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國號)를 통해서 본 우리 고대사

우리의 말은 겨레와 더불어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민족이 하나의 핏줄과 언어로 뭉쳐진 사람들의 견고한 공동체이며,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고유한 언어가 있었기 때문에 민족문화와 문명을 창조 및 계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언어 속에는 우리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말의 역사를 올바르게 밝혀내는 것이 곧 우리 민족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한민족의 역사를 광복시키려면, 고고학적 발굴이 중요하지만 언어학 접근 또한 너무나 중요하다. 특히 지명, 인명, 국명 등은 매우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 고대사의 기층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 개인의 이름에도 각각 주어진 뜻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스스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하는 조선에도 그 이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최초의 국가인 조선의 수도가 ‘아사달’이었다고 쓰여 있다. '아사'는 ‘아침’, ‘날이 새는’, 또는 ‘아침이 밝아오는’ 이란 뜻을 갖고 있다. ‘달’은 우랄 알타이어의 땅이라는 말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탄’과 같으며, 일본어의 ‘따(타)’와도 같다. 나아가 북미 인디언 언어인 ‘미네소타’(미네는 물, 타는 땅)의 ‘타’와도 같다. 즉, ‘아사달’이란 ‘아침의 땅’, 또는 ‘날이 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를 한자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침 朝 맑아올 선鮮으로 표기한 것이 바로 ‘조선’이다. 여기서 ‘朝鮮’을 향찰식 표기로 설명이 가능하다. ‘朝’는 뜻으로 ‘아침 해’를 의미하고 ‘鮮’은 우리말로 ‘서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때 아침 해가 서는 것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예로 일본의 ‘아스카문화’가 있는 데, 일본이 만든 설명서에는 날飛 새鳥라고 써 놓고 발음은 ASKA 또는 ASUKA이며, 뜻은 ‘명일향’(내일이 오는 땅), 영어로는 ‘daybreak’이라고 써 있다고 한다. 물론 ‘카’는 땅이다. 날이 샌다는 말을 그 많은 한자 중에서 飛鳥(날새)를 골라서 향찰 표기한 우리 조상들의 예술성이 예사롭지 않다.
아스카문화는 사실 ‘조선문화’라고 써야 뜻의 정확한 표기이지만 우리가 먼저 썼기 때문에 일본이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사히 신문도 우리말로 아침해(朝日)신문이고,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아사코도 아침에 태어난 여자(朝子)가 된다.
고조선 붕괴 후 여러 열국들이 생겨나고 그 가운데 삼한이 한반도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삼한에는 마한, 변한, 진한이 있는데, 그 명칭의 유래만 보더라도 북방지역에서 한반도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마한은 한이 남쪽으로 내려 왔다고 해서 남쪽의 순수 우리말인 ‘마’를 써서 마한이고(남풍의 순수 우리말이 ‘마파람’이다.), 변한은 주민들이 변모(고깔처럼 생긴 모자의 한 종류)를 즐겨 썼다고 해서 변한이다. 그리고 진한의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당시 동북아시아 방향으로 대규모의 이주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진나라, 秦은 흉노와 같은 계통의 알타이계 유목민족으로 그 근원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누비던 스키타이 유목민들에게까지 이어진다. 秦의 멸망 기에 그들이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대규모로 북경일대에 사던 주민들이 韓(조선)의 땅에 이주했으며, 또한 언어가 서로 유사하여 秦韓 또는 辰韓이라 했다.
단군조선이 국호를 부여로 바꾸기도 하는데, 부여는 원 부여를 기준으로 그 방위에 따라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등이 존재 했었다.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가 되기도 하고, 일본 열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등 고대 동아시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국호 ‘부여’는 불, 부리, 벌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첫째, 불은 고구려와 백제의 금동 문양을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썼고, 특히 고구려는 태양신을 가장 숭배했으며, 태양은 곧 불꽃이라는 점을 감안할 수 있다. 둘째, 부리는 부여인들이 즐겨 쓴 고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고깔이 곧 새 부리를 형상화 했다는 추정이 가능해 진다. 셋째, 벌은 말 그대로 벌판이다. 부여는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드넓은 평야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단군조선 이후 다물 정신으로 단군조선의 옛 영토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천하질서관을 회복한 고구려는 그 국호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서기 전 37년부터 서기 668년 멸망하기까지 700년 넘게 한반도 북쪽 지역과 요동, 만주지역의 광활한 영토에 존재했던 고대국가로, 백제, 신라와 함께 한반도 역사를 이어왔던 중심축이었다. ‘고구려’라는 국호의 뜻을 살펴보면‘구려’는 고을과 구릉이라는 땅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에 ‘크다’,‘높다’,‘신성하다’를 뜻하는‘高’자를 붙인 것이다. 지리적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은 고대 사신사상에서 북현무라 하여 생명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가장 높은 곳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하늘과 가까이에 있는 고귀한 나라, 높고 큰 나라’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가 하면 유라시아 문명의 대융합을 가져 온 가야는 문헌기록에 여러 가지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데, ‘가야(加耶 · 伽耶 · 伽倻)’외에‘구야(狗邪·拘邪)’,‘가라(加羅·加良)’,‘가락(伽落)’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명칭들은 모두 ‘가야’·‘가라’를 음차 표기한 것인데, 그 가야의 뜻에 대해서는‘갈래[分派]’,‘강(江)’,‘겨레[同族]’,‘성(城)’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가라’는 만주어로 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고,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다어로는 물고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가야의 문양은 ‘쌍어문(雙魚文)’이었다. 이러한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은 불교에서는 ‘부처’혹은 ‘부처의 눈’을 의미하기도 한다.

분명 한계는 있었지만 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의 융합을 이루었던 신라는 어떤 의미를 갖고 그들의 국호를 불렀을까? '시라', '서라', '서나', '서야' 등의 여러 가차자로 기록이 남은 신라의 본래 이름이 당시에 가졌던 정확한 신라어 발음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름의 뜻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신(新)’은 '쇠'(鐵, 黃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동쪽을 뜻하는 '새'(우리말로 동풍을 ‘샛바람’이라 하는 점) 등이 있다.
'라(羅)'는 옛 지명에 많이 등장하는데, '가야', '임나', '탐라', '서라', '서야', '서나' 등에 나타난 '라', '나', '야' 등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도 '나라'를 비롯한 땅과 관련된 말의 끝에 'ㄹ'이 많이 들어간다.

이렇듯 우리 말 속, 특히 고대국가들의 국호 속에 남겨진 우리 역사, 혹은 우리 역사가 새겨진 우리말의 지속적인 연구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의 언어 습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단군 이래 최대 ~ 이다.” 예를 들면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 사업이다.” 혹은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최악의 사업이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 서로 다른 평가를 내 놓고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은 “단군 이래로”로 시작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은연중에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단군 조선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론 등에서 심심하면 강조하고 싶은 내용에 '단군 이래 최대' 등의 문구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말은 곧 '유사 이래 최대'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요즈음은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다양한 접근 방식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말 속에 남겨진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가다 보면 각종 사료나 사서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역사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보물을 통해 우리 역사는 더욱 더 빛날 수 있게 된다.

 

▲ 민성욱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