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권 제1 「기이편」‘고조선조’에는 “옛날에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는 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사랑이고, 같은 기록에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신단수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이라 하였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역사는 위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홍익인간’이라는 최고의 정신문화를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인류 최초 복지국가 고조선의 통치이념이 되었고, 그 이후의 역사는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는 역사였다.
 

▲ 민성욱 박사
정신문화적으로는 단군조선의 제47대 단군인 고열가 단군께서 더 이상 뜻을 전할 이가 없다고 하시면서 산속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면서 단군시대의 폐관을 선언하였다.
이것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고조선의 붕괴와 열국시대의 개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기 전 4세기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 서부변경지역을 침략하여 2000 여리를 쳐들어 온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고조선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각 거수국들이 독자적인 행보에 나서게 되었고, 결국 고조선은 붕괴되어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게 되는 열국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독립한 거수국들은 정치적으로 하나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으며, 단군시대의 ‘홍익’정신을 계승하고, 인접 나라들을 병합하여 민족의 통일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로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삼국이 형성되게 되었고, 삼국은 서로 힘겨루기를 계속 해왔으며, 가장 약체로 평가되던 신라가 가야를 복속시키고 당나라를 끌어 들여 나당연합군을 구성, 백제를 먼저 병합시킨 후에 고구려까지 멸망시킴으로써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고구려 영토를 거의 상실하여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단군조선 이래로 민족의 융합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이러한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단군의 ‘홍익’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각 나라의 인재양성 제도가 부각되었다. 단군조선의 국자랑 혹은 천지화랑 제도가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과 그 우두머리 격인 선배로 이어졌으며, 특히 고구려의 선배는 조선시대 선비 정신으로 이어져 대일항쟁에 대한 의지를 고취시킨바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백제는 무절이라고 하여 무사도 정신을 일본에 전파하기도 하였다.

신라는 화랑도로 계승하여, 김유신 및 김춘추 등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주역들을 대거 양성하였다. 국자랑, 조의선인, 무절, 화랑 등 이들 모두는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수양하고, 자연과의 조화와 그 안에서의 위대한 사랑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을 일러 ‘선도(仙道)’라 불렀다. 이러한 삼국의 인재양성 제도는 선도문화의 부흥을 가져왔고, 뒤이은 발해와 고려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발해는 고왕 대조영이 동생 대야발을 시켜 단군조선의 역사서인 『단기고사』를 쓰게 하였고, ‘천부경’과 함께 우리 민족의 삼대 경전 중 하나인 ‘삼일신고’를 편찬하여 백성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로 이어져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선도문화인 ‘팔관회’로, 인재양성은 ‘재가화상’으로 이어져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다시 갈라진 후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의 대융합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실패로 주춤했지만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성군, 조선 4대왕인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를 백성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하였다.  세종대왕께서 꿈꾸셨던 태평성대란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는 세상이다.”(『세종실록』, 세종13년 6월 20일자 실록)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우리가 사용하던 말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적는 표기법인 이두를 사용하였기에 언문일치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600년 전 조선시대에 기득권층만이 배울 수 있었던 전유물이자 권력이었던 문자를 보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바른 생각을 갖게 함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백성들 스스로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고자 노력했었던, 현실이 아니라 역사에 살았던 군주가 바로 세종대왕이셨다.

여기서 ‘훈민정음’이란 백성들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인’이 아니라 ‘훈민’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한자에서 인(人)은 읽고 쓸 수 있는 가독층을 의미하고, 민(民)은 읽고 쓸 수 없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바로 그런 백성들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얘기인데, 세종대왕 말씀대로 바른 말을 해야지 바른 생각을 할 수 있고 바른 생각을 해야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래야 나라의 품격도, 백성들의 수준도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 ‘훈민정음’이라는 이 네 자 안에 들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의 담긴 뜻이 바로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이유인 것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 전 재산을 털어 지켜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위대한 사랑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1호로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을 만드신 이유는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매일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현실에서는 ‘사랑’, 역사 속에 발현된 것은 ‘홍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역사 속에서 실천하신 분이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그는 천심은 민심이라고 했고, 진정한 충(忠)은 임금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향한 것이라고 하여 백성들을 향한 남다른 사랑을 보여 주었다. 세계 해전 역사에 길이 남을 23전 23승 불패의 기록, 그것은 아마도 그러한 위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은봉야사별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때도 도(道)를 다하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최고의 사랑, 바로 ‘홍익’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후손들을 위한 선조들의 위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 우리 문화임을 알게 된다. 문화의 힘을 강조한 백범 김구 선생은 아름다운 문화강국을 꿈꾸었고, 그것이 광복이후 통일 한국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도 대한민국의 꿈, 한국인의 이상을 차디찬 겨울하늘을 비끼어 가는 겨울 철새들의 역동적인 날개 짓을 따라 그려 본다.

단기 4347년 12월 26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