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근대 이전의 시기 영해박씨가『징심록』을 전수해 갔던 모습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근대 이후 박재익에 의해『징심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문천의 박씨 일족은 양산군수를 지낸 문홍 이후 지방의 유림세력으로 존재하게 되는데, 문홍의 직계로 박제상의 52세 박인록朴寅祿, 53세 박래봉朴來鳳, 54세 박진영朴璡榮이 있다. 박진영(1871~1961)은 고종대 교원敎員을 지냈으며 금호대서당錦湖大書堂(문천 박씨의 사숙私塾)의 마지막 선생으로 윤해尹海 외 백여명의 문인으로 거느렸다고 하니 문천 일대의 명망 있는 유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일 정씨와의 사이에 재익載益, 재풍載豊 2남과 2녀를 두었다.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박진영의 맏아들인 박재익(1895~1969)은 박제상의 55세로 자는 광보光甫, 호는 금당琴堂(또는 금당錦塘), 후에 금錦으로 개명하여 주로 박금朴錦으로 알려졌다. 문천에서 태어났으며 가학을 익혔고 정규 학교 교육은 받지 않았다. 20대에 청년운동, 문예운동을 하다가 1924년(30세) 무렵 원산의 동아일보 지국에 입사하여, 1928년(34세) 원산지국장을 거쳐 동아일보 본사로 옮겨 사회부 기자를 지냈다. 1929년(35세) 원산대노동쟁의元山大勞動爭議와 1931년(37세) 만보산萬寶山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특히 만보산 사건 취재 시에는 사태수습에 공을 많이 세워 당시 중국 국민정부의 주석이던 장개석으로부터 그가 입고 출정한 중산복中山服과 친서 1통을 받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만보산 사건은 장춘長春 근교 만보산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 개설을 둘러싸고 일어난 분규로 일제는 이를 허위과장 보도함으로써 조‧중 갈등을 일으켜 대륙침략의 구실로 삼으려 하였다.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동아‧조선 양 신문사의 노력으로 사태는 원만히 수습되었는데, 특히 동아일보 기자 박금의 공이 많아 장개석은 화상華商 궁학정宮鶴汀을 통해 노고를 치하하였다.

1934년(40세) 동아일보 퇴사 후에는 연구와 교육사업에 몰두하였으며 1941년(47세) 2차 대전이 일어나자 향리인 문천 금호錦湖에 칩거하여 금호종합이학원錦湖綜合理學院(금호이학원) 및 선사학회연구원先史學會硏究院을 설립, 가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945년(51세)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이 주도한 문맹퇴치운동인 성인교육협회총본부成人敎育協會總本部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47년(53세)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1949년(55세)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에 이름을 올리면서 좌우합작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56세) 한국전쟁으로 울산에 피난한 이후에는 사회활동을 접고 가학 연구에 전념하여 1953년(59세)『연의』를 완성하였으며 1958년(64세)에는『영해박씨천현록寧海朴氏闡顯錄』을 편찬하고 영해박씨 세보(『영해박씨대보』) 편찬을 주도하였다. 1967년(73세)까지도『신라초대오왕계박씨선원세보新羅初代五王系朴氏璿源世譜』를 편찬하는 등 연구를 계속하다 1969년(75세) 사망하였다.

박재익은 어린 시절 집안의 삼신궤 바닥에 보관된『징심록』을 꺼내 보고 익혔는데 그 과정에서『징심록』의 남다른 가치를 알게 되었던 듯 30대 동아일보 재직 시에『징심록』을 번역, 잡지에 게재하려다가 일정日政의 기휘忌諱에 저촉된다는 편집자의 만류로 중지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징심록』을 익혔고 청년기에는 번역까지 할 정도였으며 만년 금호이학원 칩거시에는『징심록』의 수리數理 고증에 몰두하였다고 하니『징심록』에 관한 조예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복 이후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좌우 대립과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박재익은 향리 문천의 금호이학원에『징심록』원문을 남겨두고 월남하게 된다. 영해박씨 가학의 핵심인『징심록』원문을 잃어버리게 된 것으로 이를 한탄하던 박재익은 1952년(58세) 여름 울산 피난처에서 젊은 시절 번역했던 기억에 의지하여『징심록』복원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방대한『징심록』완본을 복원하기란 불가능하였기에 특히 익숙하였던 일부분만이라도 복원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결국 1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1953년(59세) 여름『징심록』15지 중의 1지에 해당하는「부도지」및『징심록』의 부록편인「징심록추기」를 원문 형태로 복원해내었고 여기에 저간의 사정을 밝힌 본인의「후기後記」를 덧붙여『요정징심록연의』를 완성하였다.
