 보면, 혼강의 지류인 부하를 떠나 부천으로 온 비류야말로 지금의 부천에서 부하의 역사를 시작한 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류가 백제 초기 역사에서 존재가 미미해진 것은 역사가들이 백제역사에서 비류를 죽이고 온조를 살리려 한 데에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제수를 출발하여 한반도로 이동한 부족을 십제十濟라 했는데, 십제란 제수를 떠나온 10개의 부족이라는 뜻입니다. 10개의 부족이 소래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부족은 제수를 끼고 있는 지역의 주민들입니다. 이들 부족 중에서 비류가 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길림의 부여扶餘사람은 전쟁을 피하여 이곳에 온 부유鳧臾인과 동족이다. 부여는 하북 낙정樂亭, 낙정雒亭의 고칭古稱이다.’ (吉林扶馀族人与后来因战争而南迁的凫臾人为同族,河北乐亭古称)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낙정雒亭은 낙樂자와 낙雒자에서 같은 음 ‘낙’을 취하고 뜻은 수리부엉이(雒)만을 취했습니다. 수리부엉이는 올빼미와 닮아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새인데, 올빼미는 단군왕검의 인종 아이콘이고 그 뜻을 추론하면 ‘~온 뱀’이 됩니다. ‘~온 뱀’은 ‘어디에서인가 이곳으로 온 풍이족 출신’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수 유역에서 온 풍이족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여와 부유는 여와 유가 같은 음이므로 같은 풍이족입니다.  중국 발해만 진황도시秦皇島市에 속한 창려현昌黎縣을 옛날에 부여扶黎라 했는데(昌黎古称扶黎), 이 부여는 부유鳧臾, 부여夫餘와 같은 뜻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 쪽의 기록은 유이해인臾夷奚人의 생활지구生活地區라 하였습니다. (都是臾夷奚人的生活地区) 유臾는 부유鳧臾, 이夷는 고이高夷, 해奚는 해족奚族(太陽族)를 말합니다. 이들을 모두 한마디로 말하면 부여夫餘가 됩니다. 부여가 다인종국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다인종 중에서 중심에 있었던 인종을 해족奚族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쪽의 기록은 해인이 옛날로부터 밧줄을 엮어 결승문자結繩文字를 만들어 썼고, 변발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奚人自古结绳索编发辫) 이들을 색리索离라 하였습니다.(统称索离) 색리족에 대하여 중국 쪽은 ‘예맥인으로서 지금 중국의 북쪽에 살았던 인종으로 잘 알려진 구이족의 하나이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索离族为濊貊人的北支是著名的九夷之一)。색리족은 지금 중국의 눈강嫩江 동쪽에 살았습니다.(索离人生活在今天的嫩江以东) 눈강은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살던 곳입니다. 파소는 이곳 출신입니다. 송화강 이북과 눈강 이남 사이에 있는 평원지대를 송눈평원지대라 말합니다. (松花江以北的松嫩平原地带) 이곳에서 돼지, 말, 소를 사육하였고, 개를 데리고 사냥도 하였습니다. (主要饲养猪、马、牛,又善于狩猎) 
 
색리족이 중국의 북부에 색리국을 세웠습니다. 색리족 사람은 ‘동명’을 ‘왕’과 같은 뜻으로 썼습니다. (索离族人东明称王) 고구려 사람들이 시조를 동명성왕(동명=성왕)이라 칭한 점으로 보아서, 이들이 색리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 칭했으므로 색리족의 말 동명과 주족邾族의 말 성왕을 붙여 쓴 것이니 색리족을 주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한시대에 이미 색리인의 사회 내에서 예족과 색리족이란 이름을 쓰지 않고 부유라는 족명을 사용하였습니다. (不用濊族和索离族名而采用凫臾族名) 중원의 한왕조가 부여夫余라는 이름을 택하였다가 후에 부여扶余로 고쳤습니다. (中原汉族王朝译作夫余,后改为扶余) 
 
중국 쪽의 연구자는 부여에서 여러 부족이 떨어져나갔다고 하였습니다. 부여족에서 떨어져나갔다고 한 족속이 조족朝族, 선족鲜族, 한족韩族, 건족乾族, 간족斡族, 양족阳族(해인奚人), 등 6개 부족입니다. 조족은 조하에 살았고, (朝族居潮河) 선족은 선수에 살았고, (鲜族居鲜水) 한족은 홍산에 살았는데, (韩族居红山) 이를 다 합쳐서 태양한황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即为太阳韩荒) 한황은 한족이 사는 개간하지 않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조족의 거주지인 조하潮河는 북경 동북쪽에 있는데, 하북성 봉저현 조년구 남산이 발원지가 됩니다. (源于河北省丰宁县槽碾沟南山)  심평현을 경유하여 옛 북구에 도달하여 북경시 밀운현 경계로 들어옵니다. (经滦平县到古北口入北京市密云县境)  
  
