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기실에서 흰 한복을 갈아입고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때, 어디에선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통곡소리였다. 근화가 청동팔주령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궁녀가 본전 밖에서 쭈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옷이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말씀이 아니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고 몸에 칼을 맞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궁녀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원한에 사무친 여귀女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음산하게 보였다. 

“그대는 무슨 연고로 이곳에 와서 울고 있는가?”
 
감응신령이 묻는다.
 
“국모를 위하여 웁니다.”
 
궁녀가 말한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을미년에 국모가 왜적에게 참살을 당하신지 119년이 지났는데 원한을 풀어야 할 길이 없으니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그대의 몰골을 보니 그대도 원한을 풀어야 하겠구나.”
“저야 미천한 몸이니 아무래도 괜찮습니다만 국모의 원한이나 풀어 주십시오.”
“국모의 원한을 풀려면 소상하게 아뢰어라.”
“제가 중전마마를 지켜드리다가 왜적의 칼에 맞아 국모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자세하게 말할 수 있는 자를 추천할 수 있느냐?”
“있습니다.”
“그가 누구냐?”
“훈련대장입니다.”
“훈련대장?”
 
이때 한 장부가 나타난다. 그가 구군복을 입고 있다. 혹시 이순신장군이 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복장이 같다.  
 
“소장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소장의 성은 홍洪이고 이름은 계훈啓薰입니다. 초명은 재희在羲, 본관은 남양南陽입니다. 임인 년에 출생하여 을미년에 왜적이 일으킨 을미(1895. 8. 20.)사변 때 건청궁에 침입한 왜적의 침입을 저지하다가 칼과 총을 맞아 죽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임인년과 을미년을 따져보니 1842년~1895년에 해당한다.   
 
“그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보게.”
“소장은 무과에 급제한 후에 무예청 별감(경호원)으로 지내다가 임오군란(1882. 8.) 당시에 반군의 난동을 피하기 위하여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노원으로 피신한 공으로 승진하여 장위영 영관을 지냈고, 충청수사와 병마절도사를 지낸바 있습니다. 갑오년(1894)에 동학난이 일어나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출전한 바 있습니다. 이어 훈련대장이 되었습니다.”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그에 대하여, 인품이 염결廉潔하고 근신勤愼했다.”고 썼다. 사방을 둘러보니 왜귀倭鬼들이 대통령궁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악기惡氣로 변하여 궁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역대 총독들이 부리던 왜관倭官들이었다. 왜귀들이 낭인패거리와 일본군인의 복장을 하고 있다. 그들이 내 주변에 모여드는 것으로 보아서 일촉즉발의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이 홍계훈을 따라 들어온 것으로 보였다. 나는 도깨비부대장과 귀신부대장을 소집하였다. 
 
“왜귀와 수비들이 악기로 위장하여 경내에 들어와 있소.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으니 모조리 잡아서 자체발화 화장터로 보내시오.”
“곧 시행하겠습니다.”
 
두 부대장이 내 앞에서 물러간다. 곧 중군장들이 지휘하여 왜귀와 잡귀들을 소탕한다. 나는 도깨비군과 귀신군이 어떻게 싸우는가를 관전한다. 그들은 시간을 거의 0에 놓고 싸우기 시작한다. 조금도 시간에 변동이 없다. 싸움이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진행이 되는 것이다. 왜귀들이 자체발화 화장터로 쫓겨 가니 그들이 감금하고 있던 대한제국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는 궁녀가 왜귀들이 뿜어대는 사악한 기운에 또 짓밟혀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도깨비 대장에게 명하여 지키도록 해 주었다. 도깨비들이 지키니 왜귀의 사악한 기운들이 얼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관저가 있던 자리에 있는 왜귀들이 뽄드를 발라놓은 듯 쫓겨나가지 않으려 하였다.  
 
“너희들이 여기가 어디인지 아느냐?”
 
내가 왜귀의 사악한 기운을 향하여 물었다. 
 
“이곳은 조선총독의 관저이다.”
 
대장인 듯 보이는 자가 대답하였다.
 
“이곳은 대통령궁이다.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을 건국한지 이미 60년이 지났거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대들의 무당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어서 허공에 매이고 서낭에 매이고 용궁에 매이면 그 고를 풀길이 없다고 했는데 이러한 저승의 이치를 모르고 하는 말이냐?”
 
그가 무당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듯하여 나를 화나게 하였다.
 
“그렇다면 네가 어디에 매어 있느냐?”
“나는 서낭에 매어 있다.”
“서낭이 어디에 있느냐? 오늘 영험한 무당이 왔으니 너의 고를 당장 풀어 주겠다.”
“내가 매인 서낭은 춘무산春畝山에 있다.”
“춘무산에 있다면 목멱산木覓山에 있단 말이냐?”
“그렇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남산의 이름 목멱산을 춘무산으로 고쳤다. 목멱산이 가지고 있는 목의 기운을 토의 기운으로 바꾸려 토의 기운을 가진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오행상극五行相剋의 목극토木克土의 이치에 따라서 목의 기운에 허물어지는 토의 기운으로 바꾸려 한 것이다. 일본이 목의 기운이 승한 동쪽에 있고, 대한제국이 토의 기운이 승한 동북간방東北艮方에 있어 한반도의 토기가 일본열도의 목기를 당할 수 없다고 그들이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한 짓이었다. 이 일을 한 총 지휘자가 일본총독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오 히로부미)이었다.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네가 서낭에 매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지?”
“그렇다. 나는 60년 동안이나 서낭에 매어 있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나의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 이 나라를 다시 내게 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베가 평화헌법을 전시헌법으로 개정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헌법이 바뀌면 명치유신 때처럼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정벌군征伐軍을 파견하려 할 것이고 그때 한국이 내분으로 지리멸렬하게 될 것이라 일본의 속국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또 소리 질렀다.
 
