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의』에서는 박제상 이후 파사왕계에서 자비왕대 백결선생 박문량朴文良(414~?), 법흥왕대 대아찬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마령간麻靈干 박담朴曇(499~578), 태종 무열왕대 파진찬 박용문朴龍文(584~670) 등을 지속적으로 배출, 신라초 이래의 선도를 화랑도로 경신하였고 화랑도에 기반한 삼국통일에 기여하였다고 했다. 또 신라말 박문현朴文絃(810~?)은 효공왕대 왕위 계승 분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워지자 신라 입국의 근본 이념인 ‘부도론符都論(부도복건론符都復建論)’을 환기, 이로써 시조 박혁거세왕의 후예인 신덕왕이 53대왕으로 추대되어 재차 박씨왕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정치한 연구가 있어야겠지만 신라초 이래 핵심 선도세력이던 파사왕계가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국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은 사세상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특히 신라말 박씨왕의 재등장에 대한 선도적 요인의 제시는 신라 정치이념 및 정치구조의 뿌리를 바라보게 하는 탁견이다.

『연의』에서는 또한 고려의 개창 이후 파사왕계 영해박씨는 전조前朝에 비해 그 위상이 현저히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대표적인 선도세력으로 존재하였다고 설명한다. 태조 왕건은 선도 전통에서 영해박씨가 차지하는 비중을 알고서 박제상의 18세‧19세인 박빈朴濱․박미朴楣 부자를 소환하였으며 현종도 대거란 항쟁의 과정에서 박미의 자와 손인 20세‧21세 박광렴朴光廉(952~?)․박섬朴暹(977~1045) 부자를 중용하였다고 했다. 또 정종은 26세 박명천朴命天을 중용하였는데, 특히 그는 박제상에 이어 재차 예원군禮原君(영해군寧海君)에 봉해져 영해 지방으로 거소를 옮겼다고 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는 현종대 안북도호부사로 거란전에 참여한 박섬의 존재가 확인된다.

영해박씨 세보 뿐아니라『고려사』‧『고려사절요』에 의거해 볼 때 고려시대 영해박씨가 성세를 이루게 되는 시기는 고려말 무인집권기 무렵이다. 영해박씨 세보에 의하면 박명천의 영해 이거 이후 가문은 더욱 번성, 특히 고려말 무인집권기에 이르러 박제상의 33세인 참지정사 박송비朴松庇(?∼1278), 신호위대장군 박인근朴仁謹이 등장하여 박송비를 파조로 하는 태사공파太師公派와 박인근을 파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로 분기하며 이중에서도 특히 시중공파 박인근의 자‧손‧증손 3대가 연달아 시중이 되면서 원간섭기 막강한 문벌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곧 박인근의 아들이자 박제상의 34세로 고종‧충렬왕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통해군通海君 박세통朴世通(1187~1263), 박세통의 아들로 충렬왕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박홍무朴洪茂(1227∼1285), 박홍무의 아들로 충숙왕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강양군江陽君 박감朴瑊(생몰년 미상)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시중을 배출하게 된 것으로 이즈음 영해 일원은 부역까지 면제, ‘거무역리居無役里’로 불리게 되었다고 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는 박세통, 박홍무의 존재가 확인되며 이제현(1287~1367)의『역옹패설櫟翁稗說』에는 박세통이 거북이를 구해준 음덕으로 3대 재상의 복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전한다. 현재 경북 영덕군 병곡면 거무역리에도 박제상과 백결선생 박문량 부자, 거무역리 입향조 박명천, 삼시중 박세통‧박홍무‧박함 등을 모신 운계서원雲溪書院이 남아 있다.
상기한 바 신라‧고려조 선도 정책의 중심에 영해박씨를 놓고 바라본『연의』의 기록은 당시의 지배적 시대이념이던 불교와 유교의 이면에서 또 다른 위상을 확보하고 있던 선도이념 및 선도적 정치세력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주목된다. 단, 신라 하대 이후 한국사회 내에서 선도의 위상이 갈수록 약화, 적어도 고려 이후에는 선도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적이 없었기에 선도 정치세력의 움직임은 정치 이면의 움직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이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연의』에서는 신라‧고려시기『징심록』의 전승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며 단지 박제상 이후『징심록』이 관향貫鄕인 영해로 옮겨졌다고만 하였다. 『징심록』이 영해로 들어간 정확한 시기는 미상이지만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 박감의 증손으로 영해 출신이었던 박창령朴昌齡 등이『징심록』을 서울로 옮겼다고 하였으니 최소한 고려 정종대 박명천이 영해로 다시 들어간 이래 영해박씨가 영해를 기반으로 하는 권문세족으로 성장하였던 고려후기 무렵부터는『징심록』이 영해 일대에서 전수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고려말 삼시중을 배출할 정도로 막강한 문벌을 이루었던 영해의 시중공파는 여말선초 왕조 교체기를 당하여 전왕조의 권문權門으로서 신왕조 개창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여말 박감의 세 아들인 박앙朴鞅은 홍문관부제학, 박유朴㽕는 이조참판, 박충옥朴忠玉은 홍문관제학에 이르렀으나 후손들의 사환은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경우도 있었다.

