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7일 오후 백두산에서 내려와 다시 강원도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다음 예정지로 출발을 한다. 발길을 재촉하는데  떠나려는 발목을 누군가 붙잡는다. 재중동포.
"삼 사세요. 싸게 팝니다."
식당 앞에 삼을 늘어놓고 말을 붙인다.  농투성이 같은 얼굴. 몇 사람이 그 말을 받아 흥정하여 몇 뿌리 산다. "잘 계세요. 내년에 또 뵈요. 건강하세요. " 타국에서 만난 동포라 이런 인사를 나누었다.

7월의 햇볕이 따갑다. 버스가 가는 곳은 청산리.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빠지지 않는 청산리 대첩의 현장이다. 가슴이 설렌다. 1919년 3월1일 전국에서 일어나 독립만세 운동을 펼쳤으나, 조선은 독립되지 못했다. 맨손으로 일어선 조선 백성에게 일제는 대포와 총칼로 대응했다. 이후 독립운동도 무장투쟁으로 변해갔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는 점차 무장 의병운동으로 일제에 맞섰다. 식민지 조선을 떠나 만주로 이주한 동포가 근간이 되었다. 당시 한국독립군의 주력은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서로군정서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였다. 서로군정서는 요령성에서 활동하였으며, 북로군정서는 길림성에서 활동하였다. 북로군정서의 근거지는 길림성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산 속이었다.

▲ 중국 내 독립운동 현장 답사에 참가한 (사)우리역사바로알기 회원들이 청산리대첩비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독립군의 무장 투쟁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이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에 따라 북로군정서군은 백두산을 향해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군대가 청산리에 이르러 일본군과 조우하게 됨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1920년 10월 21∼26일 길림성 화룡현 (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일본군과 싸워 대파했다. 대첩의 주역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였다. 

당시 청산리는 어떠한 곳이었을까?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철기 이범석은 이렇게 묘사했다.

청산리는 삼도구(三道溝)라고도 하는데 외곽에는 두 갈래의 큰 길이 있어 한 갈래는 남으로 두만강에 통하니 바로 그 강 건너에는 조국 땅 무산군(茂山郡)이 있다. 청산리 서쪽은 충신장(忠信場)과 맹가장(孟家莊)이니 이곳은 중국인들의 고장이다. 이 청산리 일대의 농사의 주인은 모두가 우리 교포들이었다.
 청산리는 만산준령(萬山駿嶺) 중의 한 계곡 분지로서 그 길이는 80여리에 달했다. 폭은 제일 좁은 곳이 4~5리. 제일 넓은 곳이 8~9리나 된다. 청산리 서북쪽은 비교적 수림이 적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울창했다. 동남간은 푸른 활엽수림과 침엽수림에 뒤덮이고 도처에 20~30길 높이의 송백떡갈나무 벚나무가 꽉 차 있었다. 하늘을 가린 나뭇잎들은 마치 겹겹이 닫힌 암흑의 문처럼 모든 광명을 가로막고 있었다.(이범석, '우둥불', 삼육출판사, 1978) 

▲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에 있는 청산리대첩 기념비에서 청산리 대첩 역사를 새겼다.

 이런 곳에 먼저 도착한 독립군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본군을 맞이하여 소수의 군대로 대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버스가 가는 동안 청산리전투 자료를 다시 보며 창 밖으로 눈길을 주었다. 저 곳 어디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물리쳤겠구나, 하염 없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버스가 도착하여 다리가 떨리는 듯하였다. 기념비, 외로이 서있는 기념비를 향해 돌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 숙연하게.

기념비 앞에는 꽃이 놓여 있다. 말로만 듣던 청산리 대첩 현장이다. 뒤로 돌아 청산리를 내려다보니 띄엄띄엄 민가가 보이고 한가롭다. 청산리는 말없이 당시의 치열했던 독립전쟁을 기억하고 있는가. 

비을 한 바뀌 돌아 뒤로 가서 임찬경 박사와 정길영 박사의 설명을 들었다. 벽에는  왼쪽에 중국어, 오른쪽에 한국어로 된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비문이 있다. 이 또한 가슴을 친다.

청산리 항일 대첩기념비

해내외를 진감한 청산리 항일 대첩은 항일투쟁사상 천고에 빛난 력사적 전역이어늘 1920년 10월21~26일 김좌진 홍범도가 통솔하는 항일 련합 부대는 화룡시 2ㆍ3도구에서 연변 각 민족 주민의 대폭적 지원하에 협동 작전으로 백운평 와록구 어랑촌 874고지 고동하반 전투 등 대소 수차 격전을 거쳐 천으로 헤아리는 일본침략군을 섬멸하였거늘, 소수로 다수를 타승한 이 전과는 연변 내지 동북지역 반일무장 투쟁사상 새로운 시편을 엮음은 물론, 조선 인민의 반일 민족 독립 운동을 추동한 력사로서 청사에 새겨졌어라.
청산리 대첩은 "일군 무적"의 신화를 깨뜨리고 연변 내지 전국 각 민족 인민의 항일 투지를 지대히 고무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위풍을 추풍 락엽처럼 쓸어버렸거늘, 그 실패를 달가와 않은 일본 침략군은 연변 지역 무고한 백성에 대하여 선후로 2,600명을 참살한 보복의 '경신년 대학살"을 감행하였은즉 그 죄 하늘에 사무치고 그 참상에 치가 떨리는도다.
청산리 대첩 80주년에 즈음하여 연변 지역 각 민족 인민은 이 기념비를 세워 선렬들의 충혼을 기리고 그 위업 천추 만대에 전하노라.
경신년 대참앙 중 조난 당하신 동포 원혼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청산리 전역 중 피흘려 분전하신 항일 영령들이여, 영생불멸하라!

