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시대로 대표되는 우리 상고사는 그 동안 왜곡의 실체가 파헤쳐 지기도 했고, 꾸준한 연구 노력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 등으로 아직까지는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전에 비하면 많은 성과가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역사교과서에서 고조선 역사가 부활이 되고, 고조선과 단군관련 학술성과를 바탕으로 다양한 서적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제는 반만년 역사라는 시간적 배경과 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하는 공간적 배경에 대한 공감대도 확산되어 가고 있다.
너무나 반가운 현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현상이기도 하다. 또한 근ㆍ현대사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활발한 연구와 논쟁이 있어 왔다. 이념에 따른 견해 차이가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불과 100년 전의 상황이라, 그리고 격동의 세월을 겪으면서 많은 변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거나 증언을 통해 바로 잡아지고 있는 것도 많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권력집단에 의해 자행된 잘못된 역사의 과정도 역사의 심판을 받기도 한다.

역사는 무정한 것이다. 역사 앞에서 관대함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시간만이 관건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역사는 분명하게 그 허와 실을 보여주고 진실이 드러나게 한다. 역사 앞에 인간은 너무나 작거나 가벼운 존재이지만 그 역사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상고사나 근ㆍ현대사 비해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되는 삼국시대의 역사, 즉 우리 고대사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 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우리 역사 교육이 너무 잘되어 있는 탓이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잘못된 역사 교육이 얼마나 큰 폐해를 초래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잘 배워왔던 우리 역사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한 순간이다. 우리 고대사의 근간이 되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인데, 그 기록에 나오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백제왕이 일본 왜왕에게 하사했다고 하는 ‘칠지도’, 물론 일본에서는 백제왕이 일본 왜왕에게 바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광개토태왕릉비문의 일부 내용과 함께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었다고 하는 임나일본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칠지도 명문상의 내용으로는 백제왕이 일본 왜왕에게 하사한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국내사서에 기록이 없다 보니 국내학계에서는 칠지도를 하사한 백제왕을 4세기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던 근초고왕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 왜왕에게 칠지도를 왜 하사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백제의 담로제도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중국사서나 일본사서에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 국내사서에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편집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즉, 오로지 마지막 남은 삼국의 기록만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동시대 다른 나라의 역사서를 살펴보고 비교해 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담로는 백제가 여러 제후국을 거느렸던 대제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다. 백제의 담로는 고구려의 다물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 말의 담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담은 우리말에서 울타리 혹은 경계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영토뿐만 아니라 단군조선의 천하질서관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 고구려의 국시였고, 이것을 다 물려받는다는 뜻으로 ‘다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다물’의 전통은 백제의 담로로 이어 졌다. 담로 중 하나가 탐라도, 즉 지금의 제주도이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남부지방과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 곳곳에 담로의 흔적이 보인다. 이렇듯 ‘칠지도’와 ‘담로제도’의 존재에 따라 기존 우리 고대사 중 백제사의 근간이 흔들린다. 기존에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배운 백제에 대한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백제는 잘 알다시피 나당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전하고, 백제 유민들의 부흥 운동이 끝내 실패하였으며, 일본 왜왕이 보낸 군대마저도 패하고 말면서 663년에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그로 인해 백제사는 왜곡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그 기록이 사람의 기억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백제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신라에게 명분이 있는 것이다. 인류사적으로도 보면 전쟁의 명분은 크게 없다. 다만 승리한 나라가 모든 명분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패배한 나라는 모든 잘못을 떠안게 된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그는 즉위 초기에는 해동 증자로 불려질 만큼 성군의 자질을 충분히 갖고 있었던 군주였다. 그가 갑자기 삼천 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타락한 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의자왕은 나당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웅진으로 이동, 후일을 기약했지만 신하의 배신으로 붙잡혀 포로가 되면서 백제가 멸망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삼천 궁녀가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서 중 그 어디에도 당시 백제 왕궁에 삼천 명의 궁녀가 존재했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의 백제 인구나 백제 왕궁의 규모로 볼 때 삼천 궁녀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버젓이 의자왕하면 삼천 궁녀로 연결될 수 있는가? 이것은 조선 중기 때 많은 조선의 문인들이 백마강을 돌아보며 옛 백제의 정취를 느끼면서 지었던 시문에 삼천 궁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대일항쟁기에 들어서면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였다. 지금도 백마강에 가보면 나룻터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삼천 궁녀를 확인할 수 있다.
시어에서 비롯된 것이 대중가요로 들어가 구전으로 이어지면서 역사로 자리를 굳혔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대일항쟁기 때 확대 재생산되었다. 일제의 이러한 행태는 백제가 그들에게 백제의 선진문물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 그 열등감을 백제사를 훼손하거나 폄하함으로써 상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식민사학은 근대에 들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역사학이다. 이병도를 비롯한 광복 후 한국 고대사학계를 장악한 인물들은 자신들의 역사학을 실증사학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반대편의 역사학을 반실증적인 것, 즉 반과학적인 것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고대 한ㆍ일 관계사는 일본의 식민사학이 가장 적극적이고 집요하게 역사 왜곡을 자행한 분야다. 대표적인 주장이 고대 일본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해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다. 2015년은 광복 70주년,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고대사학계는 여전히 과거 식민사학자들이 그려 놓은 역사 퍼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학의 핵심 쟁점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식민사학자들은 뚜렷한 논거 없이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시기를 고구려는 태조왕 때인 2세기, 백제는 고이왕 때인 3세기, 신라는 내물왕 때인 4세기로 본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백제와 신라의 고대국가 성립 시기를 3세기 혹은 4세기 중반까지 늦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삼국사기’보다는 오히려 남의 나라 역사서인 『삼국지』「위서동이전」 이나 「한전」을 더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고대사의 왜곡된 역사를 찾아서 식민사학으로부터 분리,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될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고, 우리 고대사는 식민사학의 그늘에서 벗어나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빛이 되어 줄 뿐만 아니라 꿈과 희망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민성욱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