선족의 거주지인 선수鮮水는 아롱강 왼쪽 강안의 지류인데 지금은 선수하라 합니다. 선수는 옛날에 주강州江으로 불렸습니다. 청해성 채일현 파안객라산 남쪽 기슭이 발원지가 됩니다. (源于青海省达日县巴颜喀喇山南麓) 북쪽은 니곡이라 하는데 니가하의 발원지입니다. (北源称泥曲泥柯河) 니가하는 노곽에 있는 사천성 색체현의 경계로 흘러듭니다. (流入四川省色达县境在炉霍) 휘어지는 남쪽 발원지와 합해져 선수하로 불립니다. (與南源达曲汇合后称鲜水河)  
 
한족의 거주지인 홍산紅山(新疆乌鲁木齐红山)은 홍산문화 유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곳입니다. 홍산은 오노목제시 중심지인 홍산 공원 안에 있습니다. 오노목제가 번성하고 발전하여 주변국을 정벌하였습니다. (红山位于乌鲁木齐市中心红山公园内,是乌鲁木齐繁荣发展的象征) 오노목제는 기세가 웅휘하였고 형태가 장관이었습니다. (它气势雄伟形态壮观) 
 
해인의 조상은 지금의 본계本溪, 조양朝阳, 반금盘锦에 살았습니다. 조족과 선족이 합병하여 조선조양이 되었습니다. (朝族和鲜族合并为朝鲜朝阳) 
한족인이 한국을 세웠습니다. (韩族人建立韩国) 그들은 장차 오늘날의 한국인이 될 인종의 중간 인종이었습니다. (现在有媒体将韩国人) 이들을 고구려인으로 칭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又称为“高丽人”是讹误) 실제로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뉜 지손으로 (实际上高句丽是北扶馀的分支) 동부여족인의 후대사람들입니다. 남방의 한족에는 속하지 않습니다. (东扶馀族人的后代,并不属于南方的韩族)
 
위에서 보았듯이 동이족(예족)과 예맥족이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점으로 보아서, 제수齊水 출신의 소서노와 온조를 동이족으로 보면 비류는 부하 출신의 맥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이족과 맥족은 근본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동이족 계열인 주국邾國 출신의 고주몽高朱蒙이 합류하여 소국邵國 출신의 소서노와 온국溫國 출신의 온조溫祚와 연국延國 출신의 연타발이 모여 다국적多國籍의 일가一家를 이루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국國과 읍邑을 동의어로 쓰던 시대였습니다. 각국의 인구수는 수천 명에서 2만 명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 (왼쪽) 요녕성 한인현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도기와 철기. 단국의 유물로 도 볼 수 있는 유물이다. (오른쪽) 중국에 소개된 비류왕의 초상이다.
 
여기에 비류국 출신의 비류마저 합류하여 소서노 일가는 막강한 세력을 갖게 되고, 고주몽이 고구려를 창업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예맥족의 분포를 중국 쪽의 기록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예맥은 중원의 남쪽에서 시작하여 요동반도의 북쪽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인종입니다. 예맥은 함곡관 동쪽(關東)에 살았던 인종을 지칭합니다. (濊貊主体在关东) 주周가 상商을 멸망시킨 이후에 점차 동부지구로 쫓아내었습니다. (周灭商后逐渐迁至其他东部地区) 이 문장은 왜곡된 기록으로 보이므로 다음과 같이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이 진에게 멸망된 이후에 동쪽으로 쫓아내었습니다. (周灭商后逐渐迁至其他东部地区) 진시황이 서불을 시켜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산동반도를 떠나서 한반도로 불로초를 찾아오라고 보낸 사건은 이때 만들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예맥인의 일부가 헤어져 고조선반도의 북부로 이주하였습니다. (另有一部分濊貊人迁至古朝鲜半岛北部(滿洲地域)가장 멀리 간 예맥인은 한강 남북의 양안에 도착하여 예맥인의 족적을 남겼습니다. (最远到汉江南北两岸都有濊貊人的足迹)
 