연변 각 민족 인민 삼가 드림
2001년 8월31일 준공 

▲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문.

문장은 장중하다. 소수로 다수를 깨뜨려 이긴 전과는 일본 군국주의의 위풍을 추풍 낙엽처럼 쓸어버렸다고 상찬한다. 그리고 참패한 일본 침략군이 무고한 백성 2,600명을 보복으로 죽인 경신년 대학살은 그 죄 하늘에 사무친다고 경고한다. 참회할 줄 모르는 일본.  

▲ 중국 역사 기행 참가자들이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비문 앞에서 정길영, 임찬경 박사로부터 청산리 대첩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국내에서 이 대첩비를 찾아 온 이들이 우리 뒤에 합류하여 함께 설명을 듣는다. 정길영 박사는 서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산리 대첩과 서일 총재의 역할을 설명하니, 우리 일행이 아닌 사람들이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한다.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이 올린 전과는 혁혁하다.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는 김좌진의 대한군정서 전황보고를 근거로 일본군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1명을 포함하여 1,257명, 부상자는 장교 이하 200여명이라고 밝혔다.  독립군이 입은 인적 손실은 350여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전과를 두고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한다. "청산리전투는 인민군중의 지지하에 대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는 전역성을 띤 한차례 대규모의 전투로서 반일무장이 련합하여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타승한, 즉 자기보다 수배의 병력을 가진 일본정규군을 주동적으로 항격하여 큰 승리를 전취한 싸움이었다."(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민족출판사, 1999, 53쪽)

▲ 청산리대첩비 앞에서 순국 선열에게 묵념을 하며 그분들의 뜻을 새겼다.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요인은 무엇일까.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한국사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5)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무기와 병력면에서 절대적 우세를 자랑하던 이른바 무적황군 일본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렇다면 독립군이 이처럼 압승할 수 있었던 요인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우선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직접적 요인으로는, 정신적 측면에서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희생을 각오한 독립군의 결사항전 투지를 무엇보다 먼저 들 수 있다.(…)조국광복이라는 확고한 투쟁목표를 향한 독립군의 이러한 능동적 항전의지는 형식적 군제의 틀에서만 움직이던 일본군의 피동적 임전자세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전술·전략면에서도 독립군은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독립군은 삼림과 계곡 등의 지형과 지세를 적절히 활용하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뒤 접근해 오는 일본군을 향해 정확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화력과 병력의 우세만 믿고 삼림과 계곡에서 벌어질 전투에 대한 대비책도 없이 그대로 진군하는 무모한 작전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길목에서 매복한 독립군의 타격목표가 되었다. 백운평전투와 고동하곡전투 등의 예가 독립군이 구사한 전형적인 유격전술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독립군이 일본군에 비해 전술·전략면에서 우세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독립군 지휘부의 작전수립·군사운용 능력이 일본군 지휘관을 월등히 압도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청산리대첩 기념관이 있으나 문이 잠겼고 주위에는 새 풀이 무성하다.

 이와 같은 직접적 요인 외에 거시적으로 볼 때 간도 한인사회의 한층 고조된 민족역량이 대첩을 올리게 한 근원적인 요인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군의 모체였던 현지 한인사회에서는 독립전쟁에 즈음해 군수지원과 정보제공 등 물심양면으로 헌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동안 독립군을 양성해 온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국내진입작전이 개시된 1919년 여름부터 독립군의 항전에 모든 뒷바라지를 다해 왔었다. 가난한 농민이 주축이 된 한인사회는 경제적으로 생활기반조차 확고하지 못한 형편에서도 군자금을 내어 무기를 마련케 하였고, 군량·피복 등의 군수물자를 전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인 이주민들은 일본군의 동태를 정확하게 탐지하는 정보활동을 자원하였고 독립군의 각종 통신연락을 담당하였다. 때로는 지형·지세를 적절히 이용해야 하는 독립군이 부대를 이동하거나 배치할 경우, 현지 안내를 자원하기도 하였다. 천수평전투는 현지 주민의 정보로 일제 기병대를 기습공격하여 승리한 경우이고, 완루구전투 역시 현지 한인이 제공한 일본군 동향 정보가 승전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733284&position=12)

중국 자료에서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연변 반일무장부대가 청산리전역에서 강대한 적을 타승하고 이처럼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첫째로, 전체 장병들이 강렬한 반일사상을 갖고 있어 영용완강하게 싸웠기 때문이며 둘째로, 반일부대가 가는 곳마다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와 동정을 받았기때문이다. 인민군중들은 반일부대에 정보를 알려주고 량식과 탄약을 날라다주고 길안내를 해주고 부상병을 간호해주었던 것이다. 셋째로, 반일부대가 기동령활한 전략전술을 취하고 우월한 자연조건을 잘 이용한 것 역시 승전의 중요한 요인이었다."(."(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민족출판사, 1999, 53~54쪽)
 

 탑 앞에 모두 정렬하여 나라를 위해 이곳에서 싸우다 산화하신 순국 선열께 묵념을 올렸다. 이분들 덕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곳에 올 수 있었다.

탑에서 내려오는 데 버스 한 대가 도착한다. 한국 관광객들이 계단을 오르며 우리를 보더니 한 마디 한다.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 기념탑을 꼭 보고 가야지."
탑 아래에는 기념관이 있으나 모두 문이 잠겼고 일부는 훼손되기도 하였다. 기념관 부지는 제법 넓은데 가꾸지 않아 잡초가 제멋대로 자랐다.  전쟁의 상처가 아문 땅에는 새 풀이 무성하다. 새 풀에 더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