“이자를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처벌해야 합니다.”
 
내가 감응신령에게 말한다. 나는 이 자를 자체발화로 타죽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장! 왜귀의 사악한 기운을 축귀하라.”

▲ (왼쪽) 일본의 명치유신 때 군 장성들이 정한론征韓論으로 들끓었고, (오른쪽) 2012년8월25일에 일본의 극우파들이 8.25.한국정벌대행진韓國征伐大行進을 벌여 정한征韓데모가 절정에 달했다. 일부 일본인들이 품은 한국 정벌의 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헛꿈이라 하더라도...
 
감응신령이 내게 지시한다. 춘무산에서 출동한 괘귀의 대부대가 대통령궁을 향하여 진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한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주차군이었다.  
 
“사방진으로 왜귀를 포위하라.”
 
내가 도깨비부대와 귀신부대에게 명령한다. 도깨비부대가 설대대형楔隊隊形(ㅅ자대형)으로 벌어지며 동쪽과 북쪽을 포위했고, 귀신부대가 설대형으로 벌어지며 서쪽과 남쪽을 포위하였다. 부대들은 곧 왜귀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이 신형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 칼과 구식 총으로 무장한 왜귀들이 당해낼 수 없었다. 영계터미널에서 대기 중인 다수의 쿼크들이 몸을 반짝이며 이 싸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래이 Society 회원들이 동서남북에서 흩어져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대는 왜귀의 지휘부를 공격하였다. 회원들의 모자에 부적이 붙어 있고, 가슴과 등에도 부적이 붙어 있다. 손에는 신무기가 들려 있다. 왜귀가 서서히 소탕되었다.
 
“왜귀의 두목을 생포했습니다.”
 
래이 Society에서 보고가 들어온다. 대장이라는 자가 무장해제 되어 내 앞에 무릎이 꿇린다. 
 
“이 자를 자체발화 화장터로 끌고 가서 태워버려라.”
 
내가 백호에게 명령한다. 백호가 이 자를 코끝으로 툭툭 치며 양떼를 몰고 가듯이 몰고 간다. 신무문으로 사라지는 백호가 보인다. 이어서 불길이 일어난다. 
 
“지금 그대의 위패는 어디에 있는가?”
 
감응신령이 홍계훈에게 묻는다.
 
“처음에 장충단에 있었으나 지금은 파괴되어 없습니다.”
 장충단이라는 이름이 지금은 서울남산공원으로 바뀌었으나, 일제 강점기엔 춘무공원이라 하였다.  
“왜, 없어?”
“위패를 모신 비각을 왜귀들이 헐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제사를 지내 주는 사람이 없겠군.”
“그렇습니다.”
“신장은 이곳에서 왜귀를 축귀한 다음에 장충단으로 가서 잘못을 바로잡고 오라.”
 
감응신령이 내게 지시하였다.
 
“근화는 장충단을 배회하는 궁녀 쿼크와 시위대 대원 쿼크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라.”
 
▲ 을미사변의 순국자 홍계훈과 이경직의 위패를 모셨던 비각. 이외에 왕궁을 수비하다 전사한 시위대와 참살당한 궁녀의 위패도 모셔져 있었다. 이 자리는 군대의 소부대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던 곳이다.
 
감응신령이 근화에게도 지시한다. 근화가 을미사변과 임오군란 때 순국한 이들의 넋을 부르기 시작한다. 
 
“넋이야 넋이로다 을미사변에 몸 바쳐 나라 지킨 넋이라면 들어오시고 혼이라면 들어오시오. 일백 년을 허공에 매어 떠돌던 넋이며 장충단 서낭에 매어 떠나지 못한 넋들은 다 모이시오 오늘 제대로 대접하렵니다...”
 
넋이 들어온다. 근화가 정신없어 한다.
 
“넋이 오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근화가 한탄한다. 
 
“방해하는 자들이 누구야?”
 
내가 묻는다.
 
“남소영 터에 세웠던 비각을 헐어버린 자들, 왜적의 사당을 지키는 왜귀들입니다.”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 (왼쪽) 성벽을 넘을 기세를 보이는 일본주차군. (가운데) 장승 앞을 달려가는 왜군 연락병. (오른쪽) 광화문으로 진격하는 일본주차군. 왜귀倭鬼가 한성漢城(한성은 백제의 국도)과 왕궁王宮(경복궁)을 점령한다. 이날 비가 오고 있었다. 왜귀는 백제의 국도 명칭인 한성을 경성京城으로 고쳐 불렀다. 경성은 일본의 서울이라는 뜻이다.
 