영해의 시중공파가 다시 중앙정국에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 세종대이다. 왕조교체에 수반되었던 극도의 혼란은 태종대를 정점으로 하여 소강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고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안정 속에서 왕조 초창의 기업이 다져지게 되었다. 세종은 정국의 안정과 현실적인 국가 경영을 위하여 새로운 시대이념으로 자리잡은 성리학이념을 강조하면서도 그 일변도로 경사되지 않고 다양한 사상들을 절충하였으며 또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한 여러가지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박학풍博學風은 특히 만년으로 가면서 더욱 분명해져 갔고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도 세종의 이러한 학문적 성향에 찬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연의』에서는 이러한 성향의 세종이 고유의 선도 전통에 관심을 보였던 면모를 전하고 있다. 박혁거세의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신라선도 전통을 잇고 있는 영해박씨를 서울 성균관 옆으로 이주하게 한 후 장로長老로서 우대하되 특히 박창령(1377~1449)과 그 일족을 중용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창령 일가는 영해에서 서울로 이거하였으며 막 상경한 지방세력으로는 이례적으로 비추어질 정도로 자손들 다수가 현직顯職에 올라 빠르게 거족巨族의 반열에 올라섰다.
박창령은 박함의 셋째 아들인 박충옥의 손자로 영해 출신이다. 박충옥은 여말 홍문관제학을 지냈고, 그의 아들 박유朴瑈는 전객령典客令을 지내다가 고려 멸망으로 벼슬을 내놓았다. 박유의 아들인 박창령은 박제상의 39세로 20세에 과거에 올라 태종‧세종대 경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전조銓曹의 이경貳卿(참판)에 까지 올랐으나 곧은 성격으로 시론의 배척을 받아 서북지방의 지방관으로 밀려나 영흥소윤永興少尹을 거쳐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치사한다.
또한 박창령의 첫째아들 박량朴浪(1394~1456)은 병조정랑, 둘째 아들 박도朴渡(1394~1459)는 판중추부사, 셋째 아들 박제朴濟(1398~1466)는 부사직, 박량朴浪의 아들인 박규손朴奎孫(1426~1494)은 예빈경, 박효손朴孝孫(1428~1495)은 형조참판, 박천손朴千孫(1431~?)은 사직, 박만손朴萬孫은 부사직, 박도의 아들인 박인손朴璘孫(1417~1487)은 병조정랑, 박계손(1419~1485)은 병조판서에 올랐다.

