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갑오년에는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던 한 해였다. 그래서 아픔도, 슬픔도 많았다. 그리고 다시 맞이하는 을미년, 우리 역사에서 을미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한다. 그렇게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숱한 을미년이 지나고 2015년의 을미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간지가 생긴 이래로 육십갑자는 그렇게 우리 역사와 함께 해 왔고, 갑오, 을미, 병신은 또 그렇게 우리 의사와는 관계없이 항상 연이어 다가 왔다.
갑오년, 밑으로부터의 개혁이었던 동학농민운동이 당시의 위정자들이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실패로 돌아갔고, 그 결과로 외세(일본)에 의한 개혁이 단행되었으며, 우리 땅에서 벌어진 외국 간의 전쟁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고, 그 전쟁의 희생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되었다.

▲ 민성욱 박사

반면에 일본은 1876년 병자년에 체결한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부터 1895년 을미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당시 청나라와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 등에서 줄기차게 조선은 자유 독립국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이미 자유 독립국 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유 독립국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와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04년 갑진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서구열강들의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러시아 뒤에는 프랑스가 있었고, 일본 뒤에는 미국과 영국이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년에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결국 11월 을사늑약을 대한제국에 강요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간 개혁은 또 다른 시련을 예고하고 있었다. 명성황후시해 사건인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민족의 정신은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비록 항일의병은 일어났지만 그 힘이 미약했고 구심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오갈 데 없는 신세로 결국 1896년 병신년에 황제와 황태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일명 ‘아관파천’이라는 병신 같은 짓을 하고 만다. 결국 나라의 곳간 열쇠를 러시아 등 서구열강들에게 넘겨준 결과가 되었다. 황제가 없는 가운데 러시아 공사와 일부 친러파에 의해 국정은 농간되었고 나라 안은 피폐해졌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과적으로 국권을 빼앗기게 되는 경술국치의 치욕과 수모를 초래케 했다.

우리 역사 속 을미년은 근대사가 말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들만 있었을까? 말 나온 김에 우리 역사에서 을미년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역사 속 을미년에 일어난 주요 사건 기록들을 연도별로 정리해 보았다.

▲ 역사 속 사건 기록을 통해서 본 을미년.

우리 역사에서 을미년하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935년의 을미년과 1895년의 을미년이 그것이다. 근대 을미년을 대표하는 1895년은 조선후기로 수차례 개혁 실패로 국운이 꺼져가고 있던 시기라면 고대 을미년을 대표하는 935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 다시 분열되었던 후삼국을 통일하는 고려가 민족의 대융합을 추진하는 시기였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의 우리 역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 나라가 오랜 기간 유지하다 보면 많은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신라는 불완전한 삼국통일을 바탕으로 민족의 융합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당나라의 도움으로 삼국 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고유한 정신문화는 배제한 채 유학을 통한 인재 양성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화랑도의 정신은 점점 쇠퇴하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외래사상과 문화는 점차 신라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결국 신라 사회는 타락하고 나라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등장하면서 다시 우리 민족은 후삼국시대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민족 대융합 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었고, 비전을 심어 주었다. 먼저 934년 갑오년에는 발해국 세자 대광현 등을 받아 들였고, 고려의 왕성인 왕씨를 내려 주면서 극진히 대우해 준다. 발해가 926년에 거란족의 침입으로 수도 상경용천부가 함락되면서 발해왕조가 멸망하였고, 그 이후 발해유민들의 부흥운동이 상당한 기간 동안 있어왔다. 하지만 부흥운동도 결과적으로 실패하면서 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약 200년 동안 수십 차례 발해유민들의 망명을 받아 주게 된다.
 

이것은 왕건의 민족 대융합 정책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고려의 힘으로 작용하였다.
드디어 936년 을미년에는 먼저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고려의 왕건에게로 투항하게 된다. 이때 왕건은 견훤을 상왕과 같은 예우를 하게 된다.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하기 직전, “내가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나의 군사는 고려군보다 갑절이나 많은데도 이기지 못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삼국유사』견훤 열전)라고 했다. 후백제의 자중지란은 고려군보다 두 배가 많은 군사력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어쩌면 역사는 군사력과 전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인화(人和)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경순왕은 992년 간 이어온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를 들어 왕건에게 갖다 바치며 기꺼이 고려의 신하가 되고자 하였다. 이에 왕건은 그를 받아들여 사위로 맞이하는 등 극진히 예우를 해 주었다. 견훤이 신라를 기습해서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그 왕비를 굴욕을 보이는 등 신라인들에게 씻지 못할 굴욕감과 수치심을 심어준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결국 936년 병신년에는 후백제를 이끌고 있던 신검이 고려군에 대패하고 항복함으로써 후삼국이 통일되면서 민족의 대융합을 이루게 된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려시대의 을미년과 조선시대의 을미년이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던 고려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왔던 팔관회를 개최하는 등 고유한 정신문화를 이어 받으면서 민족정신을 고취시켰으며, 민족의 융합을 역사적인 과제로 삼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2015년 을미년, 이제 고려 왕건 같은 리더십이 필요한 때이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포용의 리더십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포용한다고 해서 왕건처럼 모든 지방 호족들과 사돈지간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역사적으로, 정신문화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융화 정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시 을미년, 120년 전과 같이 미적거리면 희망이 사라질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꿈과 미래, 이제는 희망이다. 희망을 갖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