감응신령이 묻는다.
 
“왜귀들은 300쯤 되고, 왜귀에 붙어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한귀韓鬼들은 1천쯤 됩니다.” 
“한귀들이 많군.”
“숨어있는 한귀를 수색하여 찾아내면 아마 1만이 넘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대답한다. 
 
“감군(감응신령의 군대)을 보내어 왜귀를 소탕하라.”
 
내가 명령한다. 이어서 “포위중!”하는 보고가 들어온다. 
 
“작전에 들어감!”이라는 보고도 들어온다. 
“이등박문의 사당이 장충의 넋이 서린 장충단에 둥지를 틀고 있다니 말이 되느냐? 애고 애고 원통하고 분해라... 이 원한을 어찌 갚을고...”
 
근화가 언성을 높인다. 
 
“박문사博文寺 자리에서 이등박문의 위패를 찾아야 합니다.”
 
홍계훈이 말한다.
 
“제가 현장에 가겠습니다. 이등의 위패를 찾아와 왜귀의 사죄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감응신령에게 말한다. 
 
“장충단에 왜적의 기운이 남아 있다면 한웅천왕의 「무여율법」에 근거하여 그 기운을 모조리 쓸어 모아 태워버리라.”
 
감응신령이 내게 지시한다.
 
▲ 이등박문의 사당 박문사. 홍계훈 등의 위패를 모신 전각을 헐고 그 위에 박문사를 지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로 볼 수 있다.
 
「무여율법」의 무여는 마고시대로부터 전해오는 말이다.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고가 마고성에서 오미의 난을 일으킨 자들을 모조리 내쫓으면서 마고성 안에 한 사람도 남기지 말라고 한 말이다. 이 말을 후대에도 실천하기 위하여 한웅천왕이 「무여율법」을 만들었다.  이제 내가 「무여율법」을 시행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 비호飛虎가 되어 내닫는다. 광화문에 나오니 세종대왕 동상 주변에서 이종무 장군이 인솔하는 대마도정벌군의 쿼크들이 왜귀들과 싸우고 있고, 이순신장군이 지휘하는 수군의 쿼크들이 왜 수군과 해전을 벌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광화문이 영靈의 전쟁으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나는 잠시 조선왕조의 명장들이 싸우는 광경을 관전한다. 내가 전쟁에 출정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종무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가 되어 최고 지휘관이 전쟁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백호가 갈 것을 재촉한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나니 모든 환영이 다 사라진다. 
 
드디어 장충체육관 앞에 도착한다. 신라호텔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다. 장충단이 무겁다고 불평한다. 오늘 따라 일본에서 온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 북적거린다. 그들 속에 왜귀들이 숨어 있다. 이제 왜귀를 선별하는 눈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백호, 왜귀를 잡아다 화장하는 일은 그대가 하라.”
 
내가 백호의 등에서 내리며 말한다. 
 
“좋소.”
“몇 명이나 화장했는지 숫자를 내게 보고해. 감응신령님에게 보고해야 하니까”
“알았소.”
 
백호가 왜귀 무리 속으로 달려간다. 왜귀의 두목을 찾으려면 호텔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호텔은 고층 빌딩과 한식 건물 두 건물이 붙어 있다. 고층건물은 숙소와 연회장으로 쓰는 건물이고 한식건물은 고급 식당으로 쓰는 건물이다. 이등의 위패를 찾아야 하는데, 위패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다. 청동팔주령을 근화에게 주고 왔으니 감응 측정이 불가능하다.
 
“왜귀의 수뇌들이 모여 차를 마시는 다실茶室을 찾았음.”
백호로부터 놀라운 파장 보고가 들어온다. 
“그곳이 어디야?”
“호텔과 식당이 연결된 곳.”
“주방이냐?”
“주방의 한적한 곳.”
 
백호가 말한 왜귀의 수뇌는 이토오 총리, 이노우에 전 주한공사, 미우라 당시 주한공사였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어떻게 찾았어?”
“단무지와 생선구이 냄새가 나는 곳이 있어서 다가갔다가 찾았어,”
 
나는 백호의 쿼크가 보내는 파장을 페르몬을 따라가는 일개미들처럼 따라갔다. 그곳은 직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였다. 연회장에서 쓰는 비품들이 쌓여 있었다.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귀들이 있기 때문에 도는 냉기와 습기였다. 그들이 한쪽에서 오차(御茶)로 불리는 차를 마시고 있어도 이곳에 출입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들이 무슨 짓을 하여도 방해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들 이외에 낭인, 주차군 지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낭인과 주차군이 왜귀 수뇌부를 둘러싸고 있다. 백호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당장 데려갈까?”
 
백호가 내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어보고 나서 결정합시다.”
 
내가 말했다. 나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들어보았다. 그들은 ‘박문사 터에 숨어 살고 있는 왜귀들이 호텔에 미칠 수 있는 염력念力’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포럼이 열리는 셈이다. 박문사는 없어졌지만 박문사에서 조성된 악기惡氣만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악기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아내야 하였다. 나는 혁거세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혁거세 선생, 지금 내가 호텔에 와 있는데, 왜귀의 잔존 세력이 남아 있어서 전화 거는 것입니다. 근화에게 장충단에서 피어오르는 악기의 출처에 대하여 알아봐 달라고 전해 주시오.”
 
