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소재구)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섬업벌 해역에서 지난 2012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수중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도자기 870여 점을 출수하고, 고선박 1척을 인양했다. 

지난 2012년 제1차 수중 발굴조사에서 고선박 1척을 발견하였다. 옹진군 해역의 강한 조류와 높은 파고로 인해 당시 장비로는 정밀 발굴조사가 어려워 지난해 수중 발굴조사 전용인양선인 ‘누리안호’가 투입돼 선체와 그 내부의 유물들을 조사하였다.

잔존 선체는 길이 약 6m, 폭 1.4m의 3단으로 결구(結構)된 상태로 상부에 철제 솥과 도기 등 무거운 선적물들에 의해 눌려있었던 부분만 남아 있었다. 선체 부재는 저판(底板, 밑에 대는 널빤지) 1열과 외판을 연결하는 부재인 만곡종통재(彎曲從通材: 저판과 외판을 연결하는 ‘L’ 자형 부재) 2단 등 총 3단의 형태로 남아 있다.

특히, 저판과 만곡종통재를 연결하는 데 사용한 장삭(長槊)이 기존의 고려 시대 발굴 선박에서 저판을 관통하는 것과 달리, ‘경주 안압지선’과 유사하게 밖으로 노출되어 연결된 게 특징이다.  이 연결 부재의 특징으로 보아 지금까지 발굴된 9척의 고려 시대 선박들과는 다른 형태를 보였다.  영흥도선의 활동 시기에 대한 내용은 더욱 깊이 있는 비교와 연구가 필요하나, 해양에서 발굴된 고선박 중 그 시기가 가장 앞서 우리나라 해양사와 선박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선체 내부에서는 청자가 단 1점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도기(陶器) 6점과 철제 솥 12점, 동제 용기 1점, 사슴뿔 2점이 확인되었다. 이 중 도기병 1점에서는 향기가 나는 투명한 황갈색의 내용물이 확인되었다. 이 내용물의 정확한 성분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현재까지의 분석 결과 예전부터 최고급 도료로 사용된 황칠과 유사하다. 이 도기병의 동체부에는 고려 시대 이전에 주로 보이는 파상집선문(波狀集線文)이 새겨져있다. 이 문양은 5세기 무렵부터 백제와 신라 지역의 도토기(陶土器)에서 많이 보였다가 9세기 전반 이후 점차 소멸한 것으로 알려졌다. 논산 표정리, 장도 청해진, 해남 백야리 모시골 가마 등 통일신라 시대 유적에서 비슷한 문양의 유물들이 확인된 적이 있다.
 

12점의 철제 솥들은 겹겹이 쌓아 선적된 화물의 형태로 발견되었으며, 모두 다리가 없는 가마솥(釜)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양주 대모산성, 창녕 말흘리 유적, 경주 황남동 376 유적 등에서 유사한 형태의 철제 솥이 출토된 바 있다. 또 솥뚜껑이 1점도 출수되지 않았는데, 고려 시대 이전에는 철제 솥뚜껑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로 추정할 수 있다.

선체 내부가 아닌 주변 해역에서는 다량의 자기가 발견되었는데 청자가 851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백자가 13점, 도기가 12점이다. 청자는 식생활용 그릇인 발, 접시, 뚜껑, 잔(통 모양) 등이며, 대부분이 포개서 번조(燔造)한 조질청자(粗質靑磁)로 제작방식이나 형태 등을 미루어 보아 12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수중 발굴조사는 옹진군 해역에서 청자가 발견, 신고되면서 시작되었다. 출수된 유물 중 청자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영흥도선 역시 고려 시대의 선박으로 추정되었으나,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채취한 시료의 연대가 모두 8세기경으로 분석되었다. 또 ▲ 청자가 선체 내부에서 1점도 확인되지 않은 점 ▲ 선체 내부에 적재되었던 철제 솥의 형태 ▲ 도기병에 시문된 파상집선문 등은 고려 시대 이전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영흥도선은 청자와는 별개의 통일신라 시대의 선박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