박창령 일가의 서울 이주와 함께『징심록』도 서울로 옮겨지게 되는데 특히 세종은 영해박씨 집안을 통해 입수된『징심록』을 훈민정음 창제 등에 활용하였다고 했다. 세종의 선도에 대한 관심과 영해박씨의 기용 등은『조선왕조실록』등 정사류에 나타나 있지 않는 내용으로『연의』에만 보이고 있지만, 세종의 학문 성향이나 당시 사상계의 동향 등을 고려해볼 때 개연성이 있어 앞으로 지속적으로 탐구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박창령 일가의 빠른 성장은 세종의 지우에 힘입고 있었기에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癸酉靖難시 박창령 일가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게 되었던 사실은 사세상 매우 자연스럽다. 세조로서도 세종의 총신이었을 뿐아니라 특히 단종대 병조판서를 지냈던 박계손 이하 병조 소속 관원들이 유독 많았던 박창령 일가가 지극히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1455년(세조 즉위년) 결국 세조가 즉위하게 되고 사태를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박도, 박제, 박효손, 박계손 등 박씨 일가는 뜻을 같이 해오던 매월당 김시습, 부제학 조상치曺尙治(생몰년 미상) 등과 함께 산간 벽지인 금화金化 사곡촌沙谷村 초막동草幕洞(현 강원도 철원 금화면 사곡촌 일대)으로 숨어들게 된다.
금화로 옮겨온 박씨 일가중 박도‧박제‧박규손‧박효손‧박천손‧박인손‧박계손 7인은 ‘박씨 7현七賢’으로 불리었으며 이들과 함께 은거한 김시습‧조상치 2인까지 더해서는 ‘9은九隱’으로 불리었다. 영해박씨 세보, 김시습의 문집인『매월당집』, 조상치의 문집인『조정재선생실기曺靜齋先生實記』등에는 이들 구은이 단종의 ‘자규사子規詞’에 화답한 시들, 서로 주고 받은 시들, 김시습이 쓴 박씨 일가의 행장 등이 실려 있어 이들의 긴밀한 교유를 알게 된다.
구은중 김시습은 특히 박창령 일가와 절친하여『징심록』전승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박창령 일가와 이웃하여 지내면서 수업하였고 가족처럼 왕래하였는데 특히 박창령을 일세의 사표師表로 존경하였으며 박창령의 손자들인 박규손, 박효손, 박계손 등과도 교유하였다. 특히 박계손과 절친하여 세한지맹歲寒之盟을 맺을 정도였다.
박씨 일가가 금화로 은거하는 과정에서『징심록』또한 서울에서 금화로 옮겨지게 된다. 경황중에『징심록』은 박효손에게 넘겨졌고 이때 김시습은 박효손을 통해 처음으로『징심록』을 얻어 보았다. 이후 김시습은『징심록』에 대한 소회를 담은「징심록추기」를 쓰게 되었고 이는『징심록』의 부록편으로『징심록』과 함께 후대에 전해졌다.

박씨 일가가 금화로 은거해 들어간 이후에도 세조가 자주 구은을 찾아 소환하려 하자 이들은 다시 길을 나누어가게 된다. 박규손과 자손들은 선영이 있는 금화에 머물렀으며 박효손과 자손들은 금강산(풍악산)에 수년간 머무르다가 양구, 회양, 통천 등지에 정착하였으며 박천손은 백천에 정착하였다. 박제와 자손들은 곽산 광림산으로 들어가 곽산, 지평에 정착하였다. 박도와 아들 6형제는 모두 함경도 文川(현 북한 강원도 文川市) 운림산雲林山 수한동水寒洞으로 들어갔다. 이때 도는 이름을 숭질崇質, 호를 ‘둔수遯叟’로, 계손은 이름을 숙손叔孫, 호를 ‘포신逋臣’으로 바꾸어 세조에 대한 저항과 은둔의 뜻을 분명히하였다.
또한 김시습은 송도‧관서 등지로 떠나갔고 조상치는 고향인 영천으로 떠나갔는데 특히 김시습은 전국을 방랑하면서도 박효손, 박계손 등과 지속적으로 교유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김시습이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박효손을 전송한 시, 운림산으로 들어가는 박계손을 전송한 시, 또 김시습이 쓴 박도 및 박계손의 행장 등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데, 특히 김시습은 박계손의 행장에서 ‘산수간을 방랑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오직 공만이 나를 알아주었는데 이제 더불어 짝할 이가 없게 되었다’며 한탄하는 내용이 있어 박계손과 긴밀한 교유가 이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김시습은 금강산의 박효손에게서『징심록』을 받아 문천의 박도‧박계손 부자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로써 당시 강원도‧함경도 일대로 흩어진 박씨 일가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박도의 둘째 아들 박계손이 최종적으로『징심록』전수를 담당하게 되었다. 박계손의 후손들은『징심록』을 집안의 삼신궤三神匱 밑바닥에 두고 출납을 엄금하게 된다. 『징심록』이 비단 가학家學의 차원을 넘어서 상고 이래 선도의 전승 과정을 밝힌 선도서로서 유교성리학의 시대에 용납될 수 없는 책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계손과 후손들의『징심록』은닉 문제와 관련할 때 세조대 이후 조선왕실의 선도서 수서령收書令이 새롭게 읽히게 된다. 1457년(세조 3) 조선왕실은 수서령을 발하여『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의『삼성기三聖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등 선도문헌들이 강제적으로 수거해 들이게 되는데, 이러한 처분은 예종대와 성종대 두 차례 더 시행되었다.