나는 통화를 마치고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에 전화가 왔다. 
 
“박문귀博文鬼의 위패가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왜귀들이 모여 앉아서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등박문의 위패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왜귀들 곁으로 접근하였다. 그들은 나의 접근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뷔페식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자.”
 
이토오 귀가 이노우에 귀에게 말한다.
 
“재미있는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노우에 귀가 이토오 귀에게 말한다. 내가 동이의 귀신과 화이의 귀신을 만나기 시작한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왜귀를 만나는 것은 금년이 처음이다. 
 
“이또오 공! 안녕하시오? 이노우에 공도!”
 
내가 말을 거니 그들이 흠칫 놀란다.
 
“당신은 누구요?”
 
이또오 귀가 묻는다.
 
“나야 한국 사람이지.”
“당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이등박문이 말하였다.
 
“왜귀를 잡아가는 호구별성이지.” 
 
내가 말하는 호구별성은 한국桓國의 제帝가 한국韓國의 대통령에게 파견하는 전권대사全權大使이다. 
 
“호구별성이 우리 앞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
“그대가 안중근 장군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너무 혈기가 왕성하게 보여 찾아온 것이다.”
“내가 총에 맞았는데 혈기가 왕성하다니! 당치 않은 말.”
▲ 이등박문 암살 호외. 이등박문이 (8월) 26일 오전 9시경 하얼빈역 플랫 홈에서 하차 도중에 한인이 쏜 단총에 맞아 러시아 병원에서 치료 받다가 10시경 사망했다는 독매신문 호외 기사이다.
 
이토오가 완강하게 부인한다. 
 
“아직도 가슴과 복부가 아프시오?”
 
나는 안중근 중장이 쏜 총에 맞은 자리의 아픔에 대하여 물었다.
 
“그렇소. 내가 받은 상처의 아픔은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이요.”
“그대가 한민족에게 저지른 만행을 사죄한다면 아픔이 가실 것이요.”
“사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한귀들이 사죄하지 말라고 막고 있소.”
“설마... 한귀들이 그 정도의 수준이요?”
“그렇소. 내가 드높은 애국심을 가진 귀공에게 한귀의 수준에 대하여 증명해 보일 것이 하나 있소.”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시고 참고로 하시오.”
 
그는 내게 자리를 옮기자고 하였다. 우리는 뷔페식당 입구로 자리를 옮겼다. 
 
“몇 시야?”
 
이토오 귀가 미우라 귀에게 물었다. 시간은 2014년 4월 12일 저녁 6시가 되기 30분전이었다. 한복을 입은 한 여인이 뷔페레스토랑 파크 뷰에 접근하였다. 그는 유명한 한복 디자이너로 이 아무게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한복만을 입고 다닌 이름 있는 한복디자이너였다.  한 직원이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다가 말한다.  
 
“한복은 위험한 옷이므로 출입이 금지 됩니다” 
“위험하다니 무슨 말입니까?”
“회사의 규칙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국내외의 많은 식당을 다녔지만 한복이 위험한 옷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우리 호텔의 규칙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지배인이 강조한다. 
 
“나는 창피합니다.”
 
한복 디자이너나 나를 발견하고 하소연한다.
 
“곧 내가 저들에게 벌을 주겠습니다.”
 
내가 말한다. 한복 디자이너가 뷔페식당으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 호텔을 떠난다. 신문기자가 이 광경을 보고 당장 타전한다. 그러자 신문은 물론이고 라디오와 TV가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자, 보시오. 한국인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하고 있소. 공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것이요.”
 
이등박문이 내게 말하였다. 나는 저자들이 한귀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구려.”
“저 한귀부터 태워버려야 하지 않을까?”
 
백호가 내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뭐하고 있는가? 빨리 잡아들이라. 재판을 해야 하겠다.”
 
감응신령으로부터 텔레파시가 왔다. 
 
“그대를 우리의 최고最古 조상 감응신령님에게 연행해야 하겠다. 순순히 따라 나서라.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려 한다면 사신四神과 사해용왕四海龍王과 육정육갑신六丁六甲神이 부리는 천군天軍을 동원하여 그대들을 연행할 것이다.”
 
내가 엄숙하게 선언하였다.
하늘에서 창룡, 백호, 주작, 현무, 사신이 일렬로 늘어서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해용왕이 검은 구름을 몰아왔다. 육정육갑신들이 천군을 지휘하여 12방위로 진을 치기 시작하였다. 왜귀들은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가겠소. 내가 한국 땅에 있는 이상 재판을 피할 순 없겠지.”
 
이등이 연행된다. 외국기자 쿼크들이 김치 냄새와 단무지 냄새를 맡고 모여들었다. 쿼크들이 냄새 파장으로 통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모여들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국기자 쿼크들은 외국 신문이나 통신사에 적을 두고 있는 내국인 쿼크들이었다. 나는 이명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호텔 자리가 수상하다. 왜귀들이 농간을 부린 것 같아. 역사를 조사해서 알려주어”
“그거야 어렵지 않지.”
▲ (위) 왜귀倭鬼 두목들. (아래 왼쪽부터) 경복궁을 공격한 낭인, 일본군, 광화문을 침범하는 일본 한국 주차군.
 