원서명인『징심록』을 그대로 쓰지 않고 앞에 ‘요정要正’을 붙인 것은 원문을 회수할 때까지 ‘요정’이라는 글자를 붙여 훗날의 정정을 기다리겠다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그럼에도 기록의 중요 부분은 기억이 명료하며 또 고증을 거쳐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본뜻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였다고 했다. 단 문체와 구절의 순서는 꼭 원문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영해박씨 대종회 장서고(경기도 성남 소재)에는『징심록연의澄心錄演義』2종(영박1-33)이 소장되어 있는데, ‘관설당觀雪堂이 작성하셨다는 징심록과 김시습의 징심록추기를 초대 대종회장 박금씨가 암송 작성한 초안 복사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제1종은 10자×20자 적선赤線 원고지에 정서精書된 필사본으로 표제는 ‘要正澄心錄演義’, 총 84매이며, 구성은 ① 부도지(47매), ② 부록1: 징심록추기(29매), ③ 부록2:要正澄心錄演義後記(8매)이다.
제2종은 프린트본으로 표제는 ‘澄心錄演義’(필사)이다. 표제 옆에 영해박씨 대종회의 서울시 전농동 주소와 전화번호 직인이 찍혀 있어 영해박씨 대종회에서 제작한 것임을 보여 준다. 내제內題는 ‘要正澄心錄演義’, 내제 옆에는 ‘自存性 原理 不滅의 歷史 由來’라는 제목의 300자 내외의 짧은 글이 실려 있다. 박재익의 역사관을 간략하게 요약 정리한 것으로 ‘自由의 基本原理, 自存性 原數理, 自由․平等․光明․永存’의 3항목으로 정리되어 있다. 박재익은 1952년『징심록』복원에 착수하기 직전에「自存原理의 實在」라는 글을 발표하였다고 했는데 그 요약문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澄心錄 중에 符都誌를 複寫하는 뜻’이라는 간단한 서문이 실려 있다. 박재익의 서문은 아니며 이 프린트본이 제작된 시점에 쓰여진 서문으로 보인다. 이어 본문으로 ① 부도지, ②〔부록1〕 징심록추기, ③〔부록2〕 요정징심록연의후기가 실려 있는데, 제1종 원고본과 동일하다.
『연의』를 낸 이후 박재익은 영해박씨 가학에 대한 식견을 인정받아 영해박씨 초대 대종회장(종약장)으로서 1958년(64세) 영해박씨 세보(무술대보戊戌大譜,『영해박씨대보』) 편찬을 주도하게 된다. 영해박씨 세보는 병오보(1786년, 정조 10년, 보은) 이래 지속적으로 간행되어 왔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용이 크게 일신되었다. 세보 내용을 보완하는 자료들이 정사류, 문집류 등에서 널리 채록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기존의 세보에 나타나지 않았던 영해박씨의 선풍仙風 및 가학家學 관련 내용이 다수 등장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종약장으로 세보 간행을 주도한 박재익을 통해『징심록』이하 문천 박씨 일문에서 전승해오던 영해박씨 가학이 세보에 대폭 반영되었던 때문이었다. 1969년(75세) 박재익이 사망한 이후 그의 나머지 유고들은 재차 1987년 정묘대보丁卯大譜(『영해박씨대동보』)에 반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문천의 박씨 일문에 의해 비전되던『징심록』은 근대 이후 박재익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세조대 이후는 유교성리학의 엄격한 벽이단론闢異端論 및 계유정란에 얽힌 혐의 때문에,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징심록』을 숨겨야 했다면 광복 이후에는 모든 제약에서 놓여나『징심록』의 부분 복원본이기는 하지만『연의』를 내며 영해박씨 세보에도 반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의』는『징심록』의 부분 복원본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를 위시한 동아시아 상고․고대사 연구에 더없이 중요하다. 여기에 나타난 선도사상과 선도 전승의 역사는 동아시아 상고․고대사에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고 있으나 후대에 이르러 불교나 유교의 시각으로 왜곡되거나 배제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연의』는 1953년 등장 이래 1986년 김은수金殷洙(1937~1986)에 의해 국역·해설,『부도지』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관련 연구도 촉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