이 기록은 예맥인이 래이족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래이족이 한반도에서 삼한시대를 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예맥인이 정착한 한강의 남북은 후대에 한성백제의 중심부가 된 곳입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동호東胡입니다. 동호는 동쪽 멀리 떨어져 있는 부족이라는 뜻입니다. 동호는 선비라는 설이 있습니다. (东胡鲜卑说) 동호가 선비에 속한다는 설입니다. 동호는 선비 계열의 인종이 살고 있는 다수의 부락의 총칭이라 합니다. (这是一个很多部落的总称) 
 
양한兩漢시대에 오환烏桓, 선비鮮卑, 계단契丹이 있었습니다. 『구당서旧唐书』의 「실위전室韦传」에, 몽올실위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中记载有“蒙兀室韦) 선비와 실위를 한 개의 같은 소리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有人认为鲜卑与室韦是同一个字的两种音译) 몽골의 실위는 계단(글안) 계통어에 속합니다. (蒙古室韦属于契丹系统) 몽골은 글안과 언어가 닮았습니다. 복식, 변발, 각궁을 사용하는 풍습도 선비와 같습니다. (语言与契丹相类,而服饰、辫发和使用“角弓”的风俗习惯与鲜卑相同) 선비, 글안, 실위몽골은 모두 다 동호일족의 계열에 속함을 볼 수 있습니다. (可见鲜卑、契丹、室韦蒙古都是属于东胡之一族系的) 비류를 동호인으로 볼 수 있을까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 1. 시조 동명성왕 편에 비류국沸流國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비류왕의 나라라는 명칭입니다. 고주몽이 고구려 시조 왕으로써 인접한 말갈靺鞨의 침입을 물리친 때가 22세 때였습니다. 왕은 비류수에서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이때는 사냥 자체가 정벌의 의미를 갖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비류의 이름을 가진 비류국을 다스리는 자는 비류가 아니라 송양宋讓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송양은 ‘송자가 들어가는 땅을 넘겨주었다’는 뜻입니다. 송양은 고주몽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고주몽은 비류국을 돌려받고 송양을 다물도주로 임명하였습니다. 비류국이 치우천왕이 황제에게 빼앗겼던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주몽이 비류국을 돌려받았다면 송양이 어느 누구에게서 비류국을 빼앗았다는 말이 됩니다. 누구에게서 빼앗았을까요? 비류에게서 빼앗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주몽이 송양에게서 돌려받은 것이고 이를 다시 비류에게 돌려주었으므로 다물도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겠습니다. 이때 비류가 고주몽과 소서노가 새로 창설한 어하라가에서 요구하는 장자로 입적하는 의식을 치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비류가 소서노에게서 태어난 친자가 아니고 소서노와 고주몽이 정치적인 조치로 소서노에게 양자 입적이 되어 태어난 아들로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고주몽과 비류의 양자관계는 고주몽에게 친 장자 유리琉璃가 나타남으로써 깨어지게 됩니다. 비류는 고구려를 상속 받을 수 없게 되자 소서노, 온조와 함께 그들이 살던 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이 간 곳을 부천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서노와 온조가 10제를 이끌고 먼저 소래에 상륙하였고, 비류가 후에 홀로 소래에 상륙하였다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 부유=부여의 근거지 눈강현. 눈강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婆蘇가 신라로 떠나온 곳이다.
 
지금은 소래의 일부를 시흥시(소서노가 소래에 상륙했을 당시에 군포, 안양, 영등포, 서초 일대를 포함하여 잉벌노仍伐奴라 하였습니다)가 관장하고 있는데, 당시에 시흥을 포함한 주변 일대의 지명을 잉벌노라 했던 점으로 보아서, 미추홀을 추모왕으로부터 매입한 소서노가 온조와 함께 토착세력을 정벌해 나가면서 그가 인솔한 백성들을 살게 하여 잉벌노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잉仍자는 人+乃자로 ‘이어 사람을 살게 하다’는 뜻으로 풀이가 가능하고, 벌伐자는 소서노가 토착민을 토벌했다는 뜻으로 풀이가 가능합니다. 노奴자는 소서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잉벌노는 ‘소서노가 정벌하여 얻은 땅’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진술이 끝났다. 
 
“반대 심문할 분이 안 계십니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주위에서 반대심문을 할 만한 사람이 발견되지 않았다. 
 
“심문을 종결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후에 말하였다. 이제 판결할 시간이었다. 나는 이명지가 원한 주문대로 판결하였다. 비류에게 부천을 돌려주는 판결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비류왕이 품고 있던 원한의 일부가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경우에 비류왕이 품고 있던 원한이 풀려 왜곡된 역사가 치유되었다고 볼 수 있고, 이로 인하여 비류왕의 영토가 비류에게 다물이 되었으니 복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를 해혹복본이라 할 수 있었다.(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