▲ 춘무산 박문각 내부. 이등박문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일제강점기의 춘무산은 지금 남산으로 불렸다. 박문각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에 신라호텔이 되었다.
1900. 5. 고종황제가 남산의 남소영 터에 1894년 갑오농민항쟁과 1895. 을미사변에서 희생당한 군인과 궁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사 터를 만들라고 지시함.
1900. 11. 10. 장충단獎忠壇이 완공되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됨. 장충단은 3층 기단 위에 제단 15칸, 장충단비, 비각 1칸을 지음. 부속 건물로 전사청典祀廳 6칸, 양위헌揚威軒 17칸 반, 장무당壯武堂 10칸, 요리정料理亭 30칸. 고직처庫直處와 고사庫舍 3칸, 측간厠間 1칸을 지음. 이외에 소나무 가지로 만든 홍여문虹如門을 세웠고, 대량판교大樑板橋와 중판교中板橋를 놓았고, 석가산石假山(삼신산)도 만들었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旗를 꽂을 수 있도록 기주旗柱를 설치하였다. 
1901. 봄(4. 20.경)에 첫 제사를 지냈다. (1901. 4. 22.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초혼제招魂祭 기사를 보도하였다.)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정부는 러일관계에서 엄정중립을 성명하였다. 21~29 일에 英 佛 獨 伊가 수령통보를 해왔으나 일본정부는 회신하지 않았다.  1904년 로일전쟁 
1904년 2월 6일. 일본의 제1함대 소속의 제4전대(우리우(瓜生外吉) 소장 인솔) 순양함 6척, 어뢰정 8척이 사세호를 출발하여 인천항으로 향하였다. 
1904년 2월 8일 러시아 순양함과 포함 2척이 인천항에 정박 중이었다. 
1904년 8일 인천항에 진입한 일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향하여 함포를 날렸다. 러시아 함대가 침묵하였다. 기고시 여단 2,200명이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9일 12시 시한부로 러시아함대의 퇴함을 명령하였다. 러시아함대가 퇴함하자 외항에서 격파하였다. 이날부터 한성은 일본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이튿날 일본군 1개 중대의 감시를 받으며 한성을 떠나 인천을 경유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1904년 2월 18일 인천에 잔류했던 기고여단의 2개 대대가 한성에 진입하였다. 일본제1군 예하 12사단이 2월 16~27 일 사이에 인천 상륙을 완료하였다.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조인되었다. 「한일의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일본 측 시정 충고의 용인
제2조 조선왕실의 안녕보장
제3조 독립과 영토보전의 보증
제4조 제3국의 침해 또는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의 안녕 또는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는 속히 임기臨機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대한제국 정부는 右의 일본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임기수용臨機收用할 수 있음
제5조 위반된 협약 체결의 금지
제6조 미비된 사항은 공사와 외부대신이 협의한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불평등 조약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국권이 일제로 넘어갔다.
이후에 장충단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1908년 5월 8일자 [황성신문]은 오카사키(岡崎) 일본군 사단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초청하여 원유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 일본인 관료와 한국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 한성부윤 박의병朴義秉이 참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위국충절의 위패를 모신 장충단이 일본 침략군의 야유회장이 된 것이다. 
 
1908년 12월 30일자 [공립신보]는 조선의 원로 22명이 일본통감 이등박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동상을 세우자고 주장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도 “이학재씨가 이등공의 송덕비를 세우자고 발기함은 여러 번 게재하였거니와 겸하여 동상을 제조할 차로 경비 삼만 원을 예산하고 일전에 궁중고문 이윤용씨를 찾아가서 협의하였다더라.”고 보도하였다. 이해부터 일제는 장춘단에서 올리는 제향을 금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1909년 대한제국의 안중근 장군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척살하였다. 이토오 장례식 추도회가 장충단에서 있었다. 1909년 11월 4일 『순종실록』은 “태자의 태사 문충공 이토오 공작의 국장일에 황족, 궁내관, 각 부의 관리 및 인민들이 함께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거행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당일 추도식이 거행된 시간은 오후 2시~3시 45분까지였다. 학생과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참석시켰고, 보병 2개 중대가 경비하였다. 장춘단은 원래 척화비가 서있던 곳이었다. 일제가 척화비를 뽑아 숲속에 버렸다. 아울러 사전청의 건물들을 모조리 헐어버렸다. 
▲ (왼쪽) 대한제국 국기와 (오른쪽) 청일전쟁에 이긴 일군을 환영하는 대한제국 대신들. 한 건물에 대한제국기와 일장기가 X자형으로 게양되어 있는 일본의 기록화記錄畵.
1919년 경성부는 동대문 부근의 훈련원 터와 장충단을 공원조성지로 선정하였다.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 광장, 연못, 어린이 놀이터, 다리를 설치하였다. 1921년 공원으로 개장하였다. 1926년 4월 전차선로를 장충단공원 입구까지 연장하여 ‘장충단선’으로 개통하였다. 상해 사변 때 죽은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웠다. 박문사를 세웠다. 1929년부터 1931년 사이, 공원 동쪽 4만평의 숲을 파헤쳐 일본식 절을 지었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의 선원전을 파괴해 옮겨다 박문사와 서원書院을 지었다. 경희궁의 흥화문을 뜯어와 입구에 대문을 세우고 이름을 경춘문으로 바꾸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는 1958년 11월 27일 이 자리에 와서 귀빈관 건립지로 결정하였다. 그 후로 삼성물산에게 불하되어 영빈관이 들어섰다. 영빈관을 짓는데 기이하게도 왜귀의 농간이 끼어들었다. 
 
