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을미년에는 유행했던 유행가가 있었는데,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있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우리 민족이 즐겨 불렀던 노래로, “가보세~”는 동학농민군의 진군가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일종의 만가(輓歌)로 죽은 이를 애도하는 노래로도 불리었다. 동학농민군의 미망인들이 전사한 남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울부짖으며 불렀던 노래였다.

위의 노래 가락 속에는 당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염원들이 들어 있었다. 갑오년에 떨쳐 일어났던 동학농민들이 을미년을 지나 병신년까지 미적거리다 보면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노래 가사 대로 되어 버렸던 역사의 무정함이 서려 있다.

2015년은 그 을미년이다. 을미적 을미적, 곧 미적거리다 보면 병신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으로 그때는 이미 늦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을미년에는 무슨 일이 났을까?
그리고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는 어떤 인물들이 존재했을까?
그것을 통해 역사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가?
과거는 분명 지나간 사실이다. 그 지나간 역사적 사실에 물음표를 붙이는 순간 그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본 칼럼에서는 위의 질문에 답하고 그 답을 통해 역사 속 을미년의 의미를 재조명해 보고 2015년 을미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갑오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개입되어 외세에 의해 또 한 번 민족자주운동이 좌절해야 했다. 결국 그 틈을 타 일제는 조선의 궁궐을 점령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바로 갑오경장으로도 불리는 갑오개혁이다. 원래 경장은 풀어진 거문고의 줄을 팽팽하게 다시 고쳐 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거문고의 줄을 다시 고쳐 매듯 우리 민족의 근대 개혁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120년 전 을미년 1월에 나온 홍범14조로, 조선의 정치적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그 기초로 하고 있지만 일본의 개입으로 불완전한 개혁 정책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홍범14조’가 그렇게 일제의 간섭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 땅에서 맞붙은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 곧 청일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의 것이 되어 버렸고, 그 전쟁의 승리로 전리품을 챙긴 것은 일본이었다. 조선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의 요양반도도 차지하려고 하였지만 욕심이 과한 탓으로 서구 열강, 특히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 등과 합세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요양반도를 청나라에게 되돌려 주라는 압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삼국 간섭이다. 결국 일본은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에 따라 요양반도를 청나라에게 되돌려 주게 된다.

이때 러시아의 힘을 알게 된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의 야욕을 알아차린 이후로 일본을 견제할 세력을 찾고 있었던 차에 친러 정책으로 일 본을 견제하게 된다. 처음에는 상당히 유효한 정책으로 보였지만 마치 조선을 내 주게 되면 모든 것을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일본의 조바심을 결국 자극하고 말았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바로 명성황후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으로 불리어지는 한 나라의 국모를 참혹하게 시해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와 이것에 부화뇌동하는 일제와 그들의 국내 동조세력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이다.
분명 일본 정부가 개입한 사건으로 일제는 철저하게 사건을 은폐하고 그것도 모자라 조선인 내부의 분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고 왜곡하기도 하였다. 결국 일본의 사건 왜곡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제의 만행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건에 가담한 일본인들은 체포가 되어 일본 법정에 섰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이내 풀려 나온다. 아직도 당시의 사건에는 풀리지 않은 의혹과 논란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사건에 가담한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절명시키는 데 사용했다는 일본도인 히젠도는 16세기에 만들어진 검으로 사람을 베는 데 사용하는 칼이었다. 그 히젠도가 일본의 어느 신사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사건에 가담한 일본인 자객이 약 13년이 지난 후 그 일을 참회하면서 그 칼을 일본 신사에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당부 를 하며 맡겼다고 한다. 그 신사는 일본 후쿠오카 지역에 있는 쿠시다 신사이다.
민간인들이 모여 국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환수해 오고자하는 노력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2010년 안중근 장군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문제의 히젠도를 환수해 오고자 하는 환수위원회를 구성, 현재까지도 계속 환수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재 환수 운동은 문화재 독립 운동과 다름이 없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쳤던 명성황후의 마지막 절규가 아직도 경복궁의 어딘 가에서는 메아리치고 있을 것 같다.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던 민족적 분노의 불길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던 단발령이 시행되자 그 절정에 이르렀고 결국 폭발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을미의병으로 최초 항일 의병활동이었고, 이것은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항일 의병 활동은 조선의 선비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그 의병장들 모두는 선비들이었다. 물론 추후에 을사의병부터는 신돌석 같은 평민 의병장도 등장한다.
단발령에 대한 저항은 유교의 경전에 나오는 ‘신체발부 수지부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비밀은 상투 머리에 있다.

상투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바로 사마천의 『사기』이다. 서기 전 194년의 기록으로 알려진 사마천의 「조선열전」에는 위만이 연나라에서 들어 올 때를 기록하고 있는데, “상투머리를 하고 남쪽오랑캐 옷을 입었다." 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상투는 우리 민족의 상징적인 머리 형태로 그 기원은 고조선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상들은 상투를 단순히 머리를 장식하는 풍습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신앙인 칠성신앙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상투는 상두(上斗)라고 하였다. 두(斗)는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한자다. 상투를 틀 때 앞으로 4번 뒤로 3번 꼬아서 트는데, 이것을 두고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상투는 머리기둥으로 삼신의 가르침인 하늘의 소리를 듣기 위한 안테나 역할도 했다고 생각된다.
한민족의 창세기이자 인류시원의 역사, 『부도지』에 ‘오미의 변’으로 오금이 사라져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귀고리를 만들어 하늘의 소리를 듣기를 원했던 것처럼, 상투를 틀어 하늘의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조상들의 염원이 담겨져 있었다.

상투는 반드시 장가를 간 어른들만 하는 머리 형태다. 그러나 단순히 장가를 든 어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얼이 큰 사람을 어른이라고 불렀고, 얼이 큰 어른은 상투로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목숨 걸고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오금도 없고,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상투도 사라진 시대, 그래서 희망이 사라지고 인성이 땅에 떨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연일 언론 지상에 보도되는 사건 사고들, 오늘도 여지없이 황당함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초동 세 모녀 살해 사건, 생활고를 비관하여 가족을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혼자만 살아남은 무정하고 잔인한 아빠, 그 아빠에게는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강남 소재 최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며 외제차를 몰고 다닐 정도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던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이유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나름의 희망, 그것은 곧 절망이 되었고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역사적인 기로에 서있다. 병신년을 앞두고 을미년을 시작하는 오늘은 미래의 역사를 무엇으로 어떻게 창조할 것인지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인 것이다.

단기 4348년 1월 7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