조선왕실의 선도서 수서령은 크게는 새로운 시대이념이자 신왕조 조선의 국시國是로 자리잡은 유교성리학의 발양에 선도의 세계관이나 민족주의적 성향이 걸림돌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금압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한편으로 선도서 수서령이 세조대에 본격적으로 발동되었다는 점에서 계유정란으로 집권한 세조대 정권의 사상통제의 측면도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세종~단종대를 부정하고 즉위한 세조대 정권은 세종~단종대 사상계의 일축이었던 선도를 금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세조대에 시작되어 성종대까지 지속된 수서령은 문천의 박씨들로 하여금『징심록』전수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하였을 것이며, 물론 이후에도 우심해져가는 성리학의 주자주의화朱子主義化 분위기 속에서『징심록』전수가 더욱 어려워져갔음은 물론이다.

계유정란 이후 수세대가 흘러 영해박씨에게 씌워진 반왕反王 혐의가 점차 옅어져가면서 문천의 박씨들은 일대의 유력 사족으로 부상하게 된다. 박계손의 손자이자 박제상의 43세인 희윤希允 이래 대대로 능참봉직에 오르게 되는데, 특히 계손의 현손인 45세 박유경朴有慶(1600~1649)‧46세 박영달朴永達(1644~1727) 부자는 노론 산림 우암 송시열(1607~1689)을 사사하였으며 회니시비懷尼是非시에 윤증의 배사背師를 극론하고 송시열을 향사한 사당을 세우는 등 노론 성향을 보였고 이로써 재지적 기반을 더욱 탄탄히 하게 되었다. 49세 박사섭朴師燮(1736~1807)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중앙으로 진출, 의금부도사에 올랐으며 사섭의 셋째아들인 50세 명벽命璧(1773~1827)은 노론 산림 오희상(1763∼1833)의 문인으로 홍직필 등과 교유하였으며 사헌부 감찰에 올랐고 명벽의 맏아들인 51세 문홍文金弘(1795~1862)은 양산군수에 올랐다. 이처럼 문천의 박씨 일족은 노론계 산림세력과 교유하면서 재지적 기반을 다졌고 19세기 무렵에는 중앙으로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듯 가문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박계손에게도 정절공貞節公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징심록』은 꾸준히 전수되었는데, 가령 51세 문홍은 박제상의 향리였던 삽량주, 곧 양산梁山 지역의 군수로 배임되자 박제상의 별서였던 징심헌을 새롭게 수축한 후 그 기문記文에서『징심록』의 남다른 의미를 지적하였다고 했다. 문천 박씨 일문은『징심록』을 여러 세대에 걸쳐 전사傳寫하는 방식으로 전수하였다 한다. 곧 박제상의 55세이자 박계손의 14세가 되는 박재익은 어린 시절부터『징심록』원본을 보아왔는데, 긴 한지를 4절로 잘라 세서細書한 약30장 정도 분량의 소책자 형태로서 부록편인「금척지」만이 고체古體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근고체近古體로 고쳐져 있었다고 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징심록』은 수차례 옮겨 쓰여졌고 그 와중에 문장은 시대에 맞게끔 근고체로 고쳐졌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