나는 홍계훈에게 을미사변 때 죽은 병력을 동원하여 이토의 쿼크를 체포해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홍계훈이 그들에게 죽었으므로 겁을 내어 거절하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 백호, 우리가 체포하자.”
▲ 대한제국 경운궁慶運宮의 흥화문興化門(왼쪽)이 일제에게 헐려 장충단壯忠壇으로 옮겨져 다시 세워지며 경춘문慶春門(가운데)이 되었다. 경춘문은 박문사博文寺(오른쪽 끝)의 정문이 되었다. 일제가 남산의 원래 이름 목멱산木覓山을 춘무산春畝山으로 바꾸었다.
 
내가 백호에게 말하였다. 백호가 동의하였다. “이토. 그대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죄를 물어 체포하겠다. 2명의 공사도 같은 죄로 체포하겠다.”
 
내가 이토, 미우라, 이노우에에게 말하였다. 백호가 3사람에게 코를 들이대었다. 그러자 3인이 순순히 따라 나섰다. 나는 대통령궁 앞으로 돌아왔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재판을 해야 하였다. 근화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물었다.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일제가 시신을 불에 태워 황후의 홀로그램이 살아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감응신령님,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내가 감응신령에게 물었다.
 
“쿼크가 빙의하는 방법이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자리에서 순수한 몸으로 빙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이숙이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이숙만큼 몸이 순순하지 못하였다. 몸주가 상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숙만은 상주하는 몸주가 없었다. 이숙이 가끔 몸을 내주는 쿼크는 홍타이 황제의 쿼크뿐이었다. 부천 고강동의 청룡산에서 천제를 지냈을 때, 이숙이 잠깐 홍타이지 황제에게 빙의를 허락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홍타이지 황제의 쿼크가 한국에 올 때마다 불문곡직하고 달라붙었다.  
 
“누구에게 빙의하면 되겠습니까?”
“이숙!”
 
감응신령이 이숙을 지목하니 이숙이 빙의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이숙은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이숙의 몸에 쿼크가 없는 명성황후가 빙의하려면 시한부로 홀로그램을 만들어 주어야 하였다. 홀로그램이 있어야 빙의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대통령궁의 온실에 마화麻花가 피어 있을 것이다. 마화를 꺾어서 가져오라. 마화로 살풀이를 해 주면 살이 풀려 홀로그램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감응신령이 말하였다. 나는 의전담당비서관에게 온실에 가서 마화를 꺾어다 줄 것을 부탁하였다. 마화는 도솔가에서 산화散花라 부르는 살풀이 꽃이다. 쿼크가 없는 자에게 살풀이를 해 줌으로써 쿼크 복원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전담당비서관이 마화를 살풀이 할 수 있을 만큼 꺾어 왔다. 나는 근화에게 마화를 주었다. 
 
“명성황후의 홀로그램을 소생시키면 이숙씨에게 빙의가 될 것이다.” 
 
내가 말하였다. 근화가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마화를 뿌리니 명성황후의 쿼크가 생성되었다. 명성황후의 쿼크를 활성화시키려면 홀로그램이 되도록 해 주어야 하였다. 감응신령은 그 과정을 도와주었다. 드디어 명성황후의 쿼크가 복원되었다.
 
“이등박문의 사죄를 받아야 하겠다.”
 
명성황후의 쿼크가 즉각 활동을 시작하였다. 나는 영롱한 빛의 알갱이로 내 눈앞에 나타난 명성황후의 쿼크를 바라보았다. 
 
“쿼크로 소생하신 것을 감축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의 은공을 잊지 않겠소.”
 
명성황후가 파장으로 말하였다. 
 
“누구의 몸에 빙의하시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명성황후의 쿼크가 이숙을 가리켰다. 명성황후의 쿼크가 이숙에게 빙의하자 이숙의 행동이 명성황후의 행동으로 변하였다. 
 
“나를 시해한 주범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대령하라.”
 
명성황후가 이숙의 입을 통하여 명령한다. 나는 명성황후가 명하는 대로 3인의 쿼크를 잡아다 접시에 올려 대령한다. 3개의 쿼크가 접시 안에 있다. 접시를 제단에서 마주 볼 수 있게 제단 가운데에 놓는다.  
“그대가 재판하여 나의 원한을 풀어주기 바란다.”
 
명성황후가 내게 요구한다.
 
“제가 재판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감응신령에게 묻는다.
 
“재판하라.”
 
감응신령이 윤허한다. 나는 판사가 아니라 재판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재판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재판을 하려면 죄인들을 홀로그램으로 복원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재판을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응신령이 3인의 쿼크를 홀로그램으로 복원시켜 준다. 그들이 명치시대의 대신 복장으로 나타난다. 
 
“한시적인 복원이니까 재판을 신속히 진행하기 바란다. 약발이 떨어지면 쿼크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감응신령이 말하였다.
재판이 개정된다.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패망하여 국사범 재판을 보류해 왔으나 이제 대한민국에서  그대들을 재판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므로 인정심문은 생략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범, 이노우에 가로루는 지휘자, 미우라 고로는 행동대장으로 호칭한다.”  
내가 말한다. 
 
“이노우에, 본 재판은 『미우라의 수기』에 근거하여 심문을 진행하도록 하겠다. 동 수기에 따르면, 그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나기 한 달 전에 외상직책을 사임하고 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를 1895년 9월 1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장으로 쓰기 위하여 주한 공사로 임명하였다. 이로 미루어 그대는 동 사건을 배후에 숨어서 지휘하고 미우라를 전면에 내세워 행동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맞는가?”
“맞습니다.”
 
그는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거짓을 진술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무장답게 상당히 태연하게 보인다. 
 
“미우라를 군부에 행동대장으로 추천한 이유가 그의 성격이 과격한 때문이었는가?”
“그렇습니다. 군부가 직접 맡아 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성격이 과격하고 영웅심이 강한 미우라를 적격으로 생각하여 추천한 것입니다.”“대한제국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인가?”“조선 침략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명성황후를 제거하면 친일정부의 수립이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한 결정은 미우라 개인의 결정인가 아니면 국가의 결정인가?”
“국가가 결정하여 지시하지 않으면 개인이 행동할 수 없는 결정입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인 을미년 10월 8일 오전 9시 20분에 주한일본공사관의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가 본국 육군참모본부에 극비로 보낸 전문에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전문은 일본정부의 명성황후 살해계획이 성공했음을 정부에 보고하려 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다음엔 행동대장 미우라에게 묻겠다. 그대는 을미년 8월 19일에 군부대신 안경수 대감을 만난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안경수 대감으로부터 1895년 8월 20일에 훈련대를 해산시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의 결정사항을 구두로 통보하러 왔습니다.” 
 
훈련대는 일본군이 일본식으로 훈련시킨 군대였다. 일본식 군대를 해산하겠다는 데엔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날 민영준을 궁내부 대신에 임명하였다. 민영준을 등장시킨다는 것은 정부를 친로파 일색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안경수가 돌아가고 나서 대궐에서는 친로파親露派가 밤늦도록 연회를 열렸다.  
 
“미우라는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을 은밀히 일본공관으로 불러서 무엇을 지시했는가?”
“훈련대가 해산된다는 정보를 알려주었소.”
“무슨 의도로 알려주었는가?”
“나는 그가 진노하기를 기대하였소.”
“그가 진노했는가?”
“그는 이성을 잃을 만큼 화가 났소. 그래서 나는 대일본제국의 거사에 그를 끌어들일 수 있었소. 나는 그에게 친로파를 제거하겠다고 말하였소. 세상에 알려진 대로 일러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진 뒤였소.”
 
나는 우범선을 출두시켜 심문할 것인가 결정해야 하였다. 그러나 그만두고 홍계훈에게 물었다. 
 
“그날 우범선이 어떤 행동을 하였소?”
“이범선은 내게 야간훈련을 나가겠다고 속이고 1대대와 2대대 전원에게 총과 실탄을 휴대시켜 일본군 수비대와 합류하기로 한 서대문 밖에 도착하였소. 낭인 패거리들이 염리동에 있는 아소정 별장에 가서 대원군을 합류시켰소. 이들 혼성부대의 총지휘자는 일본공사관 무관 구스노께 중좌였소. 연회는 새벽 3시경에 끝났소. 선발대가 대궐의 담 밖에 사다리를 걸치고 넘어왔소.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소. 내가 급보를 받고 달려 나왔으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소. 왕궁은 시위대가 지키고 있었소. 지휘자는 미국 퇴역장군 다이였소. 그가 시위대를 미국식으로 훈련시켰소. 그가 흰 수염을 휘날리며 지휘하였소. 내가 독전을 해 보았지만 그들을 이길 수 없었소. 내가 죽자 수비군은 괴멸하고 말았소.”
 
이제 나는 피해당사자인 명성황후에게 물어보아야 하였다. 
 
“황후께서 당시에 당하신 상황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옥호루에 있었소. 왜적들이 옥호루로 몰려오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여관들이 피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갈 만한 곳이 없었소. 낭인 패거리들이 옥호루에 침범하여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소. 나는 죽었소.”
“알겠습니다.”
 
나는 미우라에게 물었다.
 
“황후에게 칼을 휘두른 자가 누구인가?”
“시해사건 가담자가 모두 발뺌을 하여 진범을 밝혀내기 힘이 듭니다. 이미 역사에 묻혀 버렸습니다.”
“지휘체계를 대라.” 
“현장을 오기와라 경부가 지휘하였소. 그러나 낭인 패거리의 총지휘자는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부책임자는 낭인 다나카(田中賢道)였소.”
“황태자의 진술에 따르면, 일본의 흉한들이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3번이나 짓밟고 칼로 찔렀다.”고 하였는데, 범인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냐?“
“그렇소.”
“이노우에에게 묻는다. 피고인이 지득하고 있었던 명성황후시해사건에 대하여 말하라.”
 
나는 이노우에에게 물었다.
 
“당시에 행동대원 고바야카와히데오(小早川秀雄)는 명성황후 시해의 배경과 계획수립과정부터 시해사건에 가담한 범인들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과정까지 수기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한「민후조락사건閔后殂落事件」을 남겼소. 고바야카와는 옥호루 현장에 없었으나 사건 가담자의 진술을 들어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였소. 고바야카와는 ‘낭인들이 대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상처를 입혔소. 나아가 왕비를 나체로 만든 후에 국부검사를 한 것은 웃기는 일이고 가소로운 일이었소.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燒失하였다.’고 기록하였소. 그 이상은 알 수 없소.“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황후를 벤 자와 화장한 자를 찾아낼 수 없다는 말이냐?”
“그렇소.”
“기록에 황후가 운명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서 부상당한 황후를 생화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모르겠소.”   
“그들이 황후의 시신을 금침으로 둘둘 말아 싸들고 녹원의 숲으로 가서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고 하였다. 누가 그랬는지 말하라.”
“모르겠소.”
“그대가 주인공이 된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이냐?”
“그렇소.”
“당시에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weber)가 쓴 「베베르보고서」에  당시에 궁중에 있었던 건축기사 사바티니가 어느 궁녀의 목격담을 기록한 보고서가 들어있다. 베베르는 ‘일본이 전쟁 시가 아닌 평화 시에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습격하고, 한 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것은 사상 유래 없는 만행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당시엔 일본 지식인의 상당수가 경성천도론京城遷都論을 지지하였소. 경성을 일본의 국도로 생각했던 것이요. 그러니 죄의식을 가질 리 없었고, 황후가 일본이 앞으로 나가는데 걸림돌이 될 뿐이니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소. 행동대원 48명이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된 뒤 구국의 영웅으로 일본 전 국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고, 일본의 천황폐하도 시종대신을 이들에게 보내어 명성황후 시해범들의 노고를 치하하였소. 나의 생각은 당시에 일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인 생각이었소.” 
“지금의 생각에도 변함이 없는가?”
“그렇소.”
 
▲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당한 옥호루와 10대의 연령대로 보이는 명성황후. 명성황후의 이름은 자영으로, 9세 때 조선왕조 고종의 비가 되었다.
나는 미우라와 이노우에 심문을 마치고 이토 심문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원흉 이토에게 묻는다. 그대가 대한제국 침탈과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범임을 인정하는가?”
“인정한다.”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안중근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왜,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에 어느 음양사가 내게 하얼빈에 가지 말라고 말렸다. 그곳에 가면 조선의 청년에게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죽을 것을 알면서 하얼빈으로 갔다.”
“죽으러 간 것인가?”
“그렇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시인하는 것인가?”
“내가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려 한 것이다.”
“그대는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9시 경에 하얼빈 역에서 대한제국군 안중근 중장이 쏜 총알에 맞아 죽었다. 맞는가?”
“맞는다.”
“안중근 중장은 4발의 총탄으로 심장과 복부를 쏘았다. 맞는가?”
“맞는다.”
“안중근 중장은 재판정에서 그대를 처단해야 하는 이유 15가지를 발표하였다.  
 
1. 한국의 민 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왕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왕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이중에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이다. 시인하는가?”

“나는 대일본제국의 총리로서 일본의 대동아경영大東亞經營이라는 꿈을 실천하려 하였다. 황후를 살해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황후를 죽이는 일이 한국병탄韓國倂呑의 지름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국가가 하지 못한 왜귀재판에 끝을 내려 한다. 대한민국 형법 제 250조를 위반했으므로 이토 사형! 이노우에 사형! 미우라 사형!을 언도한다.”  
 
나는 이들 왜귀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몸이 없는 귀들이라 사형을 집행할 수 없는 팔결이었다. 
 
나는 3인을 명성황후 앞에 엎드리게 하였다. 홀로그램이 쿼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임박하였다. 쿼크로 돌아가면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쿼크가 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명성황후에게 사죄하라.”
 
내가 명령하였다.
 
“일본인의 총리로서 일본인을 대표하여 명성황후에게 사죄합니다. 타국의 국모를 살해한 것은 만고에 씻을 수 없는 살인의 죄를 범하였음을 인정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친인이 공노할 일이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거듭 사죄합니다.”
 이토가 사죄하였다.
 나는 왜귀들이 명성황후에게 사죄하고 나서 쿼크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떠돌던 허공으로 돌아갔다. 도깨비부대와 귀신부대 요원들이 닌자와 수비군으로 동원되었던 왜귀의 수하들을 대통령궁에서 쫓아내었다. 어수선했던 궁정이 조용해졌다. 도깨비부대와 귀신부대가 대통령궁 경비로 들어갔고, 래이 Society 회원